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리아(b. 1988)는 입체와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가로지르며, 조각이 갖는 개체의 독립성과 현존성에 대해 고민하는 작업을 해왔다. 특히, 그는 금속을 흉내 내는 종이를 세우고 잇는 반복적인 ‘만들기’를 통해 포착하기 어려운 힘의 구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등 고정된 대상을 조각적으로 규정짓기보다 관계와 힘이 잠정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다룬다. 


최리아, 〈진공, 가득찬, 상점- 직조기〉, 2014, 설치 및 영상, 13분 9초 © 최리아

초기의 작업에서 최리아는 과거의 조각이나 퍼포먼스 등을 현재의 감각으로 재조형하고, 지금-여기라는 현시점의 장소에 놓음으로써 조각의 현존성에 대해 탐구하였다.
 
예를 들어, 2014년에 발표한 영상 설치 작업 〈진공, 가득찬, 상점-직조기(Vacuum, Full, store- A Power Loom〉은 60-70년대 퍼포먼스와 장소 특정적 작업을 연상시킨다. 최리아는 이 작업에서 이브 클랭의 전시 《텅 빈(le vide)》(1958)과 클래스 올덴버그의 전시 《상점(store)》(1962) 사이에 하이픈(연결) 개념으로써 “가득찬”을 집어넣어 현시점의 장소 특정적 작업의 가능성을 실험하고자 했다.


최리아, 〈진공, 가득찬, 상점- 직조기〉, 2014, 설치 및 영상, 13분 9초 © 최리아

이 작품이 소개된 전시 《진공, 가득찬, 상점》는 이태원역에서 꽤 떨어져 있는 곳에서 열렸다. 작가는 이 전시의 공간적 배경(전시장까지의 거리)을 이용하여 그곳으로 찾아오는 관객들이 단서를 찾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지나온 광경들이 다시 한번 플래시백 될 수 있도록 연출하였다.
 
영상은 그 거리에 있던 이슬람 사원이나 가게들, 버려진 물건과 골목들이 조각처럼 이어지는 내용이 담겨있다.


《Hardcore Futuregraphy》 전시 전경(17717, 2020) © 최리아

그리고 2020년에 열린 전시 《Hardcore Futuregraphy》에서 최리아는 1999년부터 현재까지 발표된 한국 기반의 입체 작업들을 재해석하고, 다가올 2040년의 미래 조각들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제작한 작업들을 소개했다.


《Hardcore Futuregraphy》 전시 전경(17717, 2020) © 최리아

이러한 작업의 레퍼런스는 2040년까지 수많은 국가들이 계획하고 있는 ‘우주 탐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최리아는 새로 개척 될 행성에 대한 열망과 발견된 행성에서 느낄 정복에 대한 상반되는 관점을 담아 작품을 기획하였다.
 
작업의 일부를 살펴보자면, 〈Blue Screen Love〉는 2018년 한국에서 발표된 작업들에 가장 많이 쓰인 색상 두 가지를 이용하여 만들어졌으며, 〈외부의 내부의 외부〉는 권오상 작가의 작품을 참조하고 재해석하여 제작되었다.


(좌) 최리아, 〈펜스 1〉, 2023, 혼합매체, 50x20x45cm / (우) 최리아, 〈펜스-자라나는〉, 2023, 혼합매체, 205x200x300cm, 《stocker》 전시 전경(SeMA 창고, 2023) © 서울시립미술관

한편, 2021년 이후로 최리아는 원형 울타리에서 말이 서서히 적응하는 순치의 장면에서 출발한 ‘펜스’ 연작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연작은 공간의 경계와 비가시화된 권력 구조가 개인의 움직임을 어떻게 통제하고 조직하는지 사유한다.
 
구리의 색과 질감을 흉내 내는 종이 조각으로 이루어진 이 작업은 단단함을 모방하지만 쉽게 흔들리고 꺾이는 구조 속에서 조각에 대한 통념을 새로운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게 만든다.


《Fence-go-round》 전시 전경(Hall 1, 2025) © Hall 1

2025년 Hall 1에서 열린 최리아의 첫 번째 개인전 《Fence-go-round》는 지난 4년간 제작해 온 종이 펜스 조각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말을 길들이는 울타리인 ‘원형 마장’에서 출발한 이 작업은 관객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설정하는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관객을 둥글게 감싸며 반복적으로 걷게 만드는 힘과 그것이 작동하는 경계에 대해 질문한다.


최리아, 〈매듭〉, 2025, 커스텀 된 종이, 지관, 철관. 사진: 고정균. © 최리아

관객의 경로는 전시장 입구에 위치한 구리색 벽면과 하얀색 가벽, 그리고 바닥에 놓인 원형 좌대에 의해 원형 마장을 무한히 도는 경주마처럼 제한된다. 먼저, 철재의 색감을 흉내 내고 있는 은색의 종이 조각 〈매듭〉(2025) 뒤에 설치된 하얀색 가벽은 전시의 본 공간으로 들어서는 입구의 면적을 줄인다.


《Fence-go-round》 전시 전경(Hall 1, 2025) © Hall 1

약 절반 정도 좁아진 입구를 지나 전시의 본 공간으로 들어서면, 전시장의 두 모서리와 하나의 호로 이루어진 원형 좌대의 곡선에 의해 다시 한번 경로가 막히게 된다. 이 원형 좌대는 일반적인 조각의 좌대와는 달리 18mm 높이의 낮은 널판으로, 전시장 바닥 면적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바닥 설치물로 보이지만, 엄연한 좌대로 관객은 그 위를 오를 수 없다.
 
이렇게 여러 공간적 장치들로 관객의 동선을 제한하는 전시의 구조는 계단 위 2층 전시장에서 관망할 수 있었다.


《Fence-go-round》 전시 전경(Hall 1, 2025) © Hall 1

그 안에 놓인 ‘펜스’ 연작들은 놀이공원의 회전목마(merry-go-round)가 태고의 군사 훈련을 흉내 내듯, 딱딱한 금속 펜스를 흉내 내며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한다. 각 작품들은 ‘펜스’의 형상과 구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지만, 종이라는 재료의 물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 형태와 질감을 드러내며 단단함과 가벼움, 견고함과 위태로움 사이를 유쾌하게 오간다.
 
가령, 바닥에 붙은 종이는 위태롭게 일어나 펜스가 되고, 생명체처럼 자라나거나, 더러운 오줌발을 붙이고 태어난다. 지면으로 녹아 흐르거나, 쪼개진 몸체가 서로 다시 엉겨 붙기도 한다.


《레드 서킷 레디》 전시 전경(송은, 2026) © 송은문화재단

2026년 송은에서 진행하는 신진 작가 지원 프로그램 ‘스프링 피버’에 선정되어 개최한 개인전 《레드 서킷 레디》는 이와 같은 최리아의 ‘펜스’ 작업을 더욱 확장하여 선보인다. 이 전시에서 최리아는 직접 커스텀한 구리색 종이를 주축으로 우리 몸에 스며든 지배와 규율의 감각을 탐구한다.
 
작가는 외부의 위험을 방어하는 동시에 내부의 운동 범위를 제한하는 ‘펜스’의 이중성에 주목했다. 전시장 곳곳에 배치된 펜스, 기둥, 채찍과 로프 등의 기물들은 단단한 금속을 흉내 내고 있으나 가볍고 취약한 종이의 속성을 동시에 드러내며 관객의 감각을 교란한다.


《레드 서킷 레디》 전시 전경(송은, 2026) © 송은문화재단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이는 통로와 압박감을 유발하는 높이의 〈삼중 펜스〉(2026) 등은 보호라는 명목 하에 작동하는 권력의 강제성이 얼마나 임의적이고 허상적인지를 신체적으로 마주하게 한다.
 
관객은 미로와 같은 벽면을 헤치며 종이라는 유연한 재료 위에 응축된 힘의 사이클을 경험하고, 익숙해진 순치(taming)의 감각을 환기하게 된다.


최리아, 〈회전문〉, 2026, 구리색 종이에 커스텀, 철관, 150x143x93cm. 사진: STUDIO JAYBEE. © 송은문화재단

이렇듯 최리아의 작업은 ‘조각’이라는 개체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타임라인 안에서 어떻게 존재해 왔으며 또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탐구하는 조각의 존재론적 사유에서 출발해, 조각과 공간, 그리고 관객의 신체 사이에서 역동하는 관계와 힘의 구조를 탐구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그의 조각에 대한 실험은 단단하고 견고하다고 여겨져 온 전통적인 조각의 통념으로부터 벗어나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나 기존의 인식에서 빗겨 나는 상태를 드러내 보인다.


《레드 서킷 레디》 전시 전경(송은, 2026) © 송은문화재단

이는 곧 조각을 고정된 대상으로 규정짓던 기존의 인식을 해체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와 힘의 역학관계를 관객의 신체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나’와 ‘외부’의 관계로 확장해 사유할 수 있게 만든다.

"조각과 조각난 것들, 말과 말 사이에 있는 것들. 그것들의 명징함에 대하여 추적합니다." (최리아, 작가 노트)


최리아 작가 (이주요, 〈스토리버스〉, 2024, 스페이스미조) © 송은문화재단

최리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예술사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입체전공 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개인전으로는 《레드 서킷 레디》(송은, 서울, 2026), 《Fence-go-round》(Hall 1, 서울, 2025)가 있다.
 
또한 작가는 《PANORAMA》(송은, 서울, 2025), 《stocker》(SeMA 창고, 서울, 2023), 《Hardcore Futuregraphy》(17717, 서울, 2020), 《Hardcore Futuregraphy》(문화역서울 284 RTO, 서울, 2019), 《안봐도 비디오 9회, AFTER EFFECT》(충무로 영상센터 오재미동, 서울, 2019), 《제5회 비디오 릴레이 탄산》(여의도자이 오피스텔, 서울, 2016), 《그 집: Matter Flow 하룻밤의 전시》(합정, 서울, 2015) 등에 참여한 바 있다.
 
최리아는 2026년 송은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신진 작가 지원 프로그램 ‘스프링 피버’에 선정되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