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은주(b. 1988)는 어떠한 대상의 완결된 모습이 아닌 모호한 상태, 즉 비결정의 시간을 캔버스에 담아왔다. 작가는 대상을 관찰하고 이미지로 옮기는 과정 속에서 매체와 물질의 성질이 변화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감각의 전달에 주목한다.


노은주, 〈도시 정물 3〉, 2015, 캔버스에 유채, 160x210cm ©노은주

노은주는 도시의 근간이 되면서도 결국에는 사라질 임시적인 장소인 공사 현장을 중간 지대로서 주목해 왔다. 그리고 작가는 이를 다방면에 걸친 감각적인 분해를 통해 형태와 공간의 개념을 다루고 구성과 구조의 원리를 찾는다.  


노은주, 〈풍경 2〉, 2015, 캔버스에 유채, 130.3x162.2cm ©노은주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작가는 물체를 3D 모델링하여 미니어처 조각을 제작한다. 이때 조각은 손으로 쉽게 만질 수 있고 유연하게 변형될 수 있는 소재로 만들어 진다. 그렇게 재형상화된 대상은 사진으로 기록되고, 캔버스 위로 옮겨진다.
 
드로잉, 모델링, 사진촬영의 작업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작업 과정 속에서 본래의 대상은 매체와 작가에 의해 새롭게 읽히고 변화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작가에게 오브제와 공간은 구체적으로 재현할 대상이 아니라 시각적 특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평면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추상적인 언어로 사고와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매체가 된다.

《상황/희미하게 지탱하기》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13) ©노은주

노은주의 첫 번째 개인전 《상황/희미하게 지탱하기》(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13)은 도시의 잔해로 만들어진 구조물과 임의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구조물을 이용해 이미지를 재구축한 회화 작품들을 소개했다.
 
작가는 이를 통해 도시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물이 자아내는 연약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경계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힘과 긴장관계,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행동, 불안과 같은 감정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출발했다.

노은주, 〈Leaning Against〉, 2013, 캔버스에 유채, 130.3x89.4cm ©노은주

오늘날 현대인의 삶을 지탱하는 일상적 환경인 아파트는 누군가에게 부의 상징이자 투자의 대상으로, 자본과 결부되어 소유되는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노은주는 이러한 아파트를 둘러싼 구조와 상황이 덧없고 일시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이에 따라서, 작가는 언론에서 보도된 사진들을 참조하여 용도가 사라지고 물질만 남은, 즉 철거되어 허물어진 혹은 폐허로서의 건축 더미를 그림으로 담기 시작했다. 임시적인 상태로서의 건축물을 화면 속에 담아낸 이후, 작가는 아파트 모형을 종이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노은주, 〈Leaning Against〉, 2013, 캔버스에 유채, 130.3x89.4cm ©노은주

이는 조형 오브제로서 모델링 되어 캔버스 위로 다시금 옮겨지게 되는데, 가령 얇고 연약한 종이를 접어서 테이블 위에 세워 두고 화면 속에서는 견고한 석고 덩어리처럼 보이게끔 그리곤 하였다. 작가는 주변에서 발견되거나 직접 손으로 만지며 제작된 오브제들을 하나씩 혹은 특정 장소, 예를 들어 작업실의 테이블 위 같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여러 개를 늘어 놓고 대상화하여 그리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은 회화가 만들어내는 공간과 현실의 공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평면과 입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실험으로 확장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Walking―Aside》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19) ©노은주. 사진: 이의록.

2019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개인전 《Walking―Aside》에서 노은주는 캔버스를 환영의 창이자 얇은 깊이를 가진 공간으로 상정하고 다면적인 3면화, 4면화 등의 형식을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노은주는 대상을 연출하기 위해 입체로 모델링을 하고 공간에 배치하여 구도를 정한 후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전시 공간 사이즈를 정확히 측량하고, 이 안에서 이미지와 공간, 관객과의 관계를 시뮬레이션해 보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Walking―Aside》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19) ©노은주. 사진: 이의록.

또한 캔버스 크기에 따라 원래 오브제 사이즈가 증폭되었으며, 이 오브제들이 놓인 테이블의 폭만큼의 깊이를 가진 공간 또한 그려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화면은 마치 연극 무대의 좁은 공간처럼 연출되었다. 그리고 캔버스 안에서 한계 지어진 공간의 깊이는 실제 전시 공간 속으로 확장되어, 관객이 공간을 거닐면서 화면 속 공간을 연상시키고 있는 그 주변으로의 공간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었다.


노은주, 〈낮은 벽과 돌〉, 2019, 캔버스에 유채, 193.9x97cm each ©노은주

이렇듯 모형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노은주의 작업 방식은 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가 그려진 과정과 닮아 있다. 작가는 이를 인식하게 된 이후 두 사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대상의 역할을 주인공과 보조 인물로 나누어 연극적으로 연출한 ‘낮은 벽과 돌’(2019) 연작, 얕은 깊이로 공간을 구성한 〈Twilit Space〉(2020), 화면 내부에 프레임을 배치한 〈Portrait-Day〉(2021)는 당대 회화의 요소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개별 작업인 동시에 비슷한 사물과 공간을 공유하며 하나의 맥락을 형성한다는 점 또한 성경이나 신화의 서사를 담은 고전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Blue Window》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21) ©노은주. 사진: 이의록.

그 연장선에서 노은주는 2021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Blue Window》을 통해 ‘창(window)’와 ‘거울상(reflection)’의 이미지를 반복해서 담아내며, 그림과 재현에 대한 오랜 논의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회화에 종종 등장해온 요소인 창과 거울상과 함께 그의 회화에는 건축구조물, 건축자재, 버려진 선, 돌 조각, 나뭇가지, 파편 등을 연상하게 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물-모형이 등장한다. 일시적이고 불완전해 보이는 사물들은 원래의 형태나 기능, 목적과 상관없이 각기 다른 중력으로 서 있거나 기대고 부유하며 새로운 상황과 장면 안에 자리한다.
 
이러한 사물들로 이루어진 화면은 어디에나 있을 법하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대상, 상황, 장면을 연출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영역을 넓히게 한다.


노은주, 〈사물들〉, 2022, 캔버스에 유채, 193.9x150cm each (3 pieces) ©CYJ ART STUDIO / SONGEUN

나아가, 이듬해 《제22회 송은미술대상전》에서 선보인 회화 작품 〈사물들〉(2022)은 그간 노은주의 회화 에 등장했던 사물들의 조각, 파편, 부분을 한 장면으로 소환한다. 이는 관람객의 시선에 따라 작가의 작업실 안 어떤 테이블 위를 그린 그림이 되거나 어느 창밖에 놓인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된다.


《노트 투 리프》 전시 전경(챕터투, 2023) ©챕터투. 사진: 전병철.

한편, 2023년 챕터투에서 열린 개인전 《노트 투 리프》는 빈 캔버스를 채우는 과정을 정원을 조성하는 일에 빗대어 바라보면서 시작되었다. 이 전시에서 노은주는 말라버린 꽃의 줄기와 철사, 실 그리고 이들을 엮어주는 녹았다 굳어진 재료들을 묘종으로 삼아 그의 정원을 채웠다.


노은주, 〈매듭들-열매〉, 2023, 캔버스에 유채, 120x220cm each (2 pieces) ©노은주

정원은 네 개의 테마를 품고 있었다. 전시장 전면 창과 내부의 벽에서 크기로 압도하는 〈매듭들-구부러진 선〉(2023)과 〈매듭들-열매〉(2023)는 사물들이 뒤엉켜 점에서 선으로, 덩어리로 맺어지고 있는 풍경을 확대하여 보여준다.


노은주, 〈스틸 라이트-마스 오렌지〉, 2023, 캔버스에 유채, 150x150cm ©노은주

두 번째로 ‘스틸 라이트’(2023) 연작은 선과 덩어리가 비교적 식별 가능한 형상들을 담아낸다. 마른 가지가 철사에 접붙고, 변성되었을 눅진한 재료가 매듭처럼 몸을 감아내는 원형의 구조 뒤로 어스름한 배경 색이 형상들에 일렁이는 리듬을 부여한다. 이와 함께 물렁한 것이 굳어가고, 곧은 것이 차츰 쇠하고, 새벽에 먼동이 밀려오는 사이의 시간성이 그의 화화를 관통한다.
 
아울러, 노은주의 사물들이 전작에서 줄곧 무대 위에서 포즈를 취하듯 자리하고 있었다면, 이 전시에서는 공간의 개연성을 읽을 수 있는 요소가 사라지고 사물들 간의 위계를 드러내는 그림자 또한 사물 너머로 소거되어 마치 공중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트 투 리프》 전시 전경(챕터투, 2023) ©챕터투. 사진: 전병철.

마지막으로 손주영 작가와의 협업 결과물인 ‘긴 형태’ 연작은 자투리 천으로 만든 캔버스에 정원을 세워 두었다. 쓰고 남겨진 천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이 연작은 자투리땅만이 허락되는 오늘날의 도시 정원과 닮아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노은주는 정원이라는 겹겹이 쌓인 의도의 울타리 안에 불현듯 스민 우연 아닌 반영, 그 얽힘의 운동성을 포착한다.


노은주, 〈스틸 라이트-오렌지 윈드 3〉, 2024, 캔버스에 유채, 72.7x53cm ©노은주

이렇듯 노은주는 실제 오브제나 공간을 대상화하여 모델링하고, 이를 다시 캔버스 위로 그려내는 방식으로 실재와 환영을 오가는 사물을 재형상화한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통해 작가는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에 내재한 긴장과 운동, 그리고 시간성을 기록하고 재현하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새로운 장면과 관계를 만든다.

 "건축의 결과로서 건물은 도시에 남지만, 중간 과정이었던 공사 현장은 실재의 세계에서도, 기억에서도 쉽게 사라진다. 연약하고 일시적인 시간을 그림에 옮겨 붙잡고 싶었다."    (노은주, 작가노트)


노은주 작가 ©갤러리바톤

노은주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조형예술과 예술전문과 과정을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노트 투 리프》(챕터투, 서울, 2023), 《Blue Window》(금호미술관, 서울, 2021), 《Walking—Aside》(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미니버스》(아르코미술관, 서울, 2025), 《遊物時間 A Thousand Ways to Objecthood》(유시우 미술관, 난터우, 대만, 2025), 《SeMA 앤솔러지: 열 개의 주문》(북서울미술관, 서울, 2023), 《제22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 서울, 2022), 《UNBOXING PROJECT: TODAY》(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22), 《작아져서 점이 되었다 사라지는》(아트선재센터, 서울, 2021)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노은주는 2017년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우민아트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