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인(b. 1981)은 특정 장소에서의 장기적인 체류와 신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축적되고 변형되는 감각과 기억을 회화의 언어로 탐구해 왔다. 특히 그는 풍경이 소멸하는 순간, 혹은 그 앞에 머물렀던 기억의 잔상에 주목하며 이를 회화적 밀도와 물질성으로 전환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이혜인, 〈목수의 시간〉, 2008, 캔버스에 연필, 아크릴, 유채, 130x162cm © 이혜인

초기 작업에서 이혜인은 자전적인 기억에 근거한 풍경을 화면에 담았다. 그 안에는 구체화되지 않는 현실에 처한 개인의 불안과 막연한 백일몽 또는 악몽이 뒤섞여 나타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신이 처한 동시대의 현실과 정서를 담아내고자 했다.


이혜인, 〈비정한 세계〉, 2008, 캔버스에 아크릴, 145x145cm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예를 들어, 〈비정한 세계〉(2008)에서는 지역개발에 의한 환경의 급진적인 변화를 목도한 후 사라져가는 풍경을 회화의 언어로 어떻게 시각화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반영된다.
 
이혜인은 기억 속 풍경을 화면 위에 끄집어 내어 옮기는 드로잉의 방식과 여러 색의 물감을 스퀴즈나 나이프를 이용해 화면 위에 밀고 겹치는 방식으로 현시대의 불안정한 풍경의 잔상을 표현했다.
 
그림을 살펴보면, 마치 종잇장처럼 얇은, 어딘가로부터 펼쳐진 움직이는 듯 보이는 땅 위에 남녀 인물과 개 한 마리, 집 한 채가 서로 먼 거리를 유지한 채 위치하고 있다. 이 소재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가져온 것인데, 함께 있으면서도 어딘가 멀리 있는 듯한 황량한 분위기의 원작 느낌을 재해석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혜인, 〈베를린 여름밤 자정〉, 2012, 캔버스에 유채, 40x50cm © 이혜인

이렇듯 이혜인은 초기 작업에서 기억 속의 풍경과 잔상을 끄집어 내어 회화로 옮겼다면, 2010년부터는 캔버스를 들고 서울 외각지역, 베를린 등의 장소로 나가 주변 풍경을 작은 화폭에 담는-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고집했던-회화의 전통적 방법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업의 목적은 정확한 묘사의 결과물이나 형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물리적 시공간에서 수집할 수 있는 경험이나 제한적인 재료에서 발견되는 우연성을 작가의 시각과 결합하기 위함이다.


이혜인, 〈2019. 9. 20. across the railway〉, 2019, 캔버스에 유채, 40.7x31.7cm © 기체

따라서 이혜인의 ‘사생’ 작업은 단순히 눈앞의 경치를 그대로 재현하는 일이기보다는, 특정한 상황을 맞닥뜨리며 발생하는 자신의 온전한 순간, 상태에 관한 이야기이다.
 
야외 장소에 머무르며 그 순간의 날씨를 느끼는 일, 의도치 않게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 주어진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극복하거나 인정해야 할 조건을 인식하는 일, 그날의 습도와 온도를 신체로 감각하는 일, 그리고 눈앞의 장소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기억을 지금-여기에 덧대어 내는 일 등이 작업에 해당된다.
 
이혜인은 이러한 순간들을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언어로 전환하여 화면 안에 다양한 층위로 기록한다.


《어느 날, 날씨를 밟으며》 전시 전경(기체, 2020) © 기체

이는 단순한 대상의 재현을 넘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자,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잇고, 호흡하듯 이어지는 붓질로 끊임없이 현재로 도래하는 미래의 가능성을 캔버스 위에 열어 두는 행위이다.
 
이처럼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거듭 가늠하고 균형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눈앞의 풍경은 하나의 고정된 장면이 아니라, 특정 장소와 상황에 따른 신체적 경험과 정서가 축적된 화면으로 재구성된다.  


《L. Practice》 전시 전경(뮤지엄헤드, 2022) © 뮤지엄헤드

한편, 2022년부터 이혜인은 야외에서 실내로 작업 환경을 옮기며, 특정 장면에 축적된 시간과 감각, 기억을 화면 안에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2022년 뮤지엄헤드에서 열린 개인전 《L. Practice》에서 작가는 야외로 나가는 대신 야외 환경을 일종의 데이터로 전환한 장치를 통해 야외에서의 경험 자체를 일부 자동화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개인의 상념에 집중해 보았다.


《L. Practice》 전시 전경(뮤지엄헤드, 2022) © 뮤지엄헤드

예를 들면, 작가는 날씨(맑음, 흐림, 비, 눈)을 색과 시간의 시퀀스로 표현하기 위해, 위도와 경도를 입력하면 나타나는 특정 지역의 날씨 데이터를 RGB 컬러로 전환하는 LED 조명 장치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를 가상의 야외 환경으로 인지하며 작업을 진행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발 딛는 땅의 촉각과 닮은, 실제 그리기의 장이 되는 진흙 단지를 만들고, 그곳에서의 몸의 움직임을 소리로 전환하여 연주하는 드럼 세트도 구상해 봤다.
 
이를 통해 작가는 야외 작업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빛, 소리, 촉각 등을 실내공간에서 가상적으로 경험하며, 그것으로부터 파생되고 분열되는 보이지 않는 풍경을 전면화하고자 했다.


《L. Practice》 전시 전경(뮤지엄헤드, 2022) © 뮤지엄헤드

이러한 시도는 그림이 외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몸에 축적된 기억과 감각, 경험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며 발생하는 과정임을 드러낸다. 실제로 작가는 특정 장소를 다시 방문하지 않아도 과거에 경험했던 풍경과 인물, 분위기를 떠올리며 작업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화면은 하나의 장소를 정확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과 기억이 중첩되고 현재의 감각과 만나 새롭게 구성되는 공간이 된다.


《L. Practice》 전시 전경(뮤지엄헤드, 2022) © 뮤지엄헤드

전시 서문에서 권혁규 큐레이터는 이처럼 작가가 반복해서 과거의 장소와 기억으로 돌아가는 이유에 대해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흐른 지금도 자신의 몸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감각이 어떻게 현재의 회화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특정 풍경의 기록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축적된 기억과 경험이 현재의 붓질 속에서 다시 생성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L. Practice》 전시 전경(뮤지엄헤드, 2022) © 뮤지엄헤드

결국 전시 《L. Practice》는 그리기를 외부 세계를 재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몸에 축적된 기억과 감각이 자율적으로 화면 위에 드러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이를 통해 이혜인은 사생을 단순한 관찰이나 재현의 방식에서 벗어나, 기억과 시간, 신체와 감각이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회화적 실천으로 확장한다.


《마음의 영원한 빛》 전시 전경(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2025) ©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이렇듯 이혜인은 특정한 장소의 기억에 기대 그림을 그리던 초기 작업에서 나아가 대상을 직접 마주하는 야외 사생에 집중해왔으며, 최근에는 다시 기억의 심층으로 돌아가 이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5년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린 개인전 《마음의 영원한 빛》은 이와 같은 이혜인의 실천 과정을 역순으로 짚으며, 이러한 접근이 시기와 양식을 달리하면서도 지속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마음의 영원한 빛》 전시 전경(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2025) ©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이혜인은 대상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그것을 대면했던 순간과 캔버스에 옮길 때의 시차를 인식한다. 시간이 지나며 기억의 틈새에 낀 잔여물들을 받아들이고, 실체 없는 과거와 내밀하게 소통하며 이를 현재의 감각과 연결시킨다.
 
이렇게 완성된 화면에는 가족을 비롯해 그가 머물렀던 곳에서 만난 사람들, 동물들까지 구체적인 대상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작가가 마음을 기울이는 대상일 뿐 아니라,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져 가거나 사회의 경계에 자리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마음의 영원한 빛》 전시 전경(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2025) ©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작가는 이들이 있어 자신이 더 깊이 감정 이입할 수 있으며, 그 존재감을 남기는 일을 작업의 원동력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들을 떠올리고 마주하며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작가는 자신이 잘 알지 못했던 타인과 세상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여긴다.
 
따라서 이혜인의 그림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관계의 장이자,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본질에 다가서려는 몸짓으로 읽힌다. 즉,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자리한 본질을 응시하려는 시도이자, 자신이 속한 세계와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한 회화적 실천으로 읽어 볼 수 있다.


이혜인, 〈로사, 1부〉, 2026, 린넨에 유채, 162.5x130.5cm © 갤러리현대

이렇듯 이혜인은 기억과 풍경, 분위기와 같이 늘 변하고 언젠가 사라질 것들과 맞닿으며 작업을 해왔다. 불완전한 기억과 일시적인 감각의 파편들은 그의 그림 속에 물질로 고정되는 동시에, 작가가 지나온 여러 시공간을 잇는 매개가 되어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반복적인 덧칠과 지워냄, 긁어내기 등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화면은 다층적인 시간과 감각이 머무는 장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혜인의 회화는 시간과 공간, 신체 사이의 관계 맺음을 통해 축적되고 변형된 감각과 기억의 이미지를 담으며, 작가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에 대한 사유를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그 순간의 감각, 생각 혹은 어떤 기억…. 그곳에서 ‘추상성’이 생겨난다. (…)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비감, 경이로움, 아름다움도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다른 경험의 통로를 지나 도달한 개인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발견해낸 어떠한 지평에서 잠시 빛을 바라보는 것.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서로 다른 지평선, 그것이 모두와 연결됨을 그림이라는 찰나의 인식으로 알게 되는 것. 그것이 현재 내가 인식하고 있는 회화의 역할, 획득하고자 하는 추상성이다.” (이혜인, 작가노트)


이혜인 작가 © 종근당예술지상

이혜인은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후 동대학원 서양화과를 수료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마음의 영원한 빛》(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파주, 2025), 《L. Practice》(뮤지엄헤드, 서울, 2022), 《어느 날, 날씨를 밟으며》(기체, 서울,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구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갤러리현대, 서울, 2026),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 서울, 2024-2025), 《가변하는 소장품》(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4), 《몸짓하는 표면들》(피비갤러리, 서울, 2022), 《UNBOXING PROJECT: Today》(뉴스프링프로젝트, 서울, 2022), 《In Bloom》(하이트컬렉션, 서울, 2021), 《밤이 낮으로 변할 때》(아트선재센터, 서울, 2019-202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이혜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대구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두산갤러리 등의 주요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