제인 진 카이젠의 작업은 개인의 경험과 정치적 역사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기억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달되는지를 탐구해왔다.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된 자신의 경험은 이주와 국경, 소속과 번역의 문제를 사유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작업은 점차 전쟁과 분단, 국가폭력으로 인해 흩어진 기억과 공식적인 역사에서 충분히 발화되지 못한 목소리로 향했다.
카이젠은 과거의 사건을 복원해 단일한 서사로 완결하기보다 생존자와 디아스포라 여성, 지역 공동체 등 서로 다른 위치에서 나온 경험과 증언을 만나게 한다.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역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누가 역사를 말할 수 있는지, 어떤 기억이 전승되거나 배제되는지, 서로 다른 장소와 언어 사이에서 경험이 어떻게 번역될 수 있는지가 오랫동안 작업의 중심을 이루어왔다.
제주는 이러한 문제들이 가장 밀도 높게 교차하는 장소다. 〈거듭되는 항거〉에서 카이젠은 제주4·3의 억압된 역사와 해소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현재의 풍경, 문학, 생존자와 유가족의 기억, 무속 의례 속에서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양상을 추적한다. 〈이별의 공동체〉에서는 바리 신화를 여성주의적으로 다시 읽으며 이러한 관심을 신화와 제의, 여성 디아스포라의 경험으로 확장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매개하는 존재가 되는 바리의 서사는 작가 자신의 입양 경험과 여러 한국인 및 디아스포라 여성들의 목소리, 제주 심방의 의례와 교차한다. 이 과정에서 신화는 오래된 이야기를 반복하는 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경험을 연결하고, 기존 역사 서술에서 떨어져 나온 기억들이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매개가 된다.
카이젠에게 제의와 영성 역시 과거의 전통으로 보존되는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이 질서의 장례〉에서는 전통 장례의 형식을 빌려 음악가, 예술가, 환경운동가, 디아스포라, 퀴어와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기존 질서의 장례를 수행한다. 나이와 젠더에 따른 역할은 새롭게 배치되고 장례, 정치적 시위, 카니발적 퍼포먼스가 한 장면 안에서 만난다. 〈할망〉과 〈제물〉에서는 이러한 관심이 해녀의 삶과 여성 노동, 모계적 기억, 제주 무속의 여신과 바다로 이어진다.
특히 해녀들과의 협업은 영적인 실천과 일상의 노동을 함께 바라보게 하며, 개인의 가족사와 세대를 거쳐 전승된 여성들의 지식이 현재의 환경 문제와 연결되는 지점을 드러낸다. 신화와 제의를 현재의 조건 속에서 다시 수행하는 카이젠의 방식은 사회적으로 정해진 역할과 관계를 흔들고 다른 공동체가 성립할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최근 ‘이어도(바다 너머 섬)’ 연작에서는 역사와 기억에 대한 탐구가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과 비인간 존재까지 넓어진다. 바다는 조상의 지식과 모계적 연결을 품는 매체인 동시에 추방과 죽음, 국가폭력의 흔적이 축적된 장소로 등장하며, 해녀와 심방, 활동가, 어린이뿐 아니라 해조류와 갑각류, 물과 바람 같은 존재들이 작품의 관계망에 참여한다.
〈잔해〉의 바다에 버려진 무기, 〈할망〉과 〈제물〉에서 이어지는 매듭과 소창, 〈수호자들〉에서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기억과 애도가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회복과 변화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초기부터 이어져온 이주와 경계의 문제는 이처럼 제주라는 장소를 거쳐 역사, 신화, 젠더, 영성, 생태가 서로 연결되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왔다. 카이젠은 그 연결 속에서 지워진 계보를 다시 불러내고, 인간과 자연, 산 자와 죽은 자, 과거와 현재 사이에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가 출현할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