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구, 〈오쇠리 풍경 6〉, 2004, 디지털 사진 인화, 100 x 261cm © 강홍구

1. 강홍구의 사진은 꿈을 닮아있다. 시간을 놓쳐버린 황량한 거리의 풍경, 까맣게 뭉쳐져 있는 음영이나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흔적 등은 곧잘 꾸는 흉몽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강홍구의 사진이 꿈을 닮아있다는 것은 그의 개별 작품들이 이처럼 우리가 종종 체험하고 반추해내는, 그 낯설고도 친숙한 꿈의 어떤 장면들을 재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표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그의 사진작업의 구성원리가 꿈 작업dream work을 원용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 사진적 ‘요법’이 꿈의 해석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꿈의 내러티브와 이미지가 응축과 치환, 상징의 기술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제도와 욕망 또는 자본과 예언의 암호들을 재구성하듯이, 꼭 그렇게 강홍구의 디지털 사진은 풍경과 상상과 역사를 합성해낸다. 선명하게 불타오르는 나무, 뒤가 비어 있는 건축물 파사드의 배열이나 길거리에 철퍼덕 올라와 있는 거대한 갈치의 형상 또는 해수욕장에 유독 길게 늘어져버린 사람의 등짝 등은 그런 맥락에서 강홍구가 차용한 꿈의 장치들이라 할만하다. 바로 이런 장치들을 통해서 그의 사진은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층위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실체들, 또는 그러한 억압의 상황을 명시해준다. 

그러므로 강홍구의 사진은 얼핏 보이는 것처럼 꿈을 찍거나 카피하거나 또는 스캔한 것이 아니다. 꿈을 찍는 사진관이라는 동화가 강홍구의 작업에 대한 우화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홍구의 사진은 꿈 자체,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꿈이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에 해당한다. 그 상영관에 들어서 우리는 눈앞에 펼쳐지는 기이하고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공포스러운 상황을 현재의 리얼타임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디지털 사진은 사진의 존재론이 기대고 있는 과거시제, 곧 지나간 것에 대한 슬픔이나 그것의 미래형인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차라리 꿈의 현재적 체험이라는 점에서 그의 사진은 영화를 닮아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와 달리 강홍구의 사진은 우리 머리 뒤의 영사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투사되는 빛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그러니까 이를테면, 리어 스크린의 영상에 가깝다. 길게 이어지는 와이드스크린 위, 카메라와의 정면대결은 일관된 초점을 흐트러뜨리고, 중첩되는 화면과 또렷한 이음새들은 망막의 동일시를 비틀어 놓는다. 그러면서 꿈꾸는 자가 꿈을 만드는 것이 아니듯, 사진을 찍는 작가가 사진의 주체는 아니라고, 작가 강홍구는 슬쩍 비켜서서 말한다. 작가의 ‘설정’에 따라 우리들 관객은,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며 죄의식과 욕망이 공모하는 이 현재적 경험을, 이제, 다분히 공간적으로 구축해낸다. 그의 사진은 우리 꿈이 늘상 그렇듯, 조잡하고 느닷없고 어이없는 상황에 우리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그 건축적인 미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2. 강홍구의 이번 전시에는, 초현실적인 숭고의 체험이 가능한 초고속 파괴와 초대형 건설의 현장, 꿈인지 생시인지 알기 힘든 현장의 그 미로 속으로 우리를 끌고 다니는 유인책이 등장한다. 도시외곽의 재개발 현장을 돌아다니며 작가가 주웠음직한 장난감들이 그것이다. 미키마우스가 그려져 있어 미키네 집이라 칭한 장난감 집이 거대한 포크레인과 철골더미들 사이로 삐죽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미키네 집은 초토화되기 일보직전의 주택가 옆에 놓이거나,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산동네 위의 아슬아슬한 담벼락 혹은 흰 눈과 초록 색 잔디 위에 올라와 있다.

한 화면 안에서도 이 장난감 집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의미의 내용에서 보자면 은유적이고, 집의 부속물이라는 완구의 측면에서 보자면 환유적이다. 한편, 형태의 유사성을 강조하자면 아이콘에, 장난감과 사진의 발생적 관계를 강조하자면 인덱스에 해당한다. 또 알록달록한 장난감 집의 색깔 때문에라도 폐허화된 무채색의 개발 현장이나 단색조의 자연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이 미키네 집은, 서로 다른 프레임의 각기 다른 사진 작품들을 연결해 주는 일종의 하이퍼텍스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장난감을 갖고 풍경사진 속에서 기호 놀이를 하자는 것일까? 

굳이 구별하자면 여기서 초점은 기호가 아니라 놀이에 맞춰진다. 강홍구의 이 사진연작은 ‘발견된 오브제’를 가지고 그것이 발견된 주변 장소를 어슬렁거리다가, 적당한 장소를 찾아내면 거기에 오브제를 옮겨놓고 몇 가지 위트 있는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그 프로세스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게임의 수행적 측면을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는 이 연작사진의 특성은, 작가가 수련자라 명명한 두 번째 장난감을 통해서 한 번 더 강조된다.

작가가 알아낸 바에 따르자면 이 캐릭터는 일본 격투기 게임의 전사 카주야 미시마Kazuya Mishima를 모형화한 것인데, 그 자가 위험한 전선줄을 타고 들며 깨진 유리조각 위를 넘나들고 가파른 담을 타고 오르고 있다. 이 수련자의 크기와 자세가 자유자재로 변모하고 있는 사진들에, 작가는 중국 무협소설의 어휘록을 따라 작품제목을 붙여준다. 그렇게 수련자의 롤플레잉을 따라 가다보면 언젠가는 미키네 집과 한 화면에서 조우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비주얼 펀visual pun에 몰두하느라 우리 눈은 어느덧 그 물건이 놓여진 풍경의 맥락을 놓친 채, 장난감의 지표를 찾아내서 안심하곤 하는 버릇에 길들여진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적 기호와 정치적 풍경 그리고 수행의 자의성이 서로 다른 비율로 봉합되어 있는 강홍구의 작업이 지니는 가장 큰 변별력 중 하나는, 그의 사진이 프레임 안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우리를 프레임 밖으로, 그 너머로 계속해서 밀어낸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그의 디지털 사진에 나오는 미키네 집이나 수련자 같은 물건들은 미술사적 오브제나 사진적인 도상보다도, 오히려 하위문화의 한복판에 있는 디씨인사이드의 ‘짤방’이나 ‘필수요소’와 같은 이미지들에 의해서 보완적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 텍스트가 잘리지 않기 위해서 쓰이는 짤림방지 이미지들이나 합성사진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아이템들이 디지털 ‘폐인’에 의해서 상용화되고 있는 지점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면서, 강홍구의 사진이 지니는 함의가 다른 각도에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디지털 카메라와 스캐너와 포토샵이 문화적 필수품이 되고 블로그와 싸이가 대중적 교양의 관문이 되어 버린 지금, 그의 작품을 미술관으로 밀어 넣은 동력은 사진의 예술화라는 미술제도의 관성이 아니라, 사진에 대한 뒤늦은 미술의 구애를 무색하게 만드는 문화적 포퓰리즘의 힘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변화 속도에 유달리 민감한 작가 강홍구가 디지털 게임이 아닌 보드게임의 묘미에 새삼,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 자신 합성의 ‘대가’인 강홍구가 ‘필수요소’를 사진 속에서 CG로 처리하는 대신, 실물 장난감을 들고 풍경 채집에 나섰으니 말이다. 물론 이 풍경 채집에는 우리가 더 이상 실물과 합성물을 구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물도 포함될 것이다.  


 
3. 강홍구는 작가일 뿐 아니라 시각문화에 관한 책들을 집필한 필자이자 일찍이 방송진행자와 강연자로도 활동을 한 바 있으니,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멀티플레이어인 셈이다. 또 SF 영화와 추리소설, 호러 만화와 무협지 등 각양각색의 문화적 텍스트를 섭렵한 사람답게, 그의 사진 전반에는 이런 교양의 이력들이 녹아있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인문적 리터러시는 인용대상의 폭과 그 선택지를 넓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터텍스추얼리티를 구사하는 그 방식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그러니까 타란티노의 영화, 마네의 누드, 호베마Meindert Hobbema의 마을길, 김정희의 세한도 등 패러디와 패스티쉬의 대상이 갖는 폭과 다양성 못지않게, 그것이 인용되는 방식과 절차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초창기 사진작업에서는 영화스틸 속에 자신의 얼굴을 편집해 넣거나 대량생산된 광고와 상업사진 이미지들을 활용하는 포토몽타주식 결합이 두드러졌다. 이미지의 병치나 부분적인 조합에 그쳤던 이러한 편집방식은 점차 사진의 프레임 전체를 중첩과 반복을 통해 재구성하는 몽타주 방식으로 변화한다. 그에 따라 기존 이미지의 활용보다는 실사촬영의 빈도가 높아지고, 표피적인 이미지간 충돌보다는 그 배면의 틈 사이로 과장과 왜곡, 충격과 소외의 효과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런가하면 통상적인 장르영화 또는 내러티브의 컨벤션에서 벗어나는 편집방식을 전용하는 이러한 몽타주기법이, 좌우로 길어진 개별 작품의 프레임을 넘어서서, 특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연작들의 편집으로 이어질 경우, 그 작품군 전체는 어떤 광폭廣幅한 기념비성마저 획득하게 된다. 

그렇게 몽타주된 작품들 상하좌우에 작가가 쓴 글과 수집한 자료들 그리고 밑그림과 드로잉, 스틸사진들을 병치시키는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확실히 그의 사진구성 원리는 하트필드보다는 리시츠키의 그것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벤자민 부흘로가 말했듯이 리시츠키 이후, 팩토그래피로서의 사진은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리터러시를 창안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숙련시킨다는 목표를 이상화한다. 러시아아방가르드들이 대량복제된 수천 장의 사진을 유통시킴으로써 구성주의 조각의 물질적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원리를 터놓았다면, 이제 디지털사진은 하나의 사진 프레임 안에서 수천 개의 이미지를 자가복제할 뿐 아니라 이를 똑같은 밀도로 유포시킬 수 있게도 만들었다. 물론 이 경우, 강홍구의 팩토그래피는 러시아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적 비전보다는 다분히 디스토피아적 시야를 재현하긴 하지만 말이다. 

특히 그의 파노라마식 사진은 작품 전후에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텍스트를 포진시킬 뿐 아니라, 소리나 냄새까지 포획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멀티미디어적이다. 여러 연작 중에서도 김포공항 옆에 위치한 마을 오쇠리를 재구성한 작품들이 독보적이다. 오쇠리의 풍경사진 연작 속에 낮게 떠있는 비행기의 연속적인 배치는 그 굉음이 우리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이 압박하는 효과를 낸다. 그런가하면 덤프트럭이 처박혀 있는 고인 물은 과장된 원근법적 효과 때문에 시궁창 냄새가 금세라도 우리 쪽으로 풍겨 나올 것 같다. 쓰레기더미와 파밭,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버려진 신발짝이 같은 픽셀크기로 산포되어 있는 이 균질적 풍경사진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오쇠리라는 지역의 장소성이 일찌감치 상실되고 벌써 개발의 시간대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오감으로 깨닫게 된다.  

지도에 오쇠삼거리라는 지명으로만 남아있는 이 자연부락은 강홍구의 몽타주를 통해서 미래의 홀로코스트적인 공간으로 간단히 편집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사진 속의 공간을 하나로 응집해버리는 소실점은, 마을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오쇠리의 마을회관을 대체하며, 거대한 개발 음모론에 대한 하나의 상징물로 자리 잡는다. 세계전체가 하나의 원리로 귀착되는 음모론처럼 극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원근법의 소실점은, 불을 내서 마을주민들을 쫓아냈다는 그 배후세력을 명징하게 시각화한다. 모든 음모론이 그렇듯이 강홍구의 오쇠리 사진 속에서 그 소실점은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이며 또한 치명적인 것이다.   


 
4. ‘오쇠리’ 연작에서 보이듯 강홍구의 풍경사진은 얼핏 단일 시점으로 모아지는 듯 보이지만, 그 작동방식을 들여다보면, 풍경 안팎의 텍스트를 넘나들면서 오히려 그 원근적 공간이 내파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강홍구가 구현하는 사진적 원근법은 언제나 자신을 방해하는 쪽에 가깝다. 호베마의 풍경화 〈미텔 하르니스 마을길〉에서, 하늘과 맞닿아 있는 소실점을 강홍구 자신이 정통으로 가로 막도록 자기 사진을 합성해 넣은 것처럼, 그의 사진에서 원근법은 종종 스스로를 가린다(〈도망자 8〉, 1999년).

이러한 ‘방해공작’은 화면을 분할하고 이어붙이는 작가 특유의 화면조합 방식에서도 엿보이는데, 〈나는 누구인가〉 연작에서는 주로 작가 자신을 멀티플로 만들어서 화면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방법을 썼다. 반면, 수공적인 프로세스에서 벗어나 디지털 카메라와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이후에는, 화면을 중첩해서 이어붙이는 방식을 통해 관람자의 시선을 흐트러뜨리는 방법이 주를 이룬다. 원래 작가는 디지털 사진을 이용해서 대형 풍경사진을 만들 계획이었다고 한다. 기술적인 이유와 비용문제 때문에 온전히 성사시키지는 못했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가로로 연결, 확장되는 예의 파노라마식 사진이 탄생했다. 

감상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이 파노라마 사진들은 두루마리 그림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전시장에는 대개 사진 전체가 펼쳐져 배열되어 있지만, 막상 우리가 감상할 때 이 사진들은 그 길이 때문에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시야가 확보되는 만큼 부분적으로 읽어서 프레임들을 연결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조금씩 맞물리거나 약간씩 비틀려서 편집된 프레임마다 서로 다른 카메라의 시선이 봉합되어 있고, 거기에 관람자의 시선이 조응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긴 사진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그 반대로, 우리 눈이 움직이면서 풍경을 “시간적으로” 읽어내게 되는 셈이다. 물론 두루마리 그림은 그림을 말아 움직이며 감상한다면, 이 경우는 보는 사람의 몸이 사진을 따라 움직인다는 명백한 차이는 있겠다.

여러 사진 중에서도 〈한강시민공원〉 연작이 대표적인 두루마리형 사진이다. 마천루들과 대형 교각들을 원경으로 하면서, 시민공원으로 나들이 나온 인물 군상들이 중경과 근경을 채우고 있는 이 작품들은, 한가로운 휴일 서울의 모습을 알려주는 전형적인 풍속도라 할 만하다. 이 사진들은 휴일의 여유로운 카메라에 잡힌 익살스러운 표정의 인물들, 무리지어 있는 연인들과 친구들, 부랑자와 술 취한 사람들 그리고 거기에 끼어든 맥도날드 피에로나 하늘을 나는 연 등이 함께 어우러져 많은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그런데, 길게는 5미터가 넘게 이어지는 이 두루마리 풍경에서 우리의 시선을 잡아채 감상의 시간을 주도하는 것은 몇 개의 소실점이 아니라 한강과 공원이 넓게 만나고 있는 수평선 자체가 된다. 이어붙인 사진적 장場 위에 펼쳐지는 진풍경을 한강 물줄기를 따라 감상하는 이 관람 방식 때문에라도, 강홍구의 〈한강시민공원〉은 인상파의 공원풍경화들보다는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같은 두루마리 그림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물자의 이동과 사람살이의 변화, 건축물이 포진한 거리 등을 강물의 흐름을 쫓아, 펼쳐 보는 화폭 크기만큼 이동하면서 릴레이식으로 관람하는 옛 두루마리 그림말이다.

하긴, 시대와 지역 그리고 매체의 현격한 차이를 무시한 채 이렇듯 관람 방식의 공통점만을 강조하는 것은 작품을 두루 이해하는 데는 하나의 함정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 맥락에서 오히려, 〈청명상하도〉를 모형으로 만들었다는 중국 현지의 관광명소나, 이 두루마리 그림을 재현했다는 송나라 배경의 한국영화 세트장이 오히려 더 가까운 비교의 대상이 될지 모르겠다. 강홍구의 이 사진 연작은 이런 식의 입체화 또는 실물화實物化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시대의 풍속도는 물론 그 인식소와 정서구조, 그리고 미디어의 자기 참조성까지를 두루 건드리는 만화경식 세계를 보여준다. 


 
5. 두루마리 그림에 나타난 거리풍경을 본 따 만들었다는 영화세트장은 가상인가? 사람들이 들어가서 구경하는 이 영화세트장은 현실인가? 또 그 세트장에서 촬영된다는 “판타지액션멜로” 영화는 가상인가? 혹은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상영되는 영화관은 현실인가? 아니, 이런 재현의 재현이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슬을 만들어내게 된 그 두루마리 그림은 원본인가? 아니면 애초에 카피였던가? 이런 현기증 나는 질문들을 ‘순간 정지’ 한 뒤, 우리가 보는 풍경 자체를 프레임별로 느리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강홍구의 드라마 세트 연작의 작동방식이다.

 강홍구의 이 세트 연작은 ‘실제로’ 세트장을 찍은 사진들이다. 사진들에서 보이듯, 시대극이나 무협드라마의 촬영을 위해서 만들어진 실제 세트장은 완성된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과는 전혀 딴 판이다. 고화질카메라와 편집기술, 거기에 첨단 컴퓨터그래픽까지 합쳐져서 요즘 영화와 드라마의 화면에서는 현실이 틈입하는 어떤 균열이나 이음새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반면에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강홍구의 드라마 세트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쩌다 발견되는 ‘옥에 티’들이 오히려 전면에 나선다.

〈야인시대〉에 저 멀리 고층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일제시대’에 요즘 패션을 한 사람들과 자동차가 들어가 있다. 한술 더 떠, 허술하게 받쳐져 있는 가짜 동대문의 파사드 뒷면이나 그 앞에 버려진 쓰레기들이 부각되기도 한다. 게다가 이 사진들 자체가 이어붙이기 한 것이라는 자국과 흔적들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러한 ‘시대착오적’ 인덱스들 때문에 이 사진들은 흑백으로 찍었지만 흑백사진이 갖는 과거 취향과 예술사진의 징후, 노스탤지어의 효과 등을 분산시킨다. 이런 식으로 강홍구의 드라마 세트는 등가로 무한 복제되는 디지털 사진의 미래시제를 비틀고, 점점 색이 바래가는 흑백사진의 과거시제를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강홍구의 모든 풍경사진은, 가까운 동네에서 저 멀리 관광지들까지, 동시대의 현장 곳곳을 작가가 발품을 팔아서 찍은 사진들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인양 작가는 당대적 장소와 구체적인 사건 혹은 인물들의 ‘현존’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찍힌 사진 속의 풍경은 하나같이 마치 오랜 세월 물에 잠겨 있다가 막 모습을 드러낸 수몰지구의 발굴 현장처럼 보인다. 인적이 끊긴 적막하기 그지없는 거리, 수초와 물이끼처럼 달라붙어 있는 폐품들과 허물어진 건축물들, 흔적만 남아있는 도심 구조들이 보이고, 가끔씩 그 폐허화된 도시에서 떠돌고 있는 사람들은 방금 되살아난 미라들 같다. 건져 올려진 수몰의 풍경 속에서 오쇠리와 압구정은 도굴현장이 되고 〈세한도〉와 〈고사관수도〉는 도굴품이 되어 버린다. 

한국적 개발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초현대를 향한 욕망과 토건적 상상력, 경제적 파시즘의 괴력은 사람이 살던 동네, 전설이 남아있는 마을을 부수어 없애버리거나 물 속에 가라앉혀 버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위에 고층건물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세워 올리거나 고속도로를 내고 댐을 건설한다. 그러나 유명한 드라마 촬영지나 세트장이 관광명소화되면서 주요 지자체의 수입원이 되었듯이, 어느 날, 그렇게 가라앉은 수몰지구가 우리 앞에 유령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며 떠올라,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우리의 기억도 꿈도 무의식도 모두 화폐가 되어 버렸다. 그것도 지폐가 아니라 크레디트 카드의 마그네틱과 인터넷 뱅킹의 비트에 의해서 눈에 보이지 않게 교환되는 화폐로 말이다. 이 모든 것은 현상몽일까 예지몽일까 아니면 데자뷔일까. 강홍구의 사진은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