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호, 〈쉬-〉, 2013 © 유승호

뒤척이는 말, 비틀대는 세기말
 
“1997년 글씨 작업을 초기에 하게 될 즈음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의 「비가 오도다」라는 칼리그래프 시를 보면서 영감을 받은 적이 있는 듯하다.”
 
말들이 뭉쳐 먹구름처럼 몰려와 말들을 소나기처럼 떨구고 마른 땅을 적신다. 마른 땅이 아니라 메마른 이미지들이겠지. 아폴리네르의 정신에서 뭔가 와닿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것은 ‘전달받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듯하다’는 것은 분명치는 않으나 무언가를 본 듯한, 무언가가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나의 통찰과 운명과는 아무 상관없이 세상의 운명이 돌아가고 있다.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어떤 세기말의 세계정신과 역사가 유령이나 그림자 같이.
 
19세기말과 20세기 초를 살았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시인 아폴리네르처럼 유승호는 20세기말과 21세기 초를 가로지른다. 강박적이며 초현실적 시어들은 이전 무수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수묵화의 초현실적 이미지와 연결된다. 마치 기존의 이미지에서 일부분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승호는 숫자로서의 세기말, 대중문화로서의 세기말이 10여년이 흐른 지금 비로소 세기말의 운명을 예감하는 것이다. 이 ‘때늦음’은 하나의 벼락, 섬광과 같다. 핵폭탄 수 백 개가 한꺼번에 터지는 그 가운데에서의 어떤 접촉이다.
 
“...머리가 터질것만 같다. 뇌출혈 ... 물이 흐른다. natural” (〈natural〉 中)
 
“무너져 내린다, 핵폭탄의 재가 바람에 날려 우수수수 떨어진다, 세기말의 슬픔을 안고서, 마음의 중심이 무너진다…” (〈우수수수수〉 中)
 
김정란 시인은 「말의 귀환」에서 우리나라에는 어디나 미친 여자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유는 그 여자가 자신의 말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작가에게 느껴지는 광기는 어쩌면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미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표현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광기는 사랑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현재 자신이 거주하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몰입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일상과 상식의 눈과 정신과 언어를 떠나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을 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 달성의 노력이 아니다. 이러한 사랑의 광기 속에 감각과 인식과 말은 재편성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광기는 하나의 전조이다. 무언가가 작가의 정신과 손에서 잉태하려 한다는.
 
“...잘라 내고 다시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 작은 생명으로...죽어죽어…” (〈She〉 中)
 
“이 몸이 백번천번만번 부서져. 오뚜기 처럼 일어나... 뿌러져 버려, 뿌러져 버려 fragile.”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中)
 
“그래도 계속된다...그래도 다시 돈다...반복되어 다시 한 바퀴 돌지만 처음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 이것이 창조일까.” (〈spring〉 中)
 
그리고는 말들이 진행하고 한 바퀴 돌고 다시 진행하고 다시 한 바퀴 돈다. 말의 운행은 하나의 궤적으로 세계 운행과 수레바퀴자국 같은 인생행로를 은유한다.
 
작가의 언어는 정신착란의 혼란과 파괴와 재생에 대한 희망 같은 관념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혹은 막 지난 시기의 전환기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새롭게 재정립되는 시기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지난하고 고통스럽다. 더욱이 민감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닌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그 결과는 자연스럽게도 기성의 가치와 질서와 제도가 안으로부터 붕괴되고 파열되어 해체되는 과정으로 드러난다. 그러한 과정은 이미지와 언어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실존의 근본적 변화가 표현되는 것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것이 그 시대를 사는 예술가들의 당면과제이자 응전의 문제가 된다.
 
“태우고 또 태우고... 머릿속의 잡것들을 날려버려라. 산산조각이 나도록…” (〈태운다〉 中)
 
민감하게 체험하고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성장하지 않는다(물론 애초에 성장이 필요 없이 등장하자마자 완성된 자도 있다고는 하는데 나는 본 적이 없다). 작가는 수용하는 것을 뚫고 나가는 자이다. 불행히도 그러기에 작가는 이미 패배를 안고 가는 것이다. 영화 ‘취화선’의 마지막처럼, 스스로 파괴의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록 허망한 환영일지라도 불사조처럼 다시 태어나리라 염원하면서. 작가는 상대하는 것을 부딪치고 비켜가거나 뚫고 나가는 과정에 더 단단해지기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뚫고 나가는 힘, 창작의 과정을 통해 사람은 더욱 크게 성장하고 더 존중받는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주문을 건다. ‘뿌셔뿌셔’. 예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번 작업을 차분히 관조하고 성찰하는 것은 바로 그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운동이다. 작가 개인은 출발로서 기능할 뿐이다. 어떤 개인사적 과정이 있기에 이러한 표현이 나타나는지 그의 삶을 추적할 이유는 없다. 뒤틀리고 어색하고 불편한 구어들의 조합과 그 파국적 모습은 유희로 보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런 비명인 것이다. 삐뚤빼뚤, 뒤척거리고 비틀거리는 말의 행렬은 작가의 음성이고 주문(呪文)이다. 작가가 추동 시킨 문제거리를 떠안고 공유하며 나의 실존적 조건 또는 문제 거리와 충돌시키고 융합시키는 것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이론은 비스듬한 것, 불투명한 것, 붙잡을 수 없는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그 자체 시행착오적이지만 역사적인 역동 관계의 계획을 교묘하게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노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젊고 생기가 넘치는 그러한 늙지 않는 정교하게 계획된 역사를 거스르고 좌절시키는 젊은 힘, 재생하는 것은 단지 이론만의 특권은 아니다.

이론의 가장 외곽의 경계 또는 이론의 가장 깊숙한 근원에는 분명 어떤 역동하는 모호한 힘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론을 살아있게 하는 이론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실천적인 것, 파괴하고 해체하고, 변화하고 창조하고 운동일 것이다. 작가가 내뱉는 퇴행적인 말들, 우발적이며 어떤 논리의 붕괴를 연상시키는 말들은 지난 시기 단기간에 세련되고 우아하게 구축된 우리 미술에 대한 불편한 뒤척임이다. 칼처럼 작가의 말은 피를 두 방울 떨어뜨리고는 소유가 아니라 소통을 주문呪文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