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연(b. 1987)은 규격, 제한, 제도, 조건, 한계 등 현실의 ‘틀’을 인식하고, 그것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의 작업은 공간의 물리적 한계와 같은 고정된 틀의 맹점을 찾고, 또 다른 가능성이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여 이에 맞대응 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불만이 작업이 될 때》 전시 전경(을지로 145-1 401호, 2018). 사진: 이의록. ©김태연

김태연에게 있어서 ‘틀’이란 인간이 현실에서 느끼는 불만 혹은 문제점을 은유한다. 그의 작업은 ‘작업실이 건물 4층에 있는데 계단이 좁고 불편하다. 어떻게 하면 혼자서 짐을 옮길 수 있을까?’, ‘주어진 물성과 형체를 전제하고 작업하는 일은 수동적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작업에서 주도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와 같은 ‘틀’에 직면했을 때 발생하는 질문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으로서 전개되어 왔다.
 
정해진 틀에서 경험되는 한계점에 대응하면서 전개되는 그의 작업은 다양한 조건, 규격, 제도의 양상을 밑바탕으로 삼으며, 그 틀의 바깥을 드러낼 수 있는 조각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The Ruler of The Shape》 전시 전경(어쩌다갤러리2, 2019) ©김태연

김태연의 첫 번째 개인전 《The Ruler of The Shape》(어쩌다갤러리2, 2019)에서 그는 길이를 측정하거나 직선의 정확한 선, 형태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자(Ruler)’가 가진 도구로서의 성격과 형태의 관계를 실험하였다.
 
전시를 이루고 있던 작품들은 접었다 펼 수 있는 접이식 자(이하 접자)의 형태로부터 만들어졌다. 그리고 접자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은 또 다른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
 
김태연은 1m의 접자를 여러 방향으로 접고 펼쳐서 형태를 만들고, 이렇게 형성된 60가지가 넘는 형태 중 4개를 선별하여, 이를 5.5배 크기로 확대한 큰 입체물을 제작했다.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입체물은 접자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적인 존재로 보인다.


《The Ruler of The Shape》 전시 전경(어쩌다갤러리2, 2019) ©김태연

한편, 1층 윈도우 갤러리 공간에는 일정한 길이의 막대가 맞물려서 형태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는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 접자를 크게 확대한 형태였다. 여기서 작품의 크기는 바로 앞서 살펴본 큰 입체물을 둘러쌀 수 있는 만큼의 크기에 맞춰 정해졌다.
 
따라서 수동적인 존재로 출발하였던 큰 입체물은 이 1층의 작품을 통해 주도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이러한 작품들은 전시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접자에서 기인한 형태(The Shape)이면서 형태를 만들어내는 지배자(The Ruler)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가진다.

《The Ruler of The Shape》 전시 전경(어쩌다갤러리2, 2019) ©김태연

이러한 그의 작업은 조형적인 특성보다 기능성이 우선시되는 사물인 ‘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김태연은 이를 통해 도구와 형태의 관계를 바꾸어 보고자 했다고 말한다.
 
“도구가 우선인가, 형태가 우선인가”에 대한 질문에 어떠한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의 작품은 관점에 따라 무엇이 우선인지 달라질 수 있음을 드러내며 주도성과 수동성이 이분화된 형태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비 틀》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0). 사진: Studio18(이강준) ©김태연

한편, 2020년 아트스페이스 보안 2에서 열린 개인전 《비 틀》에서 김태연은 나무로 만들어진 입방체 구조물과 그 안의 사물들의 관계를 통해 도구와 형태 사이의 위계 질서를 흐린다.
 
이 전시에서 김태연은 동일한 규격의 입방체에 비정형의 사물을 규정된 스코어 없이 삽입했다. 여기서 형체들은 특정한 내러티브를 전제하지 않은 채 그저 큐브 안에서 저마다의 정확한 장소를 찾아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큐브는 그 안의 내용물인 형체들을 지배하거나 억제하지 않는다. 대신 틀과 사물은 서로 겹쳐지고, 의지하는 모습으로 뒤엉켜 있었다.


《비 틀》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0). 사진: Studio18(이강준) ©김태연

틀 안의 몇몇 사물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입방체의 바닥면이 어디인지 분명히 알려주지만 또 어떤 사물은 중력과 상관없이 입방체 안에 안착해 있었다. 이 안착의 완결성은 틀과 사물 사이의 유동성에 비례한다. 이를테면 입방체 안에서 비틀거리는 상태일 때를 유지한 채로 틀을 덧대야 훨씬 고정이 용이하다.
 
즉, 완결된 상태라고 여겨지는 고정된 모습은, 정지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흔들림과 운동성을 내포한 형태인 셈이다.


《수렴과 발산: Form and Variation》 전시 전경(갤러리2, 2021) ©김태연

한편, 김태연은 2021년 갤러리2에서 열린 개인전 《수렴과 발산: Form and Variation》에서 그동안 탈주를 감행했던 틀의 존재를 인정하며, ‘발산’하는 다양성만이 아니라 ‘수렴’되는 틀 또한 공존한다는 것을 작업에 풀어냈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고정된 틀에 그저 순응하지 않고 형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틀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수렴되는 지점을 감각하고, 상상하고, 비틀고, 다양한 견본을 만들어 냄으로써, 수렴과 발산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작가로 하여금 더욱 작품의 조형과 미감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수렴과 발산: Form and Variation》 전시 전경(갤러리2, 2021) ©김태연

‘Foam’ 연작의 출발점은 표면장력으로 인해 동그란 원형 틀에서 빠져나온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비눗방울이었다. 여기서 확장된 것이 육면체 스티로폼과 그 안에서 빠져나온 도형들이다. 먼저 작가는 마주보는 면에 같은 형태의 도형을 그렸다. 양 끝에서 두 사람이 협력하여 열선을 스티로폼 안으로 넣고, 도형을 따라 재단하였다.
 
그러나 기계가 아닌 수작업으로 재단을 하다 보니 두 사람 사이의 시간차로 인해 열선이 지나가는 면에 지층 같은 흔적이 남았으며, 양 끝의 도형 사이에는 형태의 변형이 만들어졌다. 도형의 모양을 따름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형태의 변형은 동일한 조건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은유한다.
 
작가는 매번 다르게 만들어지는 경우의 수에서 해방감과 희망을 발견했다. 전시에서는 도형과 육면체 스티로폼을 함께 설치했다. 마치 도형의 음각과 같은 육면체는 내부에 열선의 흔적과 틀로서의 고유한 형태를 모두 담고 있다. 이렇게 두 덩어리는 발산하는 경우의 수와 수렴되는 지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김태연, 〈2 by 2 Grid〉, 2021, 철판, 아크릴페인트, 100x100x100cm ©김태연

〈2 by 2 Grid〉와 〈5 by 5 Grid〉는 모눈종이의 평면 공간을 입체로 만든 작업이다. 모눈종이는 작가가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하나의 틀이기도 하다.
 
ㄱ자, ㄴ자 형태의 철판을 조립한 이 작업은 어떤 지점에서는 완벽한 그리드의 형태를 갖지만 관람자의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구조로 보이거나 평면의 그리드 구조에서는 인식할 수 없던 뻥 뚫린 공간을 보여준다. 이는 입체화된 그리드 공간을 통해 모눈종이의 맹점을 표현한 것이다.


《수렴과 발산: Form and Variation》 전시 전경(갤러리2, 2021) ©김태연

‘수직 파도’ 연작은 파형 스프링을 주형으로 해서 석고로 형태를 떠낸 작업이다. 스프링은 바닥에 세울 때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매번 희한한 형태를 만들며 직립한다. 이 작업은 규격화된 기성품에서도 비결정적인 형태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 유연함을 드러낸다.


《바탕에는 이름이 없다》 전시 전경(갤러리2, 2024) ©김태연

그리고 2024년 개인전 《바탕에는 이름이 없다》에서 김태연은 “어떠한 지시나 명시 없이 바탕을 불러오는” 방법을 시도했다. 관계 맺기가 일방적 방향성으로 형성된 둘의 사이에서 구체적인 부름과 불림의 일은 그어진 경계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김태연의 전시에는 조각의 삶과 일반의 삶을 포괄해 배경처럼 여겨지는 보조적인 사물들이 놓여 있었다.
 
예를 들면, 조각을 받치는 좌대, 조소용 흙을 견디는 심봉대, 카메라를 지지하는 삼각 다리, 파티션을 세우는 스탠드 등이다. 김태연은 이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거나 주된 위치로 격상되기를 바라는 대신, 그저 각각의 역할을 상기할 수 있도록 그것이 본래 놓였던 모습을 옮겨 왔다.
 
이를 통해 작가는 구별을 흐리고 경계를 무화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중립적 태도를 끌어냄으로써 이름 없는 것이 호명될 방식을 찾고자 하였다.


《바탕에는 이름이 없다》 전시 전경(갤러리2, 2024) ©김태연

이 전시에서 김태연은 부수적인 장치로서 주목 받지 못했던 사물들을 주목 시키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주목 없음의 상황이 ‘부’로서 자신들의 쓰임을 잘해 낸 유효한 결과로 작동함을 가시화하고자 했다.
 
작가에 따르면, “무음에 가까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 “그것 자체가 두드러지는 특징을 갖지 않는 것”이 이 사물들의 성격이며, 또 그러한 모습을 인지하는 일이 우리가 이들의 가치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다.


김태연, 〈스탠드〉, 2024, 스테인리스강 관, 166x300x3cm ©김태연

이러한 사물은 조각의 모양이 되어 공간을 점유하였다. 가령, 〈스탠드〉와 〈삼각 다리〉는 각각 물구나무서기, 체조 등의 운동에 쓰이는 바(bar) 형태 스탠드와 카메라를 얹을 때 흔들리지 않도록 3개의 봉을 조합해 안정적으로 고정하는 다리다. 두 조각 모두 본래의 형태를 모방하되, 크기, 재질, 표면 등 전체적인 형상이 변형되었다.
 
실제보다 확대된 크기는 원형이 가진 디테일을 강조하고, 나무와 알루미늄은 은색 스테인리스로 변환되며 사물이 점하는 위치를 일상이라는 현실을 넘어 조각이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바꾼다. 표면은 조각의 바깥을 반사하도록 처리되어 사물 근처에 이를 보는 이의 시선에 담지된 ‘보기’가 있음을 나타낸다.


《바탕에는 이름이 없다》 전시 전경(갤러리2, 2024) ©김태연

〈파티션 스탠드〉, 〈파이프 스탠드〉, 〈안전지지대〉는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사물이 기존에 쓰인 방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동일한 모양을 여러 번 반복하여 붙이거나 나열하여, 연결되고 결합된 양태로서 형상을 제시한다.
 
한편, 〈심봉탑〉과 〈종〉의 경우에는 다른 조각보다도 작가의 자의적인 구성이 덧대어져 있다. 앞서 살펴본 조각들이 대체로 기존 사물의 모양을 따르는 반면, 두 조각은 실제의 쓰임과 형태에 더해 ‘탑’, ‘종’처럼 본래의 원형을 딛고 새로이 재건된 사물이자 조각으로 나아간다.
 
나아가 〈기브〉는 모서리 보호대로 사용되는 삼면의 스티로폼을 주물에 본뜬 것으로, 부수적인 역할이 제공하는 노동의 일 자체를 환기한다. 이는 ‘주기(give)’와 그 반대에 있는 ‘받기(take)’의 역할을 상기시키며, 사물과 조각의 문제를 사용자나 감상자에게 주어진 관계 맺기라는 숙제, 그 속에서 설정되는 태도에 관한 질문으로 확장한다.


《바탕에는 이름이 없다》 전시 전경(갤러리2, 2024) ©김태연

이렇듯 김태연은 일상에서 마주한 틀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방향으로 발산할 수 있는 ‘구멍’을 찾는다. 이때 작업은 어떠한 답을 내리기 보다는, 여러 관점으로 주어진 상황과 사물을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당연하게 여겨져 오거나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관계들이 실은 서로 의존하며 가변하는 상호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음을 상기시키고, 고정된 틀 바깥에서 세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세상의 존재하는 여러 상황 혹은 문제점이 모두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는 것과 같은 이분법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김태연, 어쩌다갤러리2 인터뷰 중)


김태연 작가 ©갤러리2

김태연은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조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메릴랜드 예술대학에서 석사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바탕에는 이름이 없다》(갤러리2, 서울, 2024), 《구멍》(얼터사이드, 서울, 2023), 《수렴과 발산: Form and Variation》(갤러리2, 서울, 2021), 《비 틀》(아트스페이스 보안2, 서울,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애착과 영토싸움》(신촌문화발전소, 서울, 2024), 《ZIP》(아르코미술관, 서울, 2024),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씨알콜렉티브, 서울, 2023), 《Selfish Art-Viewer: 오늘의 감상》(금천예술공장, 서울, 2021), 《이제 침대를 망가뜨려 볼까》(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2019), 《욕망의 메트로폴리스》(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16)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김태연은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서울, 2024), K’ARTS 창작스튜디오(서울, 2022), 금천예술공장(서울, 2021), ZK/U(베를린, 2018), 타이베이 아티스트 빌리지(타이베이, 2017) 등의 입주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서울특별시청과 부산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