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정(b. 1987)은 살아가는 현실을 반영한 환상과 초현실적인 관점을 담은 ‘내면의 풍경(Mindscape)’을 회화적으로 제시하는 시도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작업은 손이 가는 대로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그려내는 직관적인 드로잉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그렇게 만들어진 화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차근차근 그 전체를 관찰하게 함으로써 다양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임현정, 〈마음의 섬들〉, 2016, 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97x776x2.9cm ©부산현대미술관

임현정의 작업세계는 런던 유학을 기점으로 히에로니무스 보쉬, 피터 브뢰헬, 뒤러 등 북유럽 미술사 거장들이 묘사한 상상과 꿈, 신화를 주제로 한 드로잉, 회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작가는 심리학자 칼 융의 ‘집단무의식’과 ‘원형’ 이론을 참고하여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를 풀어낸다.
 
임현정은 이러한 상상과 판타지, 초현실을 표현한 이전 미술사의 레퍼런스들을 작가 내면의 풍경 속으로 가져옴으로써, 가시화되지 않지만 인식되는 감정이나 기억, 상상 속의 공간을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풍경으로 재해석해 왔다.


임현정, 〈Rocky Landscape〉, 2016, 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116x91cm ©임현정

그의 작업 안에서 기억이나 경험은 선형적이거나 논리적으로 배열해 저장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완결된 이야기나 단일한 해석의 틀에 가두는 대신, 작가는 기억과 감각, 감정과 꿈을 기반으로 유동적이고 비선형적으로 구성된 열린 구조로서 화면을 전개한다.
 
한 화면 위에 병치되는 생명체, 이질적 존재, 일상에서 포착한 이미지들은 언뜻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그의 화면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유기적인 연결성과 새로운 질서를 형성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 앞에서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는 대신 각자 내면의 흐름에 따라 화면 전체를 천천히 유영하도록 함으로써, 각자의 경험으로 새로운 연결고리와 의미를 발견해 나가도록 유도한다.


《Islands of the Mind》 전시 전경(OCI미술관, 2016) ©OCI미술관

2016년 OCI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Islands of the Mind》에서 임현정은 칼 융의 집단무의식과 원형 개념을 가져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원형 이미지로 이루어진 동화적이고 원초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전시의 제목인 ‘Islands of the Mind’는 “자아는 원형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있다”는 칼 융의 말에 착안한 것으로, 이러한 전시에서 작가는 마음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있는 자아(들)을 그린 작품들을 선보였다.


임현정, 〈River Landscape〉, 2016, 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130x164cm ©임현정

화면 속에 표현된 임현정의 마음의 섬은 얼핏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을 낯설게 하는 것은 이미지 자체이기보다는 이미지를 배열하고 배치하는 것에서 오는 생경함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임현정의 그림은 각 사물들의 개별적인 의미화를 어렵게 만들며, 사물과 사물이 놓이는 관계로부터 그 의미를 유추하게 만든다.


임현정, 〈Landscape with Eggs〉, 2016, 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130x89.5cm ©임현정

비선형적인 배열 속에 놓인 사물들로 이루어진 화면은 북유럽 르네상스의 환상파 작가들의 화면을 연상시킨다. 임현정은 거장들의 환상적인 그림을 차용하며 가져온 이미지들을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의 지층으로부터 다시 불러낸 이미지와의 접합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 차용된 이미지와 개인사를, 의식과 무의식의 날실과 씨실 삼아 하나로 직조해낸 것이다.


임현정, 〈Night Walk〉, 2016, 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130x164cm ©임현정

이를테면 영국 저택의 도자기로 만든 굴뚝이나 일본의 잡화상점에서 본 생활 오브제들, 그리고 독일 함부르크의 날씨와 기후에서 받은 인상과 같은 여행지에서의 기억들, 고향 앞바다에서 본 풍경과 같은 현실의 일상적인 풍경의 편린들이 차용된 이미지와 무분별하게 놓이고 엮이고 재구조화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작가의 개인사나 사사로운 층위에서 가져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기대고 있는 방법론, 이를테면 자동기술법, 자유연상기법, 의식의 흐름기법에 의해 하나로 놓이고 엮이고 재구조화됨으로써, 이에 대한 모든 해석을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임현정, 〈Strangers in a Strange World〉(세부 이미지), 2018, 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45.7x183cm ©서울대학교미술관

한편, 임현정은 런던과 한국에서의 작업 이후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작업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작업에서는 이전에 비해, 상상의 풍경화 속에 현실의 풍경 요소가 좀더 확장되어 개입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2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개인전 《Strangers in a Strange World》에서 작가는 캘리포니아의 자연과 다양성, 그리고 복합적인 이방인의 감정을 실험적으로 가시화하였다. 


임현정, 〈Strangers in a Strange World〉(세부 이미지), 2018, 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45.7x183cm ©서울대학교미술관

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품 〈Strangers in a Strange World〉(2018)는 말 그대로 이상한 세계에 사는 낯선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작가가 미국에서 거주하던 시절, 주변의 일상적 풍경에 상상의 이미지들을 더해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다.
 
이 낯선 세계 속 인물들은 각자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당시 타지에서 지냈던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 인물들은 복합적인 이방인의 감정을 의인화한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서로를 경계하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Inspiration Point》 전시 전경(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2023)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한편, 2023년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Inspiration Point》는 그간 작가가 선보여온 아크릴 페인팅이 아닌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형태의 드로잉 작업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임현정은 한 지점에서 출발하여 머리 속에 떠오르는 무한한 형태들을 차근히 조합해 나가는 작업 방식을 보다 즉각적으로 담아내고자 드로잉이라는 형식을 채택해, 그간 그의 회화의 근간이 되어온 ‘영감의 지점(Inspiration Point)’을 추적해 보고자 했다.


《Inspiration Point》 전시 전경(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2023)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임현정은 런던 유학 시절 내셔널 갤러리에서 다 빈치의 대규모 전시를 본 뒤 르네상스 시기의 잉크 드로잉과 사실적이고 복잡다단한 화면 구조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그의 드로잉 작품들 안에는 작가가 미국으로 이주한 뒤 목도한 미국 서부의 초현실적인 자연과 개인적 생활상, 그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상들이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여기저기 녹아 들어가 있다.


임현정, 〈Bryce Point〉, 2023, 종이에 아크릴, 잉크, 60x100cm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그의 작업은 캔버스나 종이 위 표면의 색채 바탕작업을 마친 후 그 위에 어떤 형상을 드로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때 작업 과정은 계획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닌 어떠한 ‘영감의 지점’에서 발화한 나무 한 그루 혹은 바위와 같은 오브제를 통해 점차 구체화되어가는 방식을 따른다.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드로잉을 통해 작가가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찾아온 도상들의 조합이 이루어진다. 출품작을 살펴보자면, 먼저 전시 제목과 동일한 작품 〈영감의 지점〉은 총 두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브라이스캐년 국립공원에 위치한 전망대인 ‘영감의 지점’에 갔던 경험을 통해 제작된 것이다.


임현정, 〈영감의 지점〉, 2023, 종이에 아크릴, 파스텔 연필, 103x191.3cm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미국 유타와 네바다주를 둘러보는 로드 트립을 하면서 접한 초현실적인 붉은 바위와 협곡이 펼쳐진 이 곳에서 작가는 “영화 「스타워즈」의 배경처럼 외계 행성 같았고, 예전에 상상으로만 그렸던 드로잉을 떠올리는 비현실적 풍경을 실제 현실에서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작업 노트에서 밝혔다.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상상의 경계 속 세상에서 작가는 다시 한번 보스와 브뢰헬의 작업을 떠올렸다. 또 한 점의 〈영감의 지점〉은 이러한 작업의 흐름에서 제작된 것으로, 약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의 커다란 컬러 드로잉이다. 자신이 여행한 하와이 등 다양한 지역의 풍경과 작가만의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오브제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의 아카이브: 태평양을 건너며》 전시 전경(아뜰리에 아키, 2025) ©아뜰리에 아키

그리고 2025년 아뜰리에 아키에서 열린 개인전 《마음의 아카이브: 태평양을 건너며》는 계속해서 흐르고 확장하는 임현정의 ‘마음의 풍경’을 보여주며, 삶과 예술, 현실과 상상, 자신과 타인이 만나는 지점에서 진정한 회화적 소통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전시 제목 《마음의 아카이브》는 2018년부터 미국 서부에 거주하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가가 겪었던 다양한 사건, 심리적 파장, 그리고 문명과 문화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단편들을 아카이브, 즉 내면적 기록 또는 저장 창고처럼 화면에 집적(集積)해 온 작가의 작업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전시는 작가가 한국과 미국 서부, 유럽을 오가며 축적한 삶의 경험과 내면의 변화를 작가 고유의 직관적인 드로잉과 회화적 언어로 응축해 펼쳐 보이는 여정을 담은 회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마음의 아카이브: 태평양을 건너며》 전시 전경(아뜰리에 아키, 2025) ©아뜰리에 아키

이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들에서 임현정은 과거 북구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뿐 아니라 동양 산수화에 내포된 이상향의 꿈과 환상을 재해석한다. 그는 동양 산수화의 몽환적 이상향과 미국의 광활한 대자연을 교차시켰다.
 
작품 속 자연의 스케일, 빛과 날씨, 해안선의 풍경은 실제 여행을 통해 경험한 감각인 동시에,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같은 동아시아 회화에 내포된 이상향의 꿈과 환상에 대한 회화적 해석이기도 하다.


임현정, 〈Bryce Point〉, 2024, 캔버스에 아크릴, 유화, 101.6x228.6cm (3 pieces) ©아뜰리에 아키

이렇듯 임현정은 손끝의 즉흥성과 무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직관적 드로잉(Intuitive drawing)’을 통해 가시화되지 않지만 인식되는 감정이나 기억, 상상 속의 공간을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풍경으로 재해석해 왔다.
 
화면의 열린 구조 안에 구축된 작가의 사적인 내면의 이미지들은 관객 개개인의 해석과 감정을 이끌어 내어 유연한 관계망을 형성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인간이 가진 각자의 문화적 배경과 내면의 풍경은 모두 다르고 낯설지만,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의미 있게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나는 손이 가는 대로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그려내는 직관적인 드로잉(Intuitive drawing)을 기반으로, 상상 속 내면의 풍경을 시각화해 왔다. 이는 내가 살아가는 현실의 경험과 감정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를 회화적으로 제시하려는 시도이다."  (임현정, 작가 노트) 


임현정 작가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임현정은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Central Saint Martins)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했다. 개인전으로는 《마음의 아카이브: 태평양을 건너며》(아뜰리에 아키, 서울, 2025), 《Trip West》(Gallery 4Culture, 시애틀, 미국, 2025), 《Inspiration Point》(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서울, 2023), 《Strangers in a Strange World》(Pacific Campus of Pacific Medical Center, 샌프란시스코, 미국,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이것은 부산이 아니다》(부산현대미술관, 부산, 2024), 《내면의 풍경》(주워싱턴한국문화원, 워싱턴DC, 2023), 《만화경》(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서울, 2022), 《편집된 풍경》(가나 부산, 부산, 2022), 《The Show Windows》(Coventry City of Culture Project, 코번트리, 영국, 2021), 《난지10기 리뷰전: 보고. 10. 다》(SeMA 창고, 서울, 2017)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임현정은 ‘OCI Young Creatives 2016’에 선정된 바 있으며, 그의 작품은 부산현대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OCI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