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무엇을 ‘향한’ 것이거나 무엇에 ‘대한’ 것이 아니다. 고통은
홀로 존재한다.3) 고통은 자신을 대신할 수 있거나 설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이 없기에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삼키며 신음하는 입을 통해, 부르르
떨리는 손가락의 건들거림에서, 툭 튀어나온 뼈마디와 검게 그을린 멍자국에서 고통을 본다, 느낀다. 함께 한다. 어쩌면
고통이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오해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우리의
언어를 변화시킨다 거나'4) 혹은 확장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 속 표피는 단순히 ‘감각’으로서가 아니라, 자아의 흔적과 새로운 자아 사이를 오가며 쾌락과 불안, 잔여된 숨은
자아를 표면 위로 밀어 올린다. 이러한 표피의 성질은 캔버스를 ‘인간의
몸’처럼 대하는 박다솜의 회화 속에서 다시 발견된다. 전통적인
회화처럼 단단하게 고정된 틀 위에서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예민한 표면 위로 자신을 밀어붙일
때, 캔버스는 작가의 표피와 같이 외형과 내면 사이를 잇는 경계가 된다.
박다솜은 ‘5층집’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무더위 속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옥상을 향해 열린 창문 앞으로 잔잔한 찻잔과 와인잔, 그리고 흰 냅킨들이 놓여있다. 한쪽 구석에는 친구가 선물한 작은
모빌이 가늘게 매달려 있다. 언뜻 일상적이라 할 수 있는 작가의 ‘5층집’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이유는 그의 회화가 머금고 있는 고통의 본질이 내가 무심결에 떠올렸던 사회적 연대로서 고통이
아니었다는 어떤 변화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은 공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닌, 보이지 않지만 공간 속에서 작동하는 강도, 속도, 물질의 떨림과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매해 뜨거워지는
무더위 속에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이 가능할지조차 의심스러운 오늘, 지구라는 여기를 살면서 생명이란, 지복(더 없는 행복, 至福) 이라기보다는 공포로서 경험되고, 잠재적인 것의 충만함이라기보다는
철저히 의미 없는 공백으로도 경험5) 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고통을 연대한다는 것은 행복을 종용하는 것 보다 오히려 덜 해롭고 덜 폭력적이다. 고통은 이제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생성과 접촉의 가능성을 품은 채, 조용히 숨 쉬며 우리를 변화시킨다.
1) 『낮의 집, 밤의
집』,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이옥진 옮김, 2020, 민음사, p. 278
2) 생동하는 물질에서 제인 베넷은 질 들뢰즈의 짧은 에세이 「내재성: 하나의 생명」을 소개하며, 하나의 생명은 “발생한 것의 주체성과 객체성으로부터 (…) 자유로운 순수 사건”이기 때문에, 찰나적으로만 가시적이라고 한다. 그에게 생명은 전기적이고 형태적인 시간의 다양한 순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묘한 비시간에 거주한다. 『생동하는 물질』, 제인 베넷 지음, 문성재 옮김, 2020, 현실문화,
p. 147
3) 『고통받는 몸』, 일레인
스캐리 지음, 메이 옮김, 2018, 오월의 봄, p. 262
4) 『언다잉』, 앤 보이어
지음, 양미래 옮김, 2021, 플레이타임, 리시올 출판사, p. 235
5) 『생동하는 물질』, 제인
베넷 지음, 문성재 옮김, 2020, 현실문화, p.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