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근욱의
회화는 기하학적 추상, 옵아트, 과정 중심 회화와 연결되는
요소를 지니지만, 정교한 착시나 완결된 형식 자체를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그의 작업에서 선은 형태를 설명하는 윤곽선이 아니라 시간과 압력, 호흡이
직접 기록되는 물질적 흔적이다. 엄격한 규칙에 따라 제작되면서도 손의 떨림과 색연필 가루의 불균질함이
남기 때문에, 화면은 기계적 질서와 신체적 오차가 공존하는 상태가 된다. 선의 반복을 수행이나 명상으로 해석하는 작가들과 비교할 때도, 지근욱은
반복 행위를 우주의 운동, 물질의 구조, 관찰의 조건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의
독창성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동일한 조형 원리 안에서 연결하는 데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화면은 색연필
가루와 얇은 선으로 흩어져 있지만, 멀리서 보면 행성의 고리나 파동,
장과 같은 거대한 구조로 결집한다. 이는 작은 입자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적 형상을 이루는
방식과 닮아 있다.
초기의 ‘Actual Dynamics’ 연작이
중력과 소립자의 움직임을 질서 있는 선으로 구성했다면, ‘Curving Paths’ 연작은 흐름과 연속성을, ‘Inter-shape’ 연작은 화면과 공간의 상호작용을, 최근의 ‘Space Engine’ 연작은 관측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우주를 회화 안으로 불러들인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 개념을 다루는 방식도 달라졌다. 초기에는 물리학이 화면의 규칙과 형태를 설계하기 위한
이론적 기반이었다면, 《콰오아》에서는 기존 이론의 공백과 예외가 상상력을 여는 계기로 작용한다. 《GLASS》에서는 관찰자의 시선이 현상에 개입하는 조건이 중요해졌고, 《금속의 날개》에서는 행위와 물질 안에 서로 다른 시간이 공존한다는 문제로 관심이 이동했다. 과학은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는 도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와
아직 설명되지 않은 상태를 회화적으로 탐색하기 위한 유연한 방법론으로 기능한다.
지근욱은
성곡미술관 오픈콜에 선정되었으며,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사업의 신진트랙과 유망트랙을 통해 작업을 이어왔다. 《하드보일드 브리즈》, 《콰오아》,
《GLASS》, 《금속의 날개》로 이어지는 최근의
전시는 색연필 추상이라는 출발점을 유지하면서도 변형 캔버스, UV 프린트, 금속성 안료, 장소에 따른 설치 방식으로 작업의 범위를 넓혀온 과정을
보여준다.
홍익대학교에서 판화와 회화를 공부하고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서 아트&사이언스를 전공한 이력 역시 감각적인 화면과 체계적인 사고를 함께 끌고 가는 작업의 기반이 되었다. 앞으로의 변화도 하나의 과학적 이미지나 형식에 정착하기보다, 새로운
물질과 기술, 관측의 방식을 회화의 신체적 경험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