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정(b. 1986)은 동양화의 주된 매체인 한지에 담긴 미세한 흔적과 가벼운 감각들을 물질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해왔다. 얇은 한지 회화 작업이 벽에서 떨어져 바닥에 특정한 형태로 부유하는 풍경이라든지, 창가 붙여 둔 그림이 한지의 투과성에 의해 벽에 회화적인 잔상을 남긴 우연한 순간들에 주목한다.
 
이러한 경험들에 기인하여 작가는 종이라는 연약한 매체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비물질적인 찰나의 순간들에 물질성과 영원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기민정, 〈모노로지아의 여름〉, 2019, 화선지에 채색, 130x200cm © 기민정

기민정의 작업은 상당 부분 매체와의 관계 속에서 전개된다.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한지와 먹은, 그 재료적 예민함으로 인해 매체와의 긴밀한 이해와 소통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전통 매체의 연약한 성질과 관계해 오며, 그리는 행위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거듭해 왔다.


《종이를 세우고 돌을 감으면 가루가 흐르고 천이,》 전시 전경(OCI미술관, 2019) © 기민정

2019년 OCI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종이를 세우고 돌을 감으면 가루가 흐르고 천이,》는 종이라는 연약한 매체가 작가의 작업실에 놓여 있는 모습들에서 출발한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배접하지 않은 낱장의 화선지는 구겨지거나 찢어지기 쉽고, 재료 특성상 환경에 의한 손상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보통 잘 펼쳐 뉘어 두거나 벽에 매달아 공기가 순환하게끔 보관하곤 한다.
 
기민정은 한지에 비해 섬유질이 없어 잘 찢어지고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화선지가 작업실 환경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며, 그 연약한 물성을 더욱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다양한 재료적 실험을 진행해 나갔다.


《종이를 세우고 돌을 감으면 가루가 흐르고 천이,》 전시 전경(OCI미술관, 2019) © 기민정

창문이 많은 작업실에서 작가는 화선지를 화판에 붙이거나 배접해서 쓰지 않고 낱장의 화선지나 순지를 석회벽에 간단히 종이 테이프로 고정한 뒤 그림을 그렸다. 지지대 없이 간이로 벽에 고정하여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외부 환경에 따라 종이가 움직이고 반응하는 일련의 변수들을 작업에 개입시킨다.
 
작가는 이러한 실험을 자신의 박사 논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벽에 흔적 남기기/창문 앞에서 빛 머금기/벽에서 떨어져 내리기/망했다 싶으면 구석에서 구겨져 있기/바람 불면 흔들리기”(박사 논문, p.115).


《종이를 세우고 돌을 감으면 가루가 흐르고 천이,》 전시 전경(OCI미술관, 2019) © 기민정

전시 《종이를 세우고 돌을 감으면 가루가 흐르고 천이,》는 이러한 작업실에서의 수행적 경험을 그대로 옮기고 있었다. 전시명은 작가의 작업 중 기법과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실제 전시장에는 종이를 쌓고 뭉쳐 올린 더미와 석고 반죽을 감아 올려 만든 색색의 괴석들이 등장했다. 그 아래에는 검은 가루가 흐르고 아름다운 색으로 물든 대형 천은 벽을 따라 흐르며 여름철 에어컨 바람에 살랑거렸다.
 
이러한 기민정의 작업은 종이를 프레임에서 벗어난 유동적인 신체로서 인식하고, 그것이 놓이는 공간의 건축적인 요소에 반응하도록 함으로써 소재의 평면성을 뒤엎는다.


《불의 습기》 전시 전경(송은, 2021) © 기민정

나아가 2021년 송은에서 열린 개인전 《불의 습기》에서 기민정은 유리라는 차갑고 무게감 있는 재료와 화선지를 병치시키며, 두 매체 간의 긴장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보통 그림의 프레임을 이루는 유리는 그의 작업에서 작품의 일부로 편입되며 생경한 느낌을 자아낸다.
 
기민정은 회화가 불투명한 화면에 다른 차원의 형상을 보게 한다는 점에서 유리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가 작업하는 유리는 캔버스와 달리 우리의 시선이 통과하여 회화의 환영성을 무마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기민정은 그림 위에 유리를 붙여 두 매체 간의 차이를 충돌시킨다. 그림(화선지)는 연약하지만 존재감과 부피감이 큰 반면, 유리는 단단하지만 시각적 존재감이 미미하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회화적 행위에 대해 이질적 소재들의 긴장 속에서 균형을 지향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불의 습기》 전시 전경(송은, 2021) © 기민정

또 이러한 기민정의 작업은 현대사회의 복잡 다단한 모순들을 극복해 나가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서로 다른 물성과 무게를 지닌 화선지와 유리를 한 화면 안에서 균형시키는 그의 회화는, 이상과 현실, 내가 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상대적이고 모순적인 관계를 드러내며,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한다.
 
이러한 작업들로 구성된 전시 《불의 습기》에서 작가는 내면화된 자아와의 관계에 집중하며 순류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역류만을 갈망하는 것은 아닌 삶의 양가적인 태도를 내재한 자아의 에너지를 표출한다.


기민정, 〈습한 빛 속의 움직임〉(세부 이미지), 2021, 화선지에 채색, 강화백유리, 에폭시, 200x300cm © 기민정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얇은 화선지 위에 붓이 닿는 순간, 형형색색의 물감은 종이 결을 따라 번져 나간다. 찰나의 붓질이 만들어낸 형상은 이제 막 표면에 안착한 듯한 선명한 색감과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처럼 드러나며, 보는 이에게 오묘한 첫인상을 남긴다.
 
불특정한 형상 또는 불, 물, 안개나 연기와도 같은 순간적인 형상에 가까운 형상이 화선지에 젖은 채로 존재하다 서서히 말라가는 과정은 어떤 시점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민정, 〈Paper on Glass〉, 2021, 종이에 유리, 21x18cm © 기민정

기민정은 연약한 화선지에 그린 이러한 드로잉 작업들을 유리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연약함과 단단함, 불투명함과 투명함이 공존하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화선지에 스며든 물감의 생생한 흔적을 에폭시로 고정한 화면은 흐름과 충돌, 응축된 에너지를 담아내며,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저항하는 내면을 드러낸다.
 
한편, 소형 연작 ‘Paper on Glass’는 작가의 일상과 감정을 조용한 색면으로 풀어내며, 화려함보다는 차분하고 습윤한 정서를 담아낸다.
 
상반된 성질의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듯, 그의 작업은 현대사회를 이루는 양가적 감정과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에너지를 시각화한다.


《Salty Edge》 전시 전경(갤러리 까비넷, 2024) © 갤러리 까비넷

이처럼 기민정은 화선지에 그려진 가벼움과 연약함을 어떠한 방식으로 물질계에 고정시킬지에 관한 고민의 연장에서, 유리의 중량감과 차가움을 화선지와 대비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한편, 최근의 작업들은 보다 회화적인 언어로 전환되어 가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2024년 갤러리 까비넷에서 열린 개인전 《Salty Edge》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선이 지닌 내적인 율동성과 회화 언어의 논리에 의해 발생한 선들의 집합과 같은 형태가 회화 내부에서 무게감을 띄며 시각적 존재감을 발산한다.


기민정, 〈Purple Mandarine's dream〉, 2024, 한지에 채색, 비단에 아크릴, 138x594cm (여백 108cm) © 갤러리 까비넷

이러한 작업에서 기민정은 감정을 강박적으로 정제해오던 기존의 기조에서 벗어나 예민한 날것의 감정으로 작업을 진행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심상적 변화는 작가 자신이 작업과 맺는 관계에서는 물론, 화면과 작품이 존재하는 풍경이라는 총 세 가지 차원의 레이어에서 감지할 수 있다.
 
먼저, 화면상에서 붉은빛의 먹을 사용한 색의 변화를 선두로, 속도와 에너지를 강조한 날카롭고 끝이 정돈되지 않은 선의 운용은, 그간의 기존 동양화에서와 같이 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을 분명하게 해 시간 값과 공간 값을 명쾌하게 전달하던 것과 대조적이다.


《Salty Edge》 전시 전경(갤러리 까비넷, 2024) © 갤러리 까비넷

날카로운 엣지(edge)에서 균형을 잡으며 이미지를 불러오는 작업은 화면의 외부로도 확장되어, 작품이 존재하는 풍경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기민정은 동양화의 전통적인 배접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회화가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비단과 유리 등 서로 다른 물성을 결합해 화면이 전시 공간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도록 하고, 드로잉의 잔여 조각을 유리 사이에 압착하는 작업을 통해 연약한 이미지에 물질적 존재감과 무게를 부여한다.
 
나아가 특정한 상황과 시간성을 부여함으로써 작품은 하나의 연극적 장면처럼 읽히며, 회화와 공간, 물질과 시간의 관계를 새롭게 제시한다.


《안개와 뼈》 전시 전경(MO BY CAN, 2025) © 캔파운데이션

한편, 그간 종이와 유리를 병치해오던 작업에서 나아가 2025년 MO BY CAN에서 열린 개인전 《안개와 뼈》에서는 금속성 재료를 통해 비물질적 감각을 새로운 물질적 은유로 변환시키는 시도를 보였다.
 
이 전시에서 전개하는 작업은 괴석에 대한 오래된 시에서 발견한 바람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동아시아 문화에서 괴석은 ‘세상의 뼈’처럼 견고한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작가는 그 구멍 사이로 흐르는 바람에 주목했다.


《안개와 뼈》 전시 전경(MO BY CAN, 2025) © 캔파운데이션

나아가 작가는 동아시아 회화의 ‘골육(骨肉)’ 개념을 재해석하며, 선(골)과 색(육)의 상호 관계를 탐구했다. 그는 전통 회화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여겨졌던 백묘(白描, 선의 힘으로 대상을 세우는 것)와 몰골(沒骨, 색과 번짐만으로 형태를 드러내는 것)의 경계를 넘나들며, 뼈를 그리듯 구름을 그리고, 흩어지는 얼룩 같은 뼈를 오렸다.
 
이로써 선이 색이 되고, 색이 선이 되는 순간, 골육의 교차가 화면 위에서 살아나며, 잔여의 조각들은 한층 선명하게 떠오른다.


《안개와 뼈》 전시 전경(MO BY CAN, 2025) © 캔파운데이션

금 속성 판 위에 오려 붙인 화선지는 이러한 감각적 대비를 더욱 물질적으로 드러낸다. 부드러운 종이와 차가운 금속이 동시에 존재하며, 빛과 공기가 표면 위를 미묘하게 진동하며 스며든다. 금속의 회색은 주변의 빛에 반응하며 중간 지대가 되고, 그 위를 감싸는 종이와 먹의 번짐은 유연한 흔적을 남긴다.
 
단단한 금속과 부드러운 종이, 절단과 번짐, 공백과 잔여가 동시에 공존하는 표면은 정적인 화면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호흡을 가진 장면으로 변모한다.
 
투과의 매체였던 유리에서 반사의 표면으로 이동하면서, 빛과 흔적은 더 직접적으로 표면 위에서 충돌하고 공존한다. 유리 위에 흩어지는 가루를 뿌리고 칼로 새긴 글씨, 칼로 오려낸 종이와 남은 조각, 깨진 유리 조각과 종이의 이어짐은 구조와 흐름, 원형과 잔여, 응축과 확산, 단단함과 기체적 감각이 맞물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가만히 그리고 비로소 남겨진 것들: 레이어 위 레이어》 전시 전경(THEO, 2025) © THEO

이처럼 기민정이 화면 안에서 시도하는 충돌과 변형의 감각은 형태와 비형태가 공존하는 시각적 사건으로 응집된다. 이질적인 감각들 간의 충돌과 공존으로 균형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장면들은, 오늘날 복잡한 세상 속에서 각자만의 삶의 균형을 이루려 노력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겹쳐 보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과 실체의 모순 사이에서 마음의 균형을 이루려 노력하지요. 저의 작품은 균형을 찾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면들을 담고 있습니다." (기민정, 뷰켓 매거진 인터뷰 중)


기민정 작가 © 갤러리 까비넷

기민정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안개와 뼈》(MO BY CAN, 서울, 2025), 《Salty Edge》(갤러리 까비넷, 서울, 2024), 《불의 습기》(송은, 서울, 2021), 《종이를 세우고 돌을 감으면 가루가 흐르고 천이,》(OCI미술관,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차원확장자: 시·이미지·악보·코드》(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2025), 제9회 《여름생색展》(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서울, 2025), 《가만히 그리고 비로소 남겨진 것들: 레이어 위 레이어》(THEO, 서울, 2025), 《Curved Spacetime: 휘어진 시공》(갤러리 플레이리스트, 부산, 2024), 《원피스 ONEPIECE》(복합문화공간 111CM, 수원, 202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기민정은 수원아트스튜디오 푸른지대창작샘터(2023-2024), OCI미술관 레지던시(2022), 송은 아티스트 스튜디오(2021)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2019년 OCI Young Creatvies에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