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애의 작업은 연필과 종이라는 제한된 재료에서 출발해 드로잉, 콜라주, 벽화 설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확장된다. 흑연은 선을 기록하는 도구인 동시에 가루, 얼룩, 광택, 마찰의 흔적을 남기는 물질이다. 작가는 필압을 조절하고 지우개, 면봉, 손가락을 함께 사용해 희미한 안개부터 단단한 금속성 질감까지 폭넓은 명암을 구현한다.
여러 장의 종이를 연결해 화면을 확장하거나 벽 전체에 드로잉을 펼치는 방식은 작고 직접적인 연필의 몸짓을 관객의 신체를 둘러싸는 환경으로 전환한다. 흑연의 연약함과 가변성은 불확실한 형상과 보이지 않는 감각을 다루는 작업의 내용과 긴밀히 맞물린다.
초기의 대형 드로잉에서는 동식물과 장기, 뼈, 촉수, 털, 비늘 등의 세부가 결합된 가상의 생명체가 정교하게 묘사된다. 생물도감이나 해부학적 표본을 연상시키는 세밀한 표현은 몬스터에게 실재감을 부여하지만, 서로 다른 종과 발생 단계가 뒤섞인 몸은 기존 분류체계를 벗어난다.
각 몬스터에는 서식지와 수명, 체질, 임무, 파생 순서가 설정되며 방어, 치유, 복수, 전환과 같은 기능이 형상과 서사의 구조를 이룬다. ‘미라’ 연작에서는 이러한 존재들이 작은 표본함 안에 고정되고 회색조의 인간적 얼굴을 드러내면서, 활력 넘치는 괴물의 운동성과 대비되는 취약성과 연민의 정서를 형성한다.
작가는 한 장의 종이에 형상을 그리고 지우는 과정을 촬영해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편집하면서 드로잉에 시간을 도입했다. 앞선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잔상으로 남아 다음 장면의 단서가 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의 서사는 명확한 인과관계보다 출현과 소멸, 변형과 연상의 흐름을 따른다.
〈램프〉와 〈Becoming〉을 비롯한 작업에서 사물과 생명체는 하나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빛, 불, 연기, 낙하와 같은 사건을 거치며 끊임없이 다른 형상으로 이동한다. 반복 재생되는 영상은 끝을 다시 시작으로 연결하고, 종이 위에서 이루어진 그리기와 지우기의 물리적 시간을 생성과 소멸의 순환 구조로 확장한다.
〈우연한 밤〉 이후에는 탁본과 콜라주가 주요한 조형 방법으로 더해졌다. 작가는 벽, 나무, 돌, 흙, 일상적 사물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흑연으로 문질러 물질의 요철과 흔적을 채집한 뒤, 원래의 위치와 무관하게 종이를 재배열하거나 잘라 붙인다. 구체적 대상을 재현하려는 의도를 낮춘 자리에서 우연히 드러난 무늬는 인물, 공간, 생명체로 증식하며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사이를 이동한다.
최근의 ‘디스턴트 룸’과 〈서 있는 사람〉에서는 영상, 콜라주 드로잉, 프로젝션, 벽화, 자연의 소리와 방울 소리가 전시장 전체에 연결된다. 평면 안의 이미지와 실제 공간이 포개지면서 내부와 외부, 물질과 비물질,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유동적으로 변하고, 관객은 작품의 장면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그 장면을 신체적으로 통과하는 위치로 옮겨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