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평, 〈책가도〉, 2008, 캔버스에 아크릴릭, 163 x 130 cm © 김지평

“김지평의 현대적인 책가도는 전통적인 책가도의 구성을 차용할 뿐 아니라, 책가도에서 문화적 기표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작가의 독창성보다는 다양하게 조합되는 기물들의 세계에 중점을 둠으로써 보다 범속적인 범주, 현대 소비사회에서는 ‘대중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문화의 범주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상업 미술의 감각을 반영하는 색감과 도안적 구성,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기물들의 유형화를 통해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깊이와 붓자국을 배제한 채 그래픽적 방식으로 칠해진 화면들은 관람자의 시선을 하나의 구획 안으로 집중시키기보다 표면 위로 미끄러지게 만든다. 더욱이 책가도 구성의 역원근법은 서양화의 원근법과 뒤섞여 한층 더 복잡한 시각적 일루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다차원적 이미지들이 의미 없는 기표로써 부유하는 대중문화의 아우라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
 
“이와 같은 작업은 어딘지 근대 사회로 진입하면서 기생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 계급적이고 자존적인 여성 문화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아마도 문인화적 전통에 대한 거부와 권위적인 상층 문화의 파기, 여성적인 실내 기물들에 대한 애착, 아크릴 물감의 현란한 색감과 의도적인 장식성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지평의 작업이 이 ‘규방’과 같은 공간을 통해서, 미술의 역사에서 실내 정경이 담보해 온 제도 순응적인 측면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의 모체가 되는 권위적 문화를 파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지평의 작업은 제도적으로 안착된 맥락 안에 있으면서도 기득권 바깥에 있는 하위문화의 지대를 향하며, 바깥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실내에 밀착되어 있다. 규방 안에 있는 동시에 바깥 세계에 속해있는 이 특수한 접점이야말로 김지평의 작업을 이루는 주요한 특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의 제목이 ‘border life’ 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경계’와‘삶’의  조합어인 이 단어는 ‘still life’ 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경계에 있는 일상의 특수한 영역을 표상한다. 이 기묘한 경계의 지대는 작가 자신의 심리적 경계인 동시에 현대 소비 사회 속에서 우리가 서있는 복합적 문화의 경계이다. 그 위에서 안락한 규방의 영역은 바깥 사회를 투영하는 거울이 되고, 과거의 책거리그림은 현대 소비 사회의 풍속도가 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