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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술이 만드는 자리: 홍영인의 여성 노동 미술
2025.0609
강수미 |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미술비평가
홍영인, 〈퍼포먼스 다섯 극을 위한 매뉴얼-원형
프레임 외벽〉, 2024, 삼베에 자수, 8점, 각 244x56cm, 《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 설치 전경 © 아트선재센터
한국
출신으로 현재 영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고 있는 작가 홍영인의 최근작들은 인류학적인 주제와 다원적인 장르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그녀는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 최종 후보 4인에
선정되어 선보인 전시를 전후로 인간 노동의 역사와 동물의 생태를 테제 삼아 작업한다. 그러한 작업들은
주제의 특성상 객관적 사실에서 출발해 인문학적 판단에 이르는 리서치와 그것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작가의 주관적 해석 및 미적 구현 과정을 밟을 때
특유한 예술성을 확보할 수 있다.
홍영인의
경우에도 그러한 창작 프로세스를 지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완성된 작업에서 풍부한 의미가 내포됨은
물론 조형적 다양성과 표현의 종합이 드러나기를 추구한다. 그렇게 해서 이 작가의 미술은 자수 직물, 공예적 조형물, 퍼포먼스, 사운드아트
등 장르를 횡단하고 매체를 중층으로 쌓아 집약된 의미체로 출현한다. 특히 2025년 5월 시작한 홍영인의 국내 첫 미술관 개인전 《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아트선재센터 스페이스2, 2025.5.9.-7.20)는 그 일련의 요소들을 마치 총체예술처럼 하나의 향유 기회(전시이자 공연) 안에 구성해 제시했다.
요컨대 관객에게 전형적 전시장 미술의 정적인 감상을 벗어나 복합적 감각 경험이 유발되는 장場을 제공한 것이다. 작가는 전시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극劇’이라는 상징적 조건 안에 거대한 태피스트리 설치작품과 수공예
조각들, 전시 일정에 따라 열리는 다섯 번의 퍼포먼스, 5채널
사운드 영상설치가 퍼즐처럼 상호 짜이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물리적 전시 구조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 그 감각적 장에는 감상자가 금세 눈치채기 어려운
―다분히 작가의 의도에 따른― 주제가 뼈처럼 내장돼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한국의 권력구조에서 존재
자체를 무시당하거나 약자로 산 이들, 때문에 한국의 근현대사 서술에서 애초부터 고려된 적 없이 현재에
이르렀고 기록의 작은 실마리조차 찾기 어려운 이들, 그중에서도 여성의 역사적 기여와 노동이 관건이다.
홍영인은 그러한 존재들이 삶을 살아내며 행한 사실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자신이
조사하고 재해석한 내용을 한국 근현대사의 소외된 리얼리티로서 예술의 자리에 올리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다른 예술 사례가 있으니, 그쪽으로 잠깐 우회해 보자.
《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 설치 전경 © 아트선재센터
예술과
사실의 긴장 혹은 앙상블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아버지는 소년 시절에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어렵사리 밑천을 모아 시골 동네에 작은 식료품점을 차려 가족을 먹여 살렸다. 공장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와
그 가게를 유지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힘들게 일했다. 작가는 그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고자 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와 같이 “물질적인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산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예술적인 것” 대신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담은 글을 써야 한다고 각성한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부모처럼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한 채 일평생 육체노동과 먹고사는 문제에 짓눌린 이들, 문화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이들, 사회 계급/계층 구조의 하부에 속하는
이들의 이야기라면 “예술적인 것”을 피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에르노는 아버지의 삶을 문학예술의 미적 형식, 소설적 변용, 수사학적
표현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글로 작품화했다. 그것이 에르노 스스로 “사회적 자서전autosociobiographie”이라고 정의했고, 1984년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르노도상Prix Renaudot을 수상한 『자리La Place』라는 ―국역본 『남자의 자리』― 책이다1. 하지만 에르노의 그러한 비非 소설적 글쓰기가 곧 그녀에게 수상의 영예를 가져다준 예술 작품이 되지 않았는가.
《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 설치 전경 © 아트선재센터
또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글을 통해 물질적 필요에 굴복한 삶이 아니라, 정글 같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생生을 일궈낸 문학적 존재로 조명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타당한 비판인데, 사실 에르노가 그러한 빌미를 제공했다.
이를테면 이 문학 예술가는 소설에서 “예술적인 것”과 삶에서 “객관적인 표적”을 이분법으로 파악함으로써 스스로 예술의 범위를 한정시켜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안을 정교하게 분할해 보자. 요컨대 에르노가 피하려 했듯 소설 형식의 반복을 통해서는 노동자
아버지의 삶을 자신의 글로써 기억하고 조명한다는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부박하지만
다른 누구의 삶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세속世俗을 ‘사회적 자서전’이라는 자기만의 예술로 고안해 위치시킴으로써 그 일에 성공했다.
다시
《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로 돌아와서, 그 전시는 내게
위와 같이 에르노의 책을 다시 펼쳐보게 했다. 단적으로 말해 사회역사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삶과 노동을
예술로 다루는 테제가 홍영인의 최근작과 에르노의 그 책을 내 머릿속에서 접속시킨 것이다. 이어 다음과
같은 비평적 질문이 떠올랐다.
가령
예술은 주류 중심의 서사에서는 보이지 않고 다뤄지지 않는 개인들, 동시에 순수예술의 규범을 통해서는
실상을 미화함으로써 왜곡의 위험이 있는 존재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미술은 그런 존재들의 척박한 삶과
힘든 노동의 현장성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모든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구와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해 미화된 조형성을 배척하고 메시지 전달에 집중하는 미술이어야 가능한가. 아니면 더 극단적으로, 그러한 테제를 가지고 조형예술 작품을 한다는 자체를 반성하며 금욕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정신구조mentality에 머물 것인가… 같은 문제를 숙고하도록 이끈 것이다.
하지만
에르노의 문학처럼, 홍영인의 미술에는 성찰적이고 개념적인 내용을 감싸안는 예술 형식의 특수성과 미학적
완결성이 있다. 앞서 썼듯이 홍영인의 최근 작업은 강한 주제 의식과 탐구 행위를 바탕으로 하되 감각
지각적/미적 형식과 내용의 앙상블을 달성해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 설치 전경 © 아트선재센터
작품의
가능성
홍영인의
작품은 질료적으로 잘 다듬어지고 표현 양식이 풍부해서 시각적 아름다움과 다채로움이 있는 예술 그릇container에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 내용contents으로 담긴 형국이다. 《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에서는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공식 기록은 물론 대중들 사이의 파편적 기억으로도 거의 포착되지
않아 온 여성들의 과거사가 정교하게 제작된 오브제로 형상화되어 세상에 대고 조용한 이해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직설적 설명문이 아니다. 작가가 손수 자수 바느질한 태피스트리, 장인과
협업한 버드나무 조각품과 골풀로 짠 소품들이 그 마이너리티 서사를 실어 나른다.
물론
그것들은 기성의 조각이나 공예품과는 결을 달리 한다. 전시물로서 조각이라기에는 만져서 작동시키고 가지고
놀이하는 데 맞춤이다. 또한 공예품이라기에는 각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용도 외에 기능을 갖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은 작가의 개념적 의도를 따라 실증적으로 조직한 작업 주체와 창작 방식, 표현법과 제시 방식을 갖췄다. 그리고 전시에서 그 실증적 사안들은
설치미술의 맥락에서 제시되고, 더 중요하게는 전시 기간 동안 다섯 번의 즉흥 퍼포먼스를 통해 매번 새로운
형질과 상황으로 탈바꿈한다.
전시
전체를 이끄는 중심 작품은 삼베에 자수로 내용을 쓰고 그린 대형 태피스트리 〈퍼포먼스 다섯 극을 위한 매뉴얼-원형
프레임 외벽〉이다. 8점의 자수화가 총 길이 약 40미터의
거대한 원형으로 연결된 그 작품에는 작가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 찾은 여성의 비공식적 업적과 노동의 사실들이 담백한 형상과 말로 수놓아져 있다.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현계옥과 정철성, 일제강점기 부당한 임금 삭감에 맞서 “여성 해방, 노동 해방”을 부르짖다 일본경찰에 진압된 평원고무공장 여공 강주룡,2 제주에서
반일 운동을 주도한 해녀 부춘화, 1970년대 청계천 피복 노동자로서 여성 노동자의 삶을 기록한 신순애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동일방직에서 여성 노조를 결성하고 부당해고에 맞서다 동료들과 똥물을 뒤집어쓴
이총각3 등이 그
과거사의 주체들이다.
홍영인, 소품 5. 차임벨 기계, 2025, 천연 섬유, 종, 놋쇠, 밧줄, 나무 막대, 나무 구조물, 2개의 의자, 약 130x220x85cm © 아트선재센터
크게
보면 홍영인은 식민지 시대와 산업화 시대를 살아낸 이 땅의 여성들에 초점을 맞췄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디테일로 들어가면 이름을 거명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은 그녀들만의 피땀, 눈물, 굴하지 않는 정신과 모욕당한 몸의 일화들이 빼곡하다.
그렇게 작가는
명시적으로 역사의 강자들이 행한 억압과 폭력을 한정하고, 그에 저항한 이들의 참혹하면서도 경이로운 행위의
일화들을 한국사의 객관적 지표로서 천에 수놓아 새겼다. 그태피스트리 작품은 설치 방식과 관객이 그것을
감상하는 방식 면에서 일견 19세기 말 유럽의 카이저파노라마Kaiserpanorama와
유사하다.
하지만
후자가 겉의 렌즈를 통해 내부의 입체 영상을 환영illusional으로 즐기는 장치였던 것과는 달리, 홍영인의 다섯 극 태피스트리는 피복 노동자의 생산물처럼 직물에 배어든 고된 노동의 흔적을 감상자가 보고 읽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게다가 그 원형 태피스트리 설치작품의 안면에는 울주군 대곡리와 천전리 반구대 암각화에서
영감을 얻은 동물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다.
아마도
홍영인은 그렇게 이미지의 양면을 조합함으로써 시공時空과 종種을 건너뛰며 안팎으로 만나는 존재들의 가능성을 감상자에게 가이드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치 남자만 인간인 것처럼 만들어진 남성 중심 세계관, 그 가운데
인간의 우월적 지위를 상상적으로 구성한 인간학에서 언제나 이미 배제된 타자로서 ‘여성’과 ‘동물’이 그렇게 홍영인의 직물 노동을 통해 우리 안으로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
1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신유진 옮김, 1984Books, 2022, 인용은 pp.18-19.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주룡”,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723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일방직 노동자투쟁”,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8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