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에
남은 것은 구멍과 표면이 공존하는 감각 경계인 피부를 통해 접촉이라는 비언어적 관계가 형성되었던 흔적이다. 작가의
손이 타인의 살갗 위를 연신 두드리고 문지르고 덮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석고붕대는 마르는 시간이 짧고
자칫하면 눌려 우그러질 테니, 어느새 몸을 싸는 동작은 재빨라지다가도 피부의 작은 요철과 털 하나에도
쉽게 멈춰 섰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 꿈틀대는 것을 가만히 감싸 안았던 것은 어느새 틀만 남기고 몸은
고스란히 남긴 그 형태에서 쉽게 빠져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남은 ‘껍질’은 무너지고 부재하는 몸의 자국이 되었고, 마치 퍼포밍 없이 수행문이
되기 위한 가능성으로서의 몸, 그 조형적 가능성을 추적하듯 남아 있다.
어쩌면 이 껍질은 유령으로서의 몸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유령’의 차원에서 말하지 않았기에 순전히 보는 이의 상상이지만, 이 하얀 몸체는 자동적으로 아감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해 말했던,
기억하는 무언가를 새겨 넣을 수 있는, 떼어낸 후에도 흔적이 남게 되는 밀랍, 그리고 그 껍질 안에 있었을 영혼적 존재를, 그가 유인하는 깨달음을
상기시킨다.[10] 이 껍질 안에 몸을 기꺼이 내준 이들의 인간적 특질, 살과 뼈, 사회적 관계가 비동시적으로 공존함을.
이유성의
껍질 인체 조각의 바탕이 된 석고붕대는 색과 형태, 질감면에서 특이할 것이 없다. 게다가 주로 간이로 형태를 뜰 때 쓰이고, 내부의 신체 골조의 결함을
재생하고 나면 곧장 폐기된다. 물질의 지위로 보자면 부차적인 형편이 당연하달까. 물이 닿으면 흐물거릴 테고 힘을 줘 누르면 금방 부서질 테다. 조각적으로는
난점 가득한 재료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 재료가 가진 일회용의 무개성은 인체 형상에서 기호를 탈각시켜 “가치 구분이 무른 공간으로 감각”[11]하게
하려는 작가에게는 최적의 선택이 된 것 같다. 이유성은 이 시점에서 인체 조각으로서 배반적인 선택을
하나 더 예비해 놓는다.
이번 작업을 위해 그가 탐구한 인체 형상은 석고붕대가 주는 임시성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전형성을 내포하는 것들이다. 도나텔로의 다비드상, 비욘세의
퍼포먼스와 의상, 바티칸 박물관의 천사상, 불교 전통의 약사여래상, 앙리 마티스의 ‘등’ 부조, 미라의 관이 이 껍질들의 유령적 원형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작가는
한 번 더 자신의 선택을 배반한다. “퇴행적으로 비칠, 현대적
조각 측면에서는 한계가 될 수도 있을 하드웨어로서의 몸이 가진 세분화된 조건”을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정보값”으로 치환해 “리사이클링”하고 “해킹”한다. 조각적 규범으로서의 이 인체 형태들은 실존 인물의 몸과 겹쳐져 ‘껍질’로 캐스팅되는 과정에서 수수께끼처럼 반영되거나 지워져 섹슈얼리티, 그로테스크, 성상 파괴, 약물로
인한 표피의 전율, 추상화된 공간과 같은 변성의 사건과 감각을 산출한다.
이제
세워진 타인의 몸들과 대조적으로 바닥에 늘어뜨린 몸이 남았다. 작가 자신의 몸을 셀프 캐스팅해 이어
붙인 이 알루미늄 파편 조각들을 떠올리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이유성의 인체 조각은 작가 자신이나
규범적, 프로타고니스트로서의 자아 탐구라는 대다수 조각의 전통에 비추어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고. 이 ‘껍질’들은 그저 “생기를 얻었다가 다시 비활성 상태로 돌아가는 물질”[12]일뿐인 ‘몸’으로서의 인간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유성이 택한, 석고붕대로 몸을 둘러싸는 방식은 시체를 미라로 봉인하거나
데스마스크를 만드는 과정과 원론적으로 유사하다.
이렇게 존재가 소거된 후 발생되는 몸, 즉, 죽음 이후의 몸 또는 사물로서의 신체의 문제를 건드린다(이 또한 피부를 상기시키며 접촉한다). 시체는 물건이기에 성스러움을
가진다고 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인체 또한 물건의 범주에 들어갈 때 역설적으로 우리가 신체에 대한 권리를
견고한 토대 위에 정초할 수 있다.[13] 애초에 ‘껍질’이라는 조형은 작가가 작업실을 방문한 가까운 친구들의 손, 발, 얼굴을 가볍게 떠내봤던 “사소한
의례”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번 전시에서 한 사람의 신체 구조와
행위 조건에 바탕해 몸 이미지를 조각내는 작업 언어가 되었다. 파편이 된 몸은 전신과 비교했을 때 전인성보다는
사물로서 몸을 인식하게 한다. 인격적인 것을 상실했을 때, “그렇게
만들어진 텅 빈 껍질”로서 몸의 가치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글/ 김진주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1] (2022,
N/A, 기획: 예뻬 우겔비그), 기획전 《트랜스포지션》 (2021, 아트선재센터, 기획: 김해주), 소민경x이유성 2인전
《대사관》 (2021, 카다로그 스페이스)에서 전시했던 작품
대부분은 인간의 신체를 재현하고 있지 않지만, 어떤 신체적 특성(체적, 뼈대, 동세)으로 읽힐
수 있는 요소를 가졌다. 다만, 진짜 인간의 형상이 등장하는가
아닌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지점이기에 작가가 신체적 탐구를 선행하고 있었다고 증거로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2] 너무
뻔한 묘사이지만, 떠올리면 떡 벌어진 어깨너비 A자로 단단히
세운 남성 신체, 그 수직의 정점에 놓인 서부의 바람을 품은 듯 유려한 곡선의 모자와 양 바지 주머니
춤에 걸쳐있는 총기가 만드는 복식, 말등에 올라타 정조준한 눈빛 같은 것이다.
[3] 예수
또한 목동이었다. 예수의 외양을 카우보이로 바꾼 짤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4] 퀴어
카우보이에 관한 연구로 이 책 Chris Packard, “Queer Cowboys”(Palgrave
Macmillan, 2016)을 발견했다. 대중문화에서 퀴어 카우보이의 등장에 관해서는
이 기사를 참조. C.S, Harper, “Why the cowboy has always been queer
as folk in pop culture,” May 23, 2023, Alternative Press,
https://www.altpress.com/queer-cowboy-pop-culture-history-explained/.
[5] 2021년에서 2022년 무렵 영미권 대중문화에서 중년 남성배우를 팬덤에서 베이비걸(babygirl)로
부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배우로 “나르코스”에 출연한 페드로 파스칼(Pedro Pascal)을 들 수 있다. Gavia Baker-Whitelaw, “What does babygirl mean? And why does it
refer to middle-aged men?”, May 10, 2023, Daily Dot,
https://www.dailydot.com/unclick/what-does-babygirl-mean-men-fandom/.
[6] 질량을
다루는 조각가가 마치 황야에 홀로 서서 세상의 무게를 견디는 듯한 카우보이같아 하는 말이었을까? 카우보이에
내포된 성별은 조각가 각각의 젠더나 섹슈얼리티와 무관할까?
[7] 이유성의
작업에서 배반을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조형에서 드러나는 초현실성이다. 그에 비하면 이번 작품들은 조형적
특성에서 매우 현실적인 틀(인체)의 영향력을 끝내 지울 수
없다. 쪼개져 손과 손이 포개져 있거나 음이 양이 되거나 변주가 없지는 않지만, 보는 사람은 여전히 인간의 형상을 놓지 못할 것이다. 초현실성에서
인간 형상으로 점프한 점에 가치를 둘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초현실적 요소가 있다고 보결할 것인가. 둘 다 흥미롭지 않은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8] 디디에
앙지외, “피부자아”, 권정아, 안석 옮김(서울: 인간희극, 2008), 42.
[9] 레거시
러셀,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다연 옮김(서울: 미디어버스, 2022),
109-111.
[10] 조르조
아감벤, “행간”, 윤병언 옮김(서울: 자음과모음, 2015),
154-159.
[11] 이하
본문에서 별다른 인용 출처 표기 없이 따옴표로 표시된 부분은 이유성 작가의 말-글로, 대부분 작가가 구글 독스로 공유해 준 작가노트에 있는 내용이다. 2023.
7.
[12] 장-피에르 보, “도둑맞은 손”, 김현경
옮김(서울: 이음,
2019), 128.
[13] 장-피에르 보, “도둑맞은 손”,
4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