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진의 작업은 개인의
심리적 경험에서 출발해, 여행과 산책, 일상의 사물과 생명체, 반복되는 시간의 감각으로 점차 확장되어왔다. 초기 작업에서 작가는
불안, 혼란, 무기력처럼 말로 정리되기 어려운 내면의 상태를
몽환적 풍경과 인물의 모습으로 옮겼다. 〈구름철망〉(2011), 〈불안의
노래〉(2011), 〈먼지부엉이〉(2013) 등에서 구름, 안개, 숲, 먼지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는 형상들은 선명한 서사보다 불확실한 세계의 감각을 만든다.
어린 시절 어두운 숲을
지나던 기억, 천식으로 인해 숨을 예민하게 의식했던 경험은 작가에게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몸이 세계를 감각하고 견디는 방식과 연결된다. 이 시기의 회화에서
인물과 자연, 형상과 비형상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작가의
심리적 변화와 감각의 잔상을 담는 알레고리적 공간을 이룬다.
2012년
이후 최수진의 시선은 점차 개인의 내면에서 외부 세계를 향한 관찰자의 태도로 이동한다. 여행이나 산책
중 마주한 울퉁불퉁한 땅, 우거진 나무, 돌탑, 집 앞의 풍경은 사진으로 기록된 뒤 회화 안에서 다시 구성된다. 《모서리
산책, 무지개 숨》(이유진갤러리, 서울, 2015)은 이러한 변화가 분명하게 드러난 전시다. 이전 작업에서 풍경이 인물의 심리 상태를 감싸는 배경에 가까웠다면, 이
시기부터 풍경은 작가가 관찰하고 해석하는 주된 대상이 된다.
〈서귀포의 돌들〉(2014), 〈으랏챠〉(2015) 등에서 작가는 실제 장소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옮기기보다, 감정과 충동, 기억의 조각이 겹쳐진
회화적 장면으로 바꾼다. 이때 화면은 외부의 풍경과 내면의 감각이 서로 오가는 통로가 된다.
《무지개 숨 제작소》(합정지구, 서울, 2017)에
이르면 최수진의 관심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서 ‘어떻게 그림이 만들어지는가’로 이동한다. 전시 속 인물들은 색을 고르고, 채집하고, 말리고, 짜고, 운반하는
제작자들처럼 등장한다. 〈어떤 산책〉(2017), 〈파랑
채집〉(2017), 〈초록을 너는 사람〉(2017)에서 ‘숨’은 감정의 은유를 넘어, 대상이
색과 형상으로 감각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조형 언어가 된다.
‘무지개 숨’은 순간적인 인식이 다양한 색을 통해 회화로 옮겨지는 과정이며, ‘제작소’는 그 과정이 실제로 일어나는 작가의 신체이자 상상의 공간이다. 이후
《Fruity Buttercream》(AIT, 서울, 2021)에서 이러한 세계는 더 감각적이고 유희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빨강을
건져올리는 사람〉(2021)을 비롯한 작업들은 색, 덩어리, 문자, 털실 드로잉, 사운드를
통해 회화를 하나의 공감각적 세계로 확장한다.
최근 작업에서 최수진은
반복되는 일상과 시간의 축적을 더욱 적극적으로 다룬다. 《Pastry
Pillow》(WWNN, 서울, 2023)에서
베개는 잠과 꿈, 기억과 현재가 연결되는 포털처럼 제시되고, 〈Patchwork AM〉(2023)에서는 반복되는 하루의 감각과 사물, 동물, 정물이 패치워크처럼 엮인다.
《Air Pages》(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서울, 2024)는 이러한 시간 감각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전시다.
작가는 커튼, 베개, 테이블, 침대처럼 매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사물과 산책 중 만난 새, 두더지, 매미 등을 화면 안에 배치하며, 하루라는 시간을 보이지 않는 공기의
페이지처럼 펼쳐낸다. 〈Sunset Splash〉(2025)와 최근 작업들에서 시간은 더 이상 순간들의 나열이 아니라, 감각과
기억이 켜켜이 쌓인 덩어리로 다뤄진다. 최수진의 회화는 일상의 파편을 동화적 이미지로 바꾸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반복되는 삶의 리듬 속에서 기억과 감각이 어떻게 축적되고 다시 이야기가 되는지를 탐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