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입구, 검푸른 수조에는 물고기 한마리가 유영하고 있다. 아니, 그것은 책이다. 작가 이기봉이 독서 중이던 책을 욕조 속에 떨어뜨렸던 기억으로부터 건져 올려 현실화한 이 작품은 책의 효용성으로부터 죽음을 선고받은 후 예술이란 생명체로 부활한 존재이자, 무기물로부터 유기체의 생명을 갈아입은 듀얼바디(dual body)로서의 ‘주체’이다. 보라! 작가가 준비한 생명수 안에서, 펌프의 압력에 몸을 맡기면서 펄럭이는 책의 낱장들은 마치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보인다. 이 ‘외로운 독신자’는 ‘사물/예술’의 경계와 ‘죽음/삶’이라는 경계에서 태어난 ‘유기체 아닌 유기체’로서의 어떤 존재이다.


이기봉, 〈End of the End〉, 2008, 알루미늄, 철, 물 펌프, 청색 조명, 아크릴 상자, 90 x 152.5 x 65.2 cm © 이기봉

Cloudy와 미술관을 의미하는 어미 um을 합성한 작가의 작명인 《흐린 방(the cloudium)》에서 유추되듯이, 그곳에는 경계를 흐리는 희뿌연 불투명함과 무수한 진동들로 가득하다. 이 ‘흐릿함’이란 경계를 천천히 넘나드는 ‘포월(包越)’의 운동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밤/낮, 부재/존재, 감춤/드러냄, 정신/ 물질, 소멸/생성, 죽음/삶 사이의 경계를 천천히 오고간다. 그것은 경계의 극단을 딛고 넘어서는 ‘물리적 이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경계의 벽을 젖은 종이의 상태로 만들고 그 속으로 자신을 삼투시키는 ‘정신적 운동’이다. 이기봉의 축축하게 ‘젖은 정신’은 물로부터 거품, 안개, 수증기 등으로 자신의 몸을 서서히 변용하면서 포월의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운동’을 전체 작품들 위에서 느린 속도로 지속한다.

관객은 일차적으로 치밀한 재료실험을 거친 작가의 조형 언어가 유발하는 시각적 효과에 미혹된다. 3점의 회화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안개효과와 같은 축축함과 흐릿함은 0.5 cm의 간격으로 레이어를 만든 플랙시 글라스의 효과 때문이다. 또한 작품 〈Sense Machine〉에서 검은 상자 내부의 수평과 수직의 붉은 레이저 광선이 마치 자라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박스 내부를 가득 채웠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수증기의 효과 때문이다.


이기봉, 〈Sense Machine - 수평의 지속〉, 2012, 혼합 매체, 330 x 237 x 60 cm © 이기봉

설치작품 〈There is no place-shallow cuts〉은 또 어떠한가? 여기서 작가는 실제의 모래, 나무를 설치함으로써 자연을 충실히 재현할 뿐만 아니라 모터로 나무를 서서히 회전시킨다든지, 안개장치로 유리벽 안의 공간을 희뿌옇게 뒤덮어버리는 방식을 통해서 초현실적 풍광을 창출해낸다. 따라서 관객은 이 작품 앞에서 ‘물의 현상학을 통해 생성/소멸을 오가는 포월의 철학’과 더불어 ‘재료의 연금술을 통해 현실/비현실을 오가는 환각의 미학’을 동시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이기봉, 〈There is No Place - Shallow Cuts〉, 2008, 유리, 안개 발생기, 인조 잎, 목재, 철, 모래, 모터, 타이머, 가변크기 © 이기봉

2층 전시장의 작품 〈Cloudium〉은 이번 전시의 핵심으로, 전시장 입구의 작품에서부터 제기되어온 존재의 본질에 관한 예술적 질문들이 선문답으로 종결되는 지점이다. 지식인의 책상이 놓여있는 거대한 패널 위에는 인식 불가능한 텍스트들이 빼곡히 누워있다. 거품들이 이것을 가득 뒤덮어나가고 반대로 다시 그것을 비워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작가 이기봉의 포월의 철학과 환각의 미학을 다시금 대면한다. 유념할 것은 그것이 분명코 현실의 사건(들)일진대, 흔적을 남긴 채 비현실의 공간으로 사라지는 운동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의 이번 전시는 안개 낀 존재의 강을 느릿하게 노를 저어가며 유영하는 ‘포월의 유희’라 할 것이다.


이기봉, 〈Cloudium〉, 2012, 혼합 매체, 9000 x 488 x 50 cm © 이기봉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