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영(b. 1989)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장면들을 그린다. 상상력이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회화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거기서 비롯된 무의식의 세계가 담겨 있다.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공물, 현실과 꿈과 같은 이질적인 요소들은 그의 화면 속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다층적 구조 안으로 편집되고, 작가 고유의 빛과 색으로 표현되며 생경한 조화를 이룬다.


최민영, 〈Sleeping Sharks〉, 2018, 린넨에 유채, 120x160cm ©최민영

최민영의 회화는 유년 시절과 이주의 경험에서 비롯된 기억의 편린들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무의식에 존재하는 아련한 시간들을 떠올리고, 성장하지 않은 관계 속 고립된 자신과 주변인을 신비로운 생명체와 공생하는 일상의 모습으로 묘사해 평화로움 속의 일탈을 경험하는 허구적 내러티브를 발전시켰다.


최민영, 〈침실〉, 2023, 린넨에 유채, 160x210cm ©최민영

개인적 경험과 관조적 감정에서 발췌된 무수한 이미지들은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과 같이 도발적인 상상과 결합되어 현실의 제약을 허문다. 아울러, 작가는 동서양 신화, 우화, 구전이야기 등을 임의로 차용함으로써 익숙함과 반전이 역설적으로 중첩되는 자신만의 판타지를 만들어 낸다.
 
최민영의 작업 속에서 기억과 상상은 불안과 혼돈의 감각으로 정리되어 아득한 내면의 풍경을 향하고, 그 안에서 공간과 장소, 인간과 동물, 도시와 자연이 결합된 새로운 세계가 완성된다.

최민영, 〈계단에서 내려오는 약간 겁먹은 생물〉, 2022, 종이에 수채, 36x26cm ©디스위켄드룸

2022년 디스위켄드룸에서 열린 2인전 《커튼콜》에서 최민영은 밤과 꿈을 울타리로 삼아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실제와 가상의 중간지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미지는 주로 작가가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장면이나 낯선 환경에서 얻은 영감에서 출발한다.
 
가령, 작가 스스로 이름 붙인 ‘약간 겁먹은 생물(Slightly Frightened Creatures)’은 언젠가 그의 꿈에 등장했던 미지의 생명체로, 이후 적극적으로 작가가 연출한 상황의 주인공이 된다.

최민영, 〈파란 고양이〉, 2022, 종이에 수채, 26x36cm ©디스위켄드룸

별의 모양을 한 이 생물들은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사람들이 머물렀던 장소를 돌아다니며 희미해진 작가의 꿈을 다시 그린다. 또한 가면을 쓴 인물들과 달빛 아래 등장하는 야생 동물은 작가가 낯선 지역에서 머무르며 마주했던 자연의 질감들을 몽환적인 풍경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존립 불가능한 여러 미지의 개체들은 최민영의 그림 속에서 자유롭게 태어나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초현실적인 광경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간다.


최민영, 〈잠자는 물고기〉, 2022, 종이에 수채, 26x36cm ©디스위켄드룸

최민영의 그림 속에 줄곧 등장하는 동물들인 물고기, 고양이, 달팽이, 거북이 등은 단순한 도상이 아니라, 인간과 감정을 공유하는 동반자이자, 기억과 상상 사이를 유영하는 존재들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이 생명체들은 어은동(魚隱洞, ‘물고기가 숨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지명)에서 성장한 작가의 유년기와 맞닿아 있는 기억의 조각이자 무의식의 표상으로 살아 움직인다.


최민영, 〈풍경(어항)〉, 2023, 린넨에 유채, 170x220cm ©최민영

또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이러한 생경함은 어둠과 빛의 상호작용, 보색의 대비, 또는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진 평면적 공간 구성을 통해 내면과 외면의 균형, 관계의 이해와 포용을 암시하고 있다.
 
이장욱 큐레이터는 이러한 최민영의 그림 세계에 대하여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세계’인 꿈과 닮아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세계는 즉흥적으로 분출되는 초현실적인 기법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닌, 오랜 시간 축적된 감정과 기억이 응축되어 형성된 풍경이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비현실적인 장면은 단순히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닌, 오히려 또 다른 현실처럼 다가오며, 이야기는 일반적인 시간의 순서로 전개되기보다는 작가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 이어진다.


《꿈을 빌려드립니다》 전시 전경(스페이스 K, 2024) ©스페이스 K

2024년 스페이스 K에서 열린 개인전 《꿈을 빌려드립니다》는 작가가 성장한 대전의 ‘어은동’에서 지금의 작업실이 위치한 런던의 ‘피쉬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그의 감정과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에 얽힌 다양한 상상의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머릿속 깊은 자리에 머물러 있던 기억에서 출발한 이미지들은 몽환적인 장면으로 화면 안에 되살아난다. 가령 일몰의 한강에 돌고래가 출몰하거나, 거실에 잠든 사람 옆에 펭귄이 나타나거나, 한밤중 뜬 무지개가 달무리처럼 빛이 나면서 한 화면에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뒤섞인 새로운 풍경이 탄생한다.


최민영, 〈밤 수영〉, 2024, 린넨에 유채, 220x680cm ©최민영

한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린 ‘한강’ 연작은 한강에서 나들이를 즐기는 사람들 너머로 돌고래가 출몰하는 낯선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존강돌고래’를 모티프로 그려진 이 돌고래는 〈하교〉(2024), 〈도시생활〉(2024), 〈한강 물놀이〉(2024)로 이어지는 한강 풍경에서 본래의 서식지인 아마존이 아닌 한강을 자유롭게 유영한다.
 
〈밤 수영〉(2024)에서 마침내 바다로 나온 강돌고래는 고래처럼 거대한 몸집으로 달빛 아래 떠오른다. 주변의 인물은 초현실적인 동물의 크기가 익숙하다는 듯이 자신의 일상을 즐기며 동물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관찰자로 등장한다.


최민영, 〈해 달 차〉, 2024, 린넨에 유채, 150x200cm ©최민영

최민영은 이질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화면에 빛과 색으로 깊이를 더한다. 작가는 특정한 시간대와 기후를 작품 속에 녹여내며, 이를 통해 각 작품이 지닌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이를테면, 〈해 달 차〉(2024)에서는 낮과 밤이 동시에 존재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을 그리면서, 밝은 햇빛과 차분한 밤의 달빛을 대조적으로 사용했다. 이로써 차를 마시는 두 인물은 가까이 마주 앉아 있지만, 각자 양지와 음지에 위치해 마치 다른 세계에 머무르는 듯한 시각적 착각을 준다.
 
또 다른 작품인 〈침실〉(2023)에서는 블라인드가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두드러지며, 방 안을 덮은 줄무늬 빛은 화면 속 요소들을 하나의 꿈 속 장면처럼 통합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최민영, 〈우연한 꿈〉, 2024, 린넨에 유채, 150x200cm ©최민영

아울러, 최민영은 내부와 외부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함으로써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한다. 〈우연한 꿈〉(2024)에서는 한밤의 눈길을 거니는 인물과 강아지가 그들 앞에 나타난 집을 주시하는데, 집은 무대처럼 실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러한 장면 속 갑자기 등장한 집 단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이 인물의 상상일 수도, 평행우주에 실재하는 풍경일 수도 있다는 미지의 상상 속으로 이끈다.
 
〈미지〉(2024)에서는 야생의 공간인 설산(雪山)의 절벽이 책상에 엎드려 자는 인물의 실내 공간과 이어진다. 때문에 창문 밖에 펼쳐진 풍경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인물의 꿈속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안과 밖을 넘나드는 공간과 장소는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인식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최민영, 〈방문〉, 2024, 린넨에 유채, 150x200cm ©최민영

작품 속 동물은 무의식과 상상이 결합한 상징적 요소로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달무지개〉(2024), 〈방문〉(2024) 등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자놀이 탈은 작가의 학창 시절 경험이 무의식에 남아 그림의 모티프로 사용되었다. 실제 사자를 볼 수 없던 조상들이 상상에 기대어 만든 ‘사자’는 작가의 상상을 통해 인형이 아닌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난다.
 
이와 더불어 스라소니, 장어, 문어와 같이 평소에는 인간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동물들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동물들은 작품 속에서 인간이 보지 못한 것을 목격하거나, 인간과 서로 삶의 영역을 침범 혹은 공유하면서 현실과 초현실적인 세계를 넘나드는 중간자적인 존재로 기능한다.


최민영, 〈달 의식〉, 2024, 린넨에 유채, 162x227cm ©최민영

한편, 보름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전시 마지막 공간은 신화와 민속, 전설 등 인간의 믿음과 수행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 중, 〈달 의식〉(2024)은 민담 속 달토끼와 유교 제례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작가는 어릴 적, 성묘를 치른 후 조상들을 위해 남겨둔 음식을 작은 동물들이 먹어 치우는 장면에 흥미를 느꼈다. 작품에는 이처럼 마냥 엄숙하게만 흘러가지 않는 의례의 순간이 담겨 있다. 마치 어린아이의 놀이 같은 눈덩이 굴리기가 진지한 의식으로 변모한 가운데,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 듯한 디지털 픽셀 캐릭터들이 분위기를 환기하며 궁금증을 유발한다.


《Midnight Walk》 전시 전경(갤러리바톤, 2025) ©갤러리바톤

나아가, 2025년 갤러리바톤에서 열린 개인전 《Midnight Walk》는 내면 깊숙한 층위에서 길어 올린 서사를 따라 자신만의 세계관을 점진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작가 최민영의 여정을 보여주었다.
 
최민영의 작업 세계는 일상의 기억과 꿈의 편린을 결합한 구상적 표현에서 출발해 점차 심화한 사적 경험과 내면 의식의 차원으로 나아가며, 감각과 상상의 경계를 허무는 고유한 미학으로 귀결된다.
 
전시는 미지의 장소와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신작 및 근작을 통해 다층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있었다. 주조색으로 활용된 파란색과 초록색은 새로운 시공간의 초자연적 분위기를 조성하며, 수면 위아래로 교차하는 생명체들의 기묘한 움직임은 강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최민영, 〈Sleepless Nights〉, 2025, 린넨에 유채, 130x170cm ©최민영

예를 들어, 〈Sleepless Nights〉(2025)에서는 안개 자욱한 심야의 숲 속에서 거대한 쌍둥이 고양이, 올빼미, 게, 물고기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마치 관람자의 존재를 직시하는 듯 캔버스 바깥을 응시하며 언제든 다가올 것만 같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달빛이 비치는 검푸른 공기는 이 장면이 수중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유도하고, 뚜렷한 형상들은 존재의 이중성을 암시하며 복합적인 신화를 구성한다.
 
그리고 최민영의 작업 속 달빛, 석양, 인공광 등 다양한 광원은 작품의 구성뿐 아니라 감상의 리듬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가령 〈Dear Storm〉(2025)은 부드러운 빛으로 연못 속 어린 물고기들과 눈사람 형상의 존재를 감싸며, 생명과 교감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최민영, 〈Dear Storm〉, 2025, 린넨에 유채, 150x200cm ©갤러리바톤

이렇듯 최민영은 현실과 비현실, 공간과 시간,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경계 위에서 신비로운 서사를 형성하고, 감각적 층위를 자극한다. 그 안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의 공존은 관람자로 하여금 낯설고도 익숙한 감정의 여정을 따라가게 하며, 내면의 기억과 환상 속을 유영하도록 이끈다.

 "작업에서 여러 층의 세상이 겹쳐 나타나는데 기묘하지만 아름답고 부자연스럽지만 그러한 가운데 조화가 있는 것이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민영, 갤러리바톤 인터뷰 중) 


최민영 작가 ©스페이스 K

최민영은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영국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후 현재 런던에 머무르며 활동하고 있다. 개인전으로는 《Midnight Walk》(갤러리바톤, 서울, 2025), 《꿈을 빌려드립니다》(스페이스 K, 서울, 2024), 《Dark Brightness》(베이징 하이브 현대미술센터, 베이징, 2023)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낙선재遊, 이음의 合》(창경궁, 서울, 2025), 《The Painted Room》(GRIMM, 암스테르담, 2023), 《Romancing Dissent》(쓰시 미술관, 난징, 중국, 2023),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대전시립미술관 대전창작센터, 대전, 2023), 《커튼콜》(디스위켄드룸, 서울,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최민영은 2018년 웰스 아트 컨템포 러리 어워드(Wells Art Contemporary Award)에서 차세대 미술상(Next Generation Art Prize)을 수상했고, 2017년 슬레이드 서머 스쿨 레지던시와 올베라 현대미술센터 레지던시에 선정되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