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s
《경험의 아치》, 2023.07.07 – 2023.07.23, 갤러리인
2023.07.06
갤러리 인
Installation
view of 《Arch of
Experiences》 © Gallery IN HQ
이상한 사랑, 멀리 바라보는 길
“우리가 언젠가 생명에 대해서 쌓은 지식을 모두 발휘해서, 그 밑에 서면 다른 생명체가 되는 체험을 해 볼 수 있는 ‘경험의
아치(Arch of Experience)’를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승 기류를 타고 안데스 산맥 위로 솟는 콘도르의 즐거움을 느껴 볼 수 있다면, 우리가
가장 미워하는 적의 마음에 깃든 두려움을 느껴 볼 수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1]
‘경험의 아치’는 천문학자 앤 드루얀이 상상한 개념으로,
‘비인간 존재 되기’를 경험적으로 가능케 하는 도구를 가리킨다. 그는 모든 생명의 근원적 연관성을 이야기하면서, 생명체 간의 상호
이해를 꿈꾸며 이러한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을 본 후 첫 번째 감상은 의문이었다. 다른 존재가 ‘되어 본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는 불충분한 어떤 상태일 텐데, 과연 누가 지금껏 인간의 관점으로만 살아올 수 있었던
뇌와 몸을 넘어설 수 있을까? 나와 조금 다른 인간도 이해하지 못하는 와중에, 진정한 의미에서 다른 생물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선 이러한 소망이 불가능하고 이상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출발해 보기로 한다.
여기 모인 6명의 작가들은 비인간 존재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 관심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대상이나 방법은 각기 다르지만
마음의 결은 서로 맞닿아 있는 듯하다. 사마귀나 뱀을 기르고 싶어 하는 사람, 죽어 있는 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시공간의 격차로 인해
만날 수 없는 고생물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 나와 관계 맺은 동식물을 사랑하지만 실은 적극적인 환경운동가도
채식주의자도 아닌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록, 대단한
사회(과학)적 실천이라기보다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경한 존재들과
관계 맺고 있는 모습들이 모아졌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감정을 ‘이상한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나와 다른 존재를 아끼고 조심스러워하며, 동경하거나 애정하는 이런
마음은 사실 일방향 소통, 외사랑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그들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전달될
수도 없는 애정, 아마도 굉장한 오해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고 끝까지 온전한 이해에 이르지 못할 마음은
어찌 보면 쓸쓸하고 무상하기까지 하다.
현재로서는 나와 다른 ‘OO 되어 보기’를(온전한 사랑을) 가능케
하는 마법의 도구는 없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 중 그와 가장 비슷한 건 아무래도 예술인 듯하다. 각자의 예술 매체를 경유한 탐구와 표현이 여기서는 ‘경험의 아치’가 된다. 이를테면 OO에
관한 시를, OO과 나 사이에 놓인 박물관의 유리를, OO의
움직임을 생경하게 기록한 머이브리지의 사진을 경유하여, 이상하고 왜곡된 상태에서 그들을 보는 것이다. OO은 어떤 매체를 통해 통제되어 있는 것 같지만 온전히 내 손에 있지 않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한 탄식과, 자신만의 보는 방법을 정교화해 나가는 기쁨이
동시에 교차한다. 이건 이상한 소통 방식이다. 결코 온전한
소통이 될 수는 없지만 OO을 바라봄을 통해서 내가 확장되어간다.

Installation
view of 《Arch of
Experiences》 © Gallery IN HQ
이번
전시에서는 여러 작가들이 날개 달린 생물을 다룬다. 새들은 가장 자유로운 순간에는 우리 곁에 머물지
않는다. 생기 있는 그들의 모습은 간신히 포착될 수 있을 따름이며, 그래서
움직이는 새의 도상은 우리에게 마치 미지의 전령처럼, 설명할 수 없는 시적인 이미지처럼 다가오곤 한다.
(거의) 모든 사랑은 그 대상에 대한 오해와
왜곡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무의미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실패하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나아가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비인간 생명을 향한 사랑은 “자기 가족이 느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고 더 멀리 바라보는” 시야를
통해 적어도 “진정한 포유동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2] 우리와 닮은 존재들로부터 시작해 보이지 않는 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비인간들을 차츰차츰 사고의 대상으로
만들어 나가야만, 비로소 나와 다른 인간 정도는 간단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1] 앤 드루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20), 266쪽.
[2] 다와다 요코, 『눈 속의 에튀드』(최윤영
옮김, 현대문학, 2020), 375쪽 참고. “ ”안의 표현은 동물원에서 나고 자란 북극곰 크누트가 그의 사육사이자 ‘어머니’인 인간 남성 마티어스를 존경하는 이유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다.
글 김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