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설(b. 1988)은 ‘듣는다’라는 감각과 감정, 기억을 세밀하게 탐구하는 작업을 한다. 그는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귀로 듣는 것보다 자신의 시각과 다른 감각으로 소통한다. 드로잉,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듣는다는 행위의 의미와 자기 존재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며, 소리와 언어, 감각의 경계를 탐구한다.


김은설, 〈공기는 귀가 되고, 귀는 눈이 된다〉, 2020, 혼합매체, 가변크기 © 국립현대미술관

초기의 작업에서 김은설은 딱풀 또는 물풀을 손가락에 발라 서로 천천히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하면 나오는 끈끈한 실의 형태에 매료되어, 그것을 ‘풀실놀이’로 명명하고 설치, 영상, 드로잉 등으로 변주해 왔다.
 
작가는 끈끈하면서도 연약한 풀실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붙었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고 보았다. 2019년 룬트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풀실놀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풀실놀이’를 주고 받는 모습을 관찰하며 제작한 드로잉과 영상, 설치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김은설, 《풀실놀이》 작업 과정 © 룬트갤러리

김은설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미묘한 표정, 행동, 거리감을 투명하지만 투명하지 않은 풀실놀이로 보여주었다. 먼저, 블랙 드로잉 작업에서 그는 참가자이자 동시에 관찰자로서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풀실놀이를 관찰하고, 이를 붙고 떼는 행위를 하듯이 연필로 반복적으로 가느다란 선을 끝없이 화면에 채우면서 강박적인 풀실놀이로 확장하였다.
 
아울러, 갤러리 공간에는 거대한 커튼 모습의 풀실놀이가 세워졌다. 불투명한 가림막처럼 공간을 가로지르며 작품과 작품 사이에 자리한 이 설치 작품은 풀을 이용해 작가가 직접 손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풀실놀이》 전시 전경(룬트갤러리, 2019) © 룬트갤러리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풀실을 계속해서 만들수록 끈끈함이 강해져 힘겹게 떼게 되기도 하고, 그 반대로 끈끈이가 약해져 금방 끊어지게 되는 순간에 주목했다.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이 섬세하고 연약한 풀실놀이는 사람들 간의 보이지 않는 관계 맺음의 과정과 닮아 있었다.


《덤불숲》 전시 전경(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0) ©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한편, 2020년 개인전 《덤불숲》에서 김은설은 풀, 나무, 덩굴이 한데 엉켜 있어 쉽게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 덤불숲을 인간에 빗대어 풀어냈다. 작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캄캄하고 비밀스러운 덩굴숲이 마치 쉽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닮아 있다고 보았다.


《덤불숲》 전시 전경(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0) ©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한편, 사람들은 자기만의 덩굴숲으로 들어가길 자처하는 듯 하지만 진정한 고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별 주체로 존재하면서도 결국 서로 엉망으로 뒤엉켜 하나의 군집을 형성해야 진정한 주체로 존재할 수 있는 덤불숲은 현대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김은설은 이처럼 덤불숲에 흩어지기도 하고 얽혀 있기도 한 ‘나’의 모습을 드로잉과 설치 작업 등으로 풀어나갔다. 투명한 듯 투명하지 않은 하얀 실로 뒤덮인 나무들은 자신의 속살을 감추는 한편,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김은설,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언어〉, 2021, 3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1분 15초 © 국립현대미술관

이렇듯 김은설의 작업은 쉽게 보이지 않고, 또 들리지 않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와 본질을 다양한 감각을 매개로 풀어낸다. 한편, 2023년 탈영역우정국에서 열린 《중간 언어》에서는 소리 들림과 소리 들리지 않음의 세계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고 있는 작가 자신의 감각 여정 속으로 관객을 초대하였다.
 
청각 장애를 가진 김은설의 들리지 않는 세계에는 촉각적인 소리와 시각적인 소리가 풍부하다. 작가는 이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면서 서로 연결을 하기 위해 ‘중간언어’를 만들어 구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김은설, 〈소리 없는 소리〉, 202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5분 © 국립현대미술관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중간 언어는 경계에 걸쳐 있으며, 불안정하고 깨진 언어와 같다. 그는 전시를 통해 이 언어가 어떤 식으로 되어있는지, 또 모두에게 통하는 언어인지 실험하고자 하였다.
 
엇갈림, 지연된 시간, 웅얼거림, 잔상, 촉각적인 덩어리,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언어, 흐르는 시각풍경을 두 세계에 완전하게 적용할 수 없지만 전시의 작업들은 재감각, 재해석을 거친 언어를 제시한다.


김은설, 〈진동하는 몸의 대화〉, 2023, 비디오 설치,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진동스피커, 앰프, 나무 의자), 17분 10초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중간 언어》에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관계를 찾아 보고자 하는 작가의 움직임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언어는 단지 소리나 글의 형태가 아닌 걷기, 멈추기, 바라보기 등 신체를 둘러싼 다양한 행위 등을 포함한다.
 
전시장은 문법에 기초한 질서정연한 언어가 아니라 작은 떨림, 접촉과 부딪힘, 스치듯 느껴지는 소음 등이 공존하고 교차하는 언어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소리가 무엇인지 몰랐던 시기에 소리를 배웠던 작가의 감각을 따라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김은설, 〈진동하는 몸의 대화〉, 2023, 비디오 설치,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진동스피커, 앰프, 나무 의자), 17분 10초 © 국립현대미술관

이와 같은 김은설의 언어에 대한 신체적 학습 경험은 영상 작업 〈진동하는 몸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었다. 관객은 이 영상을 보기 위해 의자에 앉는 순간 몸이 가볍게 진동하며 예상하지 못했던 감각의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화면에는 소리가 아닌 몸과 몸이 만나는 시각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다.  
 
작가는 리플렛에서 “소리가 무엇인지 몰랐을 때 부모님의 몸과 맞대면서 목과 몸통의 울림, 입바람을 통해 촉각적으로 소리 언어를 배웠다”고 적었다. 이 경험과 기억에서 출발한 작가의 소리 그리고 언어의 여정은, 주변 소리의 진동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비-언어적인 감각의 장면들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김은설의 언어에 대해 전시 비평문에서 현시원 큐레이터는 “두 사람 사이, 두 존재 사이를 오가는 물질인 듯 하다”고 썼다. 오늘날 네트워크의 기술로 초-가속화된 언어의 이동과 생산 속에서 작가는 “조금 늦게 도착한 언어, 그리고 너무 가깝거나 먼 거리를 공간 작업으로 제시”한다.


(위) 김은설, 〈목소리의 형태〉, 2023, 복합매체, 가변크기 / (아래) 김은설, 〈수동적 소통〉, 2023, 2채널 비디오, 4분 55초 © 이음

또 다른 영상 작업인 〈수동적 소통〉과 스마트폰, 레디메이드 얼굴 모형 등으로 구성된 〈목소리의 형태〉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함께 설치되었다. 두 작업에서는 스마트폰 화면과 채팅,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자화된 대화의 목소리들이 한글 자막과 말줄임표, 느낌표, 물음표, 구두점 등으로 오간다.
 
이를 통해 관객은 대화의 물질성을 다루는 이 두 작업을 마주하며, 대화에 참여하고 개입한다는 것, 그리고 대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사유하게 된다.


김은설, 〈청각장애 인공지능 학습〉, 2022, 단채널 비디오, 5분 30초 © 이음

한편, 영상 작업 〈청각장애 인공지능 학습〉은 인공지능이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 대해 질문한다. 김은설은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통해 언어와 세계를 학습하는 방식이 청각장애인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닮아 있다고 보았다.
 
상대방의 입 모양과 언어 습관을 학습해도 발생하는 소통의 어긋남은 데이터에 기반해 언어를 추론하는 인공지능의 불완전한 이해와 맞닿아 있었다. 작가는 이러한 두 학습 방식을 포개어 바라보며, 언어를 통해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방식, 그리고 소통의 의미를 질문한다.


김은설, 〈흐려지는 소리, 남겨진 소리〉, 2025, 모니터, 미디어 플레이어, 진동 스피커, 앰프, 폴리카보네이트, 가변 크기. 사진: 홍철기. © 김은설

그리고 202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에 참여하며 선보인 작품 〈흐려지는 소리, 남겨진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 소리가 몸에 남기는 감각의 흔적을 다룬다.
 
김은설은 이러한 경험을 반투명한 벽 뒤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영상으로 나타낸다. 이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또한 흐릿하다. 관객은 이렇게 또렷하지 않은 감각 속에서 남겨진 소리와 흔적을 느끼게 된다. 이를 통해 그의 작업은 완벽하지 않은 언어를 더듬어 그 뜻을 생각하게 만든다.


김은설, 〈청각장애 인공지능〉, 2024, 인터랙티브, 4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진동 스피커, 앰프, 나무박스), 가변 크기 © 국립현대미술관

이러한 김은설의 작업은 단순히 소리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완전하지 않은 소통 속에서도 몸으로 남는 진동, 표정, 몸짓 같은 신호들을 통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험한다.
 
소리는 가까이 다가가면 진동으로 피부에 와닿는다. 그의 작업은 이처럼 말로는 전달되지 않는 떨림을 통해, 그리고 청각과는 다른 감각으로써 우리의 몸에 이야기를 건네고 직접 그 이야기를 몸으로 느껴볼 수 있게 한다.

"소통에 들이는 에너지와 어떤 것에 접근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틈 사이에서 오히려 언어가 더 또렷하게 깨어나는 순간들이 있다." (김은설, 국립현대미술관 인터뷰 중) 


김은설 작가 © 이음

김은설은 청주대학교 조형예술학과 회화학과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중간 언어》(탈영역우정국, 서울, 2023), 《덤불숲》(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20), 《풀실놀이》(룬트갤러리,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의문의 AI》(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5-2026),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5), 《부산현대미술관 밖 프로젝트#1-6_열 개의 눈》(석당미술관, 부산, 2024), 《여기 닿는 노래》(아르코미술관, 서울, 2024), 《나란 나란 읽는 시대》(팩토리2, 서울, 2024), 《언젠가 누구에게나》(남서울미술관, 서울, 202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김은설은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고양, 2025),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서울, 2024),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청주, 2019-2020) 등 다수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