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렉티브 METASITU의 영상 작업은 팔레스타인 채석장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 인부들이 피부와 몸에 쌓이는 먼지를 일컫는
말 Tora Bora를 제목으로 삼았다. 팔레스타인 인부들이
캐고, 옮겨 절단하고 가공하여 수출하는 라임스톤, 곧 ‘예루살렘 돌’은 팔레스타인의 땅에 국가를 세우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식민의 상태로 몰아넣는 이스라엘의 종교를 오랫동안 물질화해 온 돌이다. 고대 시대 이후 유대교는 라임스톤을 종교 제례를 위한 건축에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Tora Bora〉를 구성하는 라임스톤 채석장과 석재 가공 공장의
일면 스산하고 일면 기계적 풍경은 폐허의 멜랑꼴리나 애도의 광경을 현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영상물 속에서
보고 있는 것은 점령군의 제단에 쓰일 재료가 생산되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채석장의 먼지들은
풍경론(風景論, Fûkeiron)을 제창했던 아다치 마사오의
영화 속 오사카와 요코하마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
유대인 정착촌 조성에 사용되고 있는 현대건설기계 굴착기 사진과 UAE에 대한 세일즈 야심을 감추지 않는
대통령 연설문 아카이브 옆을 지나친 관람객은 8시간 15분에
달하는 정여름의 영상 작업 〈천부적 증인께〉의 막연한 순간에 도착한다. 이병수, 박민하, METASITU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정여름의 작업 역시
전쟁, 분쟁, 식민주의의 맥락을 바탕에 두고, 미디어의 문제를 경유한다. 박민하의 작업이 지각 이미지의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전쟁과 세계의 관계를 사례로 들었다면 정여름의 〈천부적 증인께〉는 전쟁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쟁과 미디어의 관계를 탐구한다. 작가는 전작 〈그라이아이 : 주둔의 신〉과 〈긴복도〉에서 이러한
주제 의식을 이미 도드라지게 드러낸 바 있다.
〈천부적
증인께〉에서 정여름이 인터넷에 자신을 연결한 채, 다시 말하면 분쟁의 시공간에 자신을 연결한 채, 끝없이 모은 이미지는 공습이 진행되고 가자 지구 시민들이 인터넷에 스스로 업로딩한 영상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쉽게 정여름의 아카이빙 작업의 의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정여름은 “‘느닷없이 미지의 세계를 향하’고 우리에게 다시 구성해야 할 해석의 ‘생생한 밑그림’을 제공”하고 “결코 예견할 수 없는 ‘실재효과’를
풀어 놓는”4) 아카이브의 속성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작가의 개입을 통해 지도에 표기되지 않는 미군 주둔기지의 작동방식에 대한 단서를 엮어나가던 작가의 전작과
달리 〈천부적 증인께〉는 관객, 곧 증인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증인의
눈앞에 재난 지구의 시간을 곧장 가져온다.
이
작업은 가공되지 않는 아카이브를 내세워 오늘의 목격자에게 열망과 고통을 직접 경험하게 하려는 것일까? 간간이
들려오는 포탄 소리, 어둠, 섬광, 피난의 방향을 확신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무리, 한낮의 가자 지구의
이미지가 1시간 30분,
8시간 15분에 이르는 분량의 영상을 채운다. 그리고
폭력사회의 후일담 혹은 우화의 보이스 오버가 이미지의 시간을 대체로 배반하며 이미지에 엮어져 있다. 이보다
정여름의 작업은 우리에게 아카이브의 내용보다 아카이브를 채굴하고 관람하는 시간, 행위가 이루어지는 시간, 신체의 시간, 신체에 들러붙다 신체를 장악하는 감정과 무감함의 발생과
전개 자체를 묻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재난의 시간을 경험하는 대신 욕망과 윤리가 날을 세우는 증인, 목격자, 관객의 예견과 기대의 시간을 경험한다.
이것이
전시 “존경하는 ( ) 여러분”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경험의 성격이다. 윤리 없는 윤리의 시간을 경험하기, 윤리를 바닥에서 새로이 정립하는 분쟁의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1) 도미야마 이치로는 식민주의에 대한 프란츠 파농의 비판을 빌려 국가기관이 조사를 위해 말로 질문하고 강제로 답하게 하는 신문과
같은 말의 폭력이 횡행하는 공간을 일컬어 ‘신문공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도미야마 이치로, 심정명 옮김, 『시작의 앎. 프란츠 파농의 임상』, 문학과 지성, 2020.
2)
폴 비릴리오는 공중 폭격을 사용했던 총력전인 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의 개발과
핵을 통한 억지라는 논리가 시민의 불안을 일반화하는 시대를 총력 평화의 시대라 지칭한다. 총력 평화는
평화로 둔갑한 총력전을 지칭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순수 전쟁 역시 총력 평화와 긴밀히 연결되나 과학
발전과 더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으로 우발성 제거하고 전능함을 발휘하는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신비한 표상이 되는 상태다. Paul Virilio, Défense populaire et luttes écologiques, Paris,
Galilée, 1978. Paul Virilio, L’insécurité du territoire, Paris, Galilée, 1993.
3)
Serge Daney, La maison cinéma et le monde-2. Les années Libé, 1981-1985, Paris,
P.O.L, 2002.
4)
Georges Didi-Huberman, Images Malgré tout, Edition de Minuit, Paris,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