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려, 맹맹꽁!』 표지 © 사계절출판사

유창창. 이 이름을 아는 독자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나마 사계절출판사가 2017년에 출간한 『정신 차려, 맹맹꽁!』 덕분에 그의 작업을 구경이나마 좀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하민석의 글에 그가 작화를 맡은 작품이기도 하고, 어린이 대상 만화책으로 기획한 책이라 그런지, 평상시의 그의 작업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모든 작품들 중 유일하게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다. 시각적 경험을 확장시키기에 너무나도 좋은 색감과 형태감을 보여주고 있어서 정말 아이들에게 권할 만한 작품인 반면, 유창창의 진면목을 파악하기엔 밀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읽어낼 수나 있을지 고민이다.  

유창창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해보면, 2007년 무렵이 되어야 발견된다. 1974년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주 늦게 작업을 시작했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의 이전 활동을 확인하려면 ‘유창운’ 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봐야 한다. 데뷔년도는 1997년, 《히스테리》라는 격월간 인디만화잡지에 단편 〈오도바이로 두부를 타자〉 등을 선보인 시기이다. 이후 《바나나》, 《딱지》, 《통조림》, 《오즈(OZ)》, 《카툰피》 등의 무크지, 웹진 등의 이름과 엮여 있다. 2001년에 초록배매직스에서 1997년부터 1999년 사이의 단편들을 모아 「두부」라는 단편모음집을 발간했다.


「두부」 표지 © 초록배매직스

이 단행본이 유창창의 유일한, 독자적인 작품집인 셈이다. 이후 2006년까지 《영점프》의 ’인디 존’에 단편을 게재한 후 「마이 라이프 마이 웰빙(황매)」, 「더 좋은 방향(새만화책)」, 「파마헤드(행복한 만화가게)」, 「여름사냥(한겨레신문사)」의 단행무크지에 단편을 내보이기도 했다. 


「파마헤드」 표지 © 행복한 만화가게

그가 유창창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만화무크지 《살북》 2호부터 7호까지 단편을 발표한 것 이외에 다른 만화작품이 없다. 물론 이전 시기에도 작품 발표량이 많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8년간 6개의 단편이라니. 이전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간 발표한 분량의 반도 채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이유를 유창창의 다른 활동, 특히 회화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98년과 2004년에 참가했던 단체전은 《언더그라운드 만화페스티벌》(1998, 금호미술관), 《파마헤드-작난展》(2004,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여하간 만화전시였다.

하지만 2007년부터는 아트페어 등 순수미술 분야의 단체전 전시가 주된 활동으로 보인다. 상당히 많은 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는 것, 그리고 2010년부터 대략 2년(2010년, 2012년, 2015년)마다 한 번씩 개인전을 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성실히 작업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다. 가장 최근 전시가 2017년에 파주의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열었던 《CHUCK》이다. 같은 해 종근당이 수여하는 ‘종근당 예술지상 2017’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유창창, 〈Animals(Sunset)〉, 2014, 캔버스에 혼합재료, 65 x 90.7 cm © 유창창

2015년부터 《칸 퍼레이드》라는 전시를 신명환 작가와 함께 기획하여 파주나 서울의 공간을 대여하여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스토리가 강점인 작품들과는 거리가 있는, 우리가 종종 대안만화라고 부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니, 유창창은 만화가로 부르는 것 보다는 회화, 일러스트, 전시기획까지 포함해서 포괄적으로 ‘작가’라고 지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칸 퍼레이드》 포스터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논리의 무용성과 시각적 우선성

유창창의 작품들에는 시작과 중간, 끝이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스토리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설사 스토리를 읽어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작품들이 부분적으로 있다 하더라도, 거기엔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무언가, 똑바로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예컨대 「두부」에 실려있는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면...〉을 보면, 이러한 특성을 잘 파악할 수 있다. 「두부」의 단편들 중 유일하게 스토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옛 애인과 함께 오던 클럽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던 주인공이 등장한다. 돼지코에 토끼귀를 가진 이 인물은 다른 단편에서는 주로 ‘미상씨’라고 불린다.

인천 중앙공원에서 왕관고양이가 탈출했다는 속보가 뜬다. 이 고양이는 실연에 슬퍼하는 사람들의 심장을 뜯어먹는다. 방송에서는 마음을 잘 보호하라고 하지만, 애인과 헤어진 사람들은 고양이의 급습을 막아내지 못하고 심장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간다. 주인공이 텔레비전에 나온 피묻은 입을 한 왕관고양이, 이어서 자신의 애인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가지만 뒤돌아본 그녀의 얼굴은 왕관고양이였다. 미친듯이 텔레비전을 쏘고 밖으로 뛰쳐나가 왕관고양이를 해치우고 제발 살아있길 기원하며 애인의 집으로 달려간다. 도착한 그곳엔 피우물만 남아있고, 그 속에 무언가 반짝거린다. 반지를 집어 들자, 피묻은 반지 속에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피흘리며 서있는 애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주인공은 결국 반지를 집어던지고, 그의 절망은 온통 검은 벽으로 표현된다.


유창창,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면...〉, 「두부」 pp. 25-26 © 유창창

짧은 스토리를 억지로 끌어내긴 했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읽어야 할 것은 스토리가 아니다. 이 이미지의 왼쪽 페이지를 보자. 그 전 페이지에서 반지는 바닥의 핏물 속에 있었다. 다른 희생자들은 모두 가슴이 뚫린 채 시신이 되었지만, 그녀만은 시신 없이 핏물만 남아있었다. 그러니 이 페이지는 현실 또는 현재가 아니어야 한다. 동일한 공간이지만, 반지 안과 반지 밖의 색이 다르다. 이 반지는 과거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조금 전 방의 기억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생각일까. 원하는 대로 해석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어쨌건 그녀 역시 왕관고양이의 습격으로 죽었을 테니까.

그보다 오른쪽 페이지의 두 번째 단을 보자. 시각적 통일성과 변주를 볼 수 있다. 총 7개의 모든 칸에 동그라미가 각기 다른 스타일로 하나씩 등장한다. 심장에 난 구멍(1), 달(2), 달과 반지의 융합형(3), 반지(4), 달과 반지의 융합형(5), 달(6), 구멍(7). 달과 반지의 융합형이란 딱히 달도, 딱히 반지의 모습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칸에 3차원적 모서리가 등장한다. 그것이 집구석이건, 또는 규정할 수 없는 하늘의 공간이건. 물론, 모두 다른 스타일이다.

칸의 배열에도 질서가 있다. 칸의 넓이는 동일하다. 가운데 칸(4번째 칸)은 주인공, 바로 양쪽 칸(3번째, 5번째)은 주인공의 집, 그 다음 양쪽 칸들(2번째, 6번째)은 하나는 애인의 집, 다른 하나는 클럽의 모습, 양 끝은 애인의 모습(1번째, 7번째)이다. 가운데 칸에서 주인공이 던진 반지는 마지막 칸의 전경까지 클로즈업된다. 온통 검은 공간속에 여전히 반지와 주인공은 이어져있다. 독자가 만들 수 있는 구체적인 스토리는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달리 말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시각적 즐거움은 독자들이 충분히 즐겨야만 하는 부분이다.

다른 단편들도 전체적으로 쉽게 읽어낼 수 있는 스토리는 없다. 부분적인 논리는 존재하지만, 도대체 미상씨나 다른 등장인물들의 설정이,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도저히 알 수 없고 설명되어 있지도 않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으므로, 시각적 제시방식에 조금 더 시선이 가는 것일 수도 있다. 2000년대가 되면, 시각적 차원이 더 강조된다. 방바닥과 방문이 사람의 얼굴처럼 형상된다거나,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을 더 많이 등장시킨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2004년의 「파마헤드」에 실린 단편 〈미스 메두사〉는 한 칸 안에 시각적인 정보들이 초현실주의적으로도, 입체주의적으로도 중첩되어 제대로 읽어내기도 어렵다. 그냥 부분적인 해석에 만족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 전체를 읽어낼 수 없듯이.


유창창, 〈조지와 왕조지의 불타는 죽음, 넋나간 화해〉, 《살북 6호》, 2013 © 유창창

2007년 《살북》 즈음부터, 이전에 비해 칸의 선들이 단정해진다. 위 그림을 보자. 여러 번 반복되는 ‘쌍’이라는 언어는 마치 규칙적인 음표처럼, 디자인처럼, 칸을 채우고 있다. 후경의 인물과 전경의 인물은 현실적으로 단일한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칸들에서, 스토리의 부분으로서의 의미는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칸들만을 이해하려고 들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마도 약간씩은 차이가 날 것이다. 유창창의 의도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전에 ‘시각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만화를 읽을 때, 스토리를 읽어내기 위해 칸의 연쇄를 따라가기만 하지 말라는, 강력한 관습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작가가 깔아놓은 길을 그대로 밟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전진하지 말고 좀 더 오래 머무르며 느끼고 생각해보라는 것. 이는 사실상, 만화형식을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게 만드는 스토리만화의 규칙에 어긋난다.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칸들의 결속력은 얕게 하고, 각 칸의 농도를 짙게 만들어야 한다. 유창창은, 따블로(tableau)에 이미지를 중첩시키듯이, 칸의 의미도 중첩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회화작업과 유사한 방식을 만화작업에도 적용시키는 중이다. 달리 말하면, 보통은 잘 접하기 어려운, 만화형식의 활용법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저 끝, 저 극단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매번 싸워나가는

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 중,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있다. 바로 ‘뒷모습의 여성’이다. 위에서 보았던 도판 7에서도 볼 수 있고, 많은 단편들에서 얼굴을 보이지 않고 뒷모습만으로 재현된다.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한 개체가 아니라 집단의 표상이니까, 또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아니면 숨기고 싶어서 등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여성의, 또는 여성에 대한 재현은 그다지 성숙한 방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왼: 2013 《월간 윤종신》 Repair 6월호 ‘나에게 온다’ 앨범 아트 © 유창창 / 오: 《칸 퍼레이드》 포스터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뒷모습의 여성은, ‘루나웨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로 변화했다. 주로 유창창의 전시나 일러스트 등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데, 그는 이 인물에 대해 ‘매번 도망만 다니는 여자아이’로 규정하고 있다. 검은 머리에 빨간 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언제나 쉼표와도 같은 검은 그림자를 데리고 있다. 초반에 등장했던 여성들은 도망가는 존재는 아니었으나, 루나웨이는 언제나 도망간다. 하지만 도망치는 모습이라고는 해도, 정말 절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여유를 누리는 모습 같기도 하다.

유창창이 주로 ‘피하고 싶은 것,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을 그린다면, 이 소녀는 그가 회피하고 싶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쩌면, 도망 다니기 싫다는 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니...자신의 신념에 따라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작가가, 도망치는 소녀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다고? 만약 그렇다면 이 작가는 도대체 어디까지, 언제까지. 싸워가려고 하는 것일까.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천박한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 돈 안 되는 대표적인 활동 중의 하나를 지속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버티면서, 이 작가가 보고 있는 곳이 대체 어디인지, 어떻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유창창이라는 이름을 잘 몰랐다면 꼭 기억해두자. 그의 다양한 활동영역에 만화가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기쁨이자 즐거움이자 행복이자 자랑으로 생각하며. 아이들을 위한 만화 「정신 차려, 맹맹꽁!」 이후 2년 만에 만나게 되는 그의 단편이, 이번엔 대체 어느 밀도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무진장 기대해보며 글을 마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