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리의 작업은 신체의 쇠퇴와 소멸에 대한 초기의 관심에서 출발해 집과 도시, 문명과 자연의 시간으로 범위를 넓혀왔다. 집을 몸의 외화이자 삶의 기억이 축적되는 장소로 바라본 작가는 2009년 무렵 서울 휘경동 재개발 현장을 목격한 뒤 ‘휘경’ 연작을 시작했다.
철거를 앞둔 건축물을 조사하고 흙으로 정밀하게 재현한 다음 물로 침식시키는 방식은 이후 작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특정한 장소의 소멸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출발했지만, 작업은 도시의 반복적인 철거와 건설, 이주와 망각, 인간이 구축한 환경의 유한성까지 다루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휘경’은 하나의 지역이나 건축 양식에 고정된 연작이 아니라 장소를 조사하고 그곳에 축적된 시간을 물질로 번역하는 방법으로 확장되었다. 김주리는 중국 허난성과 인도 자이푸르, 미국 필라델피아 등에서 지역의 건축물과 도시 환경, 역사적 배경을 조사하고 이를 흙 구조물로 재구성했다.
작품마다 구체적인 장소와 건축적 세부는 달라지지만, 견고하게 구축된 형태가 물과 만나 해체되고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유지된다. 이 반복은 서로 다른 지역의 개발과 파괴를 동일한 이야기로 환원하기보다는, 각 장소가 지닌 고유한 시간과 기억을 문명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넓은 흐름 안에서 살펴보게 한다.
2017년의 〈일기(一期)생멸(生滅)〉을 전후로 작가는 건축물의 재현에서 벗어나 빛과 소리, 냄새, 식물과 움직임을 결합한 감각적 환경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모습 某濕’ 연작에서는 구체적인 건축 형상이 거대한 흙덩어리와 주름진 표면, 내부를 가늠하기 어려운 비정형의 몸체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도 굽지 않은 흙과 물, 시간과 환경의 개입이라는 작업의 조건은 지속된다. 과거의 작업이 완성된 구조의 붕괴를 직접 보여주었다면, 최근의 작업은 응고와 액화, 퇴적과 침식이 동시에 잠재된 물질의 상태를 제시하며 변화의 시간을 조각 안에 압축한다.
최근의 ‘Clay Tablet’, ‘Column’, ‘Peaks’ 연작은 초기 작업에서 다루었던 도시와 건축의 기억을 지층과 풍화, 폐허와 자연의 순환이라는 언어로 다시 연결한다. 아파트 평면도를 닮은 기둥, 건축 잔해를 분쇄해 만든 점토판, 산봉우리와 퇴적층을 연상시키는 덩어리에는 문명의 흔적과 그것이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함께 담긴다. 김주리의 작업에서 연작의 변화는 이전의 문제를 단절하거나 교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체에서 집으로, 도시에서 지질학적 시간으로 이동하면서도 흙과 물의 만남, 구축과 해체, 기억과 소멸의 관계를 반복해서 변주한다. 이러한 지속성은 조각을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물질과 장소, 환경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에서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