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보여져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 드러난다. 양현모의 은
우주를 닮았다. 왜 양현모의 회화가 점점 우주를 닮아가는 것일까? 그건
그의 붓이 그 자신, 곧 세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추상’을 그리는 작가와 달리 내면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양현모는 ‘일렁이는 오늘’ 연작에서
창밖 풍경에 영감을 받았다 밝힌다. 그런데 사실 창밖 풍경이 크게 달라질 일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순간에서 영원을 본다. 그가 본 것은 창밖 풍경이자 “과거이자 미래”이고, 공작거미이면서 “찬란하지만 슬프고”, 바람이자 “싫은
것이지만 반짝이는” 것이며, 도시 위에 떠오른 별이지만 “나와 밀접하거나 닮아 보이는” 것이다. 양현모는 “잴 수 없는 것을 재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본다. 그것은 안에서-보기이자, 신비한
사건이다.
양현모는 자신의 양식(style)이 계속해 변화하는 것을 불안해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분명 그것은 장점이기도, 단점이기도 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와 빨리 발을 맞출 수 있는 영민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자신의 소멸을 걱정하는 작가들의 공통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양현모를 깊게 알지 못했던 나의 오판이었다. 그가 말할 수 없는 것, 나=세계를 그리려 한다는 것은 사실, 〈Burning Symmetry〉 작업에서부터 눈치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거기서 붓으로 캔버스를 두드릴 때, ‘Shield’ 연작이
방패가 아니라 일종의 문과 같이 느껴졌을 때, 그가 작업 노트에서 지속적으로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본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나에게 다시 원고를 부탁했을 때 흔쾌히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원래부터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양현모가 “잴 수 없는 것을 재려고” 하는
것,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그의 불안의 제1 원인이다.
그것은 잰다고 잴 수 없는 것이며,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그는 〈Flexible Forms 07.02〉의 구성원리가
그러하듯, 자신의 불안을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선은 보통 무작정 일렁거릴 것만 같은 화면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화면을 3분할로 만드는 수평선과 거기에 교차하는 수직선은 시선을 정지시키고, 색이나
비정형적 형태의 과한 울렁임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양현모의 작품에서 대부분 직선은 주어진 삶을
뚜벅뚜벅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를 은유한다.
그는 불안을 떨칠 수 있을까? 그것이 완전한 의미의 해탈이나 구원을 의미한다면, 내 생각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양현모가 바라보는 길이 앞으로도 세계 그 자체를 향하고 있다면 그가 걸을 길은 언표 불가능한
것이기에, 불안의 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솔직한 사람들만이
걸을 수 있는 고유한 길이기도 하다. 생이 덧없다는 말은 넌센스이다.
종국에 양현모의 작품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는 보는 사람의 맥락에 달렸다. 그의 작품이
제공하는 미적 경험의 특별함은 그것이 우리에게 나=세계를 알려줄 수 있는 일종의 조형적 장치라는 것이다. 예술은 말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그러한 세계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양현모의 작품에서 보아야 할 〈짧은 진실〉이다. 강단에 설
수 있는 단 두 종류의 철학, 현상학과 분석철학은 예술과 세계에 관해서 논할 때만 다시 만난다. “나는 나의 세계이다. (소우주.)”13)
1)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이영현 역, 책세상, 2006, p.128.
2) Clement Greenberg, 「Seminar III: Can Taste Be Objective?」 in
Artnews, 1973, p.23.
3)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p.127.
4) Joseph Kosuth, 「Art After Philosophy and After」 in 『Art After Philosophy And After Collected Writings』, Gabriele Guercio ed, MIT Press, 1991, p.20.
5) 비트겐슈타인의 동어 반복에 대해서는 『논리-철학 논고』의 6.1, 6.22, 6.234을 볼 것.
6) 경험이 필요하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다음을 볼 것. Willard Quine, 「Two Dogmas of Empiricism」 , Philosophical Review 60(1), 1951, pp.20-43.
7) Martin Heidegger,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 Julian
Young & Kenneth Haynes tr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8) Joseph Kosuth, 「Art After Philosophy and After」 in 『Art After Philosophy And After Collected Writings』, Gabriele Guercio ed, MIT Press, 1991, p.21
9)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p.125.
10) 김희영, 윤재영, 「데미안 허스트와 허스티즘, 믿음 체계의 정체」, 서양미술사학회 59, 2023, pp.93-116.
11)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p.124.
12)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p.129.
13)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p.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