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원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와 쾰른 미디어 예술대학에서 수학했다. 아라리오갤러리
전속 작가로, 서울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원성원의 작업은 ‘어디에서 온 이야기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초기 작품 〈My Life〉(1999)는 2×4m의 작은 방 안 물건들—약봉투, 엄마의 편지, 양말, 빵조각—을 628장의 사진으로 기록한 뒤 한데 엮어낸 작업으로, 작가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사소한 단서들을 시각적 서사로 전환한 출발점이었다. 이 작업을 기점으로 그의 관심은 거창한 개념보다 “내가 실제로 붙들고
있는 삶”으로 옮겨가며, 작은 방과 그 안의 사물, 개인의 기억이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이후 ‘공간과 욕망’은 작가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는다. ‘드림룸(2000–2004) 연작에서 그는 자신과 친구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방을 구현하기 위해 전 세계를 다니며 이미지를 채집하고, 실제 원룸 사진 위에 늪, 바위, 원시림 같은 풍경을 합성해 비현실적인 공간을 만든다. 〈드림룸-성원〉(2003), 〈드림룸-티나〉(2000)처럼 좁고 답답한 현실 공간과 “안에 깔려 있는 욕망의 풍경”을 겹쳐 놓는 방식은, 이후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현실과 상상을 동시에 보는 시선—을 예고한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주제는 점차 자신에서 주변인으로, 다시 사회 구성원 전체로 확장된다. ‘Tomorrow’(2008) 연작과 전시 《Tomorrow》(대안공간 루프, 2008)는 가족·친구·동료의 일상적 에피소드에서 출발해, 과거·현재·상상된 미래가 뒤얽힌 가상의 마을 풍경을 만든다. 개인전 《1978년 일곱 살》에서 선보인 ‘일곱 살’(2010) 연작은 7살
때 엄마와의 첫 분리 경험을 조카와 나무를 통해 다시 재구성하며, 개인의 트라우마를 치유의 서사로 전환한다. 여기서 어린 조카는 7살의 작가를,
나무는 부재한 엄마를 상징하며, 자기 삶을 다시 쓰는 과정이 타인의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10년대
이후 그는 개인의 서사를 넘어 ‘사회적 주체’의 정체성과
감정 구조로 시선을 옮긴다. 개인전 《타인의 풍경》(아라리오갤러리, 2017)에서 선보인 〈금융인의 돌산〉(2017), 〈언론인의 바다〉(2017) 등은 공직자, 언론인, 금융인
등 특정 직업군을 돌산·바다·동물 군집으로 치환하며 “직업이 사람의 삶과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묻는다.
《모두의 빙점》(뮤지엄한미, 2022–2023)과 《들리는, 들을 수 없는》(아라리오갤러리,
2021)에서 이어지는 근작에서 그는 ‘성공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하는 우월감과 열등감, 느슨한 관계망과 불안한 심리 상태를 얼음 산과 나무, 물방울, ‘보통의 느슨한 관계망’으로
시각화하며, 동시대를 사는 개인들의 심리적 풍경을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다룬다.
형식적으로 원성원의
작업은 사진 기반 디지털 콜라주이지만, 내용 면에서는 회화·설치·문학적 서사가 겹쳐진 복합 장르에 가깝다. 그는 나무 한 그루를 60컷으로 나누어 찍을 만큼 세밀하게 대상을 기록하고, 수백~수천 장의 이미지를 한 화면에 결합해 한 편의 ‘이미지 소설’을 구성한다. 〈My Life〉가
방 안 사물의 배열을 통해 하나의 설치 공간을 만들었다면, 이후 작업에서는 이 설치적인 감각이 가상의
풍경 안으로 흡수되어, 화면 자체가 하나의 무대이자 세계가 된다.
‘드림룸’, ‘Tomorrow’, ‘일곱 살‘(2012) 등의 연작에서 이미지는
늘 “어디선가 본 듯한 현실의 파편”이지만, 그 조합 방식 때문에 전혀 다른 층위의 세계로 보인다. 〈일곱 살-카오스 부엌〉(2010), 〈일곱 살-진달래밥과 들국화국〉(2010), 〈일곱살 – 오줌싸개의 빨래〉(2010) 등에서 부엌, 계단, 마당 같은 일상 공간에 과잉된 사물과 동식물, 기묘한 스케일의 나무와 꽃이 겹쳐지면서, 익숙한 장면이 동시에 불안과
위안을 품은 심리적 공간으로 변형된다. 이때 서사는 텍스트 없이도 충분히 전달되며, 동화책처럼 장면마다 감정의 기승전결이 배치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콜라주 방식은 점점 더 복잡하고, 동시에 더 추상적인 방향으로 진화한다. 《타인의 풍경》의 〈금융인의 돌산〉에서 황량한 돌산·헐벗은 나무·늘어진 전깃줄·전구가 직업적 욕망과 불안, 자본의 흐름을 상징한다면, 《모두의 빙점》에서의 얼음 산과 〈원래
있었던 풀〉(2022), 《들리는, 들을 수 없는》의 〈방대한
물방울〉(2021), 〈보통의 느슨한 관계망〉(2021)은
더 이상 구체적인 인물이나 직군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얼음, 물방울, 가지, 풀, 느슨한 네트워크 같은 모티프들이 “잘 다루지 못한 열등감”, “위태로운 유대감”, “꽝꽝 언 상황 속에서도 자라나는 의지”를 은유하며, 내용은 심리와 정서의 레벨로 옮겨간다.
그의 화면이 주는 특유의
이질감은 기술적인 선택에서 비롯된다. 실제 풍경을 촬영하지만, 하나의
장면을 한 컷으로 찍지 않고 수십 컷으로 나누어 홈처럼 이어 붙이기 때문에, 원근법과 시점이 약간씩
어긋난 ‘불가능한 풍경’이 만들어진다. 그림자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 탓에 화면은 평면적으로 보이면서도, 그
안에서는 수많은 시간과 계절, 높이와 거리의 차이가 동시다발적으로 공존한다. 수만 장의 촬영, 수천 장의 선별,
수천 개 레이어의 수작업 조합, 하루 10시간에
이르는 노동은 디지털 이미지라는 비물질적 매체 안에 다시 아날로그적 시간성과 육체성을 불어넣는다. 이처럼
형식과 내용은 늘 맞물려 있다. “숲이 아닌 나무의 이야기”라는
그의 말처럼, 화면 속 숲은 실제 나무들의 집합이 아니라, 수천
개의 편집된 조각이 만들어낸 관계의 총합이다.
원성원은
동시대 한국 사진·이미지 작업에서 구성 사진과 이야기가 있는 이미지의 독자적인 지형을 만들어온 작가다. 다큐멘터리 전통이 강했던 한국 사진사 안에서, 그는 현실을 직접
기록하기보다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풍경을 촬영해 다시 조합함으로써,
“실재에 기반한 허구”라는 중간지대를 구축했다. 〈My Life〉 이후 20여 년간 이어진 그의 작업은, 사진이 더 이상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서사적·심리적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 태도는 수상 경력과 기관 소장 이력에도 반영된다. 《타인의 풍경》, 《모두의 빙점》, 《들리는, 들을
수 없는》 등 개인전을 통해 공직자·금융인·언론인 같은 사회적
타인,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 성공한 이들의 내면 구조를
다뤄온 그는 2025년 제23회 동강사진상 수상자로 선정되며
동시대 한국 사진의 중요한 축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 등 국내 주요 미술관뿐 아니라 오스트하우스미술관(독일), 산타바바라미술관(미국), 모리미술관(일본) 등 국제적인 기관에 소장되며 다양한 맥락 속에서 읽히고 있다.
원성원의
작업은, 축적된 서사성과 정교한 콜라주 형식을 바탕으로 더 넓은 국제적 맥락에서 읽힐 수 있는 확장
가능성을 지닌다. 열등감·우월감, 불안과 관계망, 직업과 정체성, 어린
시절의 상처와 성인의 자기 이해 등 그가 다루는 주제는 특정 국가나 세대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직업군·제도·가족 구조를 촘촘한 상징 코드로 배치하는 방식은 로컬한 맥락을
잃지 않게 한다. 그는 앞으로도 ‘사회적 주체와 집단, 심리 구조를 다루는 확장된 서사’를 이어가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새로운 장면을 덧붙이는 작업을 지속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Installation view of 《Here's Tomorrow's Weather Forecast》 © Pohang
Museum of Art
“지구에
산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Nicolas Bourriaud-
포항시립미술관에서는
우리가 직면한 세계를 돌아보고자 《내일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를 개최한다. 이 전시는 기상관측, 날씨 예보에서 착안하여 ‘내일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평범한 문장에 담긴 일상적 예측의 의미를 헤아리고, 정교해진
예측과 압도적 변수로 점철된 오늘의 세계를 감각하는 작가들의 인식을 살핀다. 그러면서 전 지구적 기후
변화를 감지하며 갖게 된 인간의 상념, 그 이상을 생각하려 한다.
우리는
삶을 예측할 수 있을까? 삶은 많은 변수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모든 상황을 정확히 예측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과학적
접근, 통계모형 등을 사용하여 특정 사건, 상황이나 경향을
끊임없이 예측해 왔다. 물론 여기에도 여전히 확률적 변수가 발생시키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만국의 지속적인 협력과 고도의 기술 집약으로 정확도는 더욱 높아지고, 인공지능까지
합세한 기상관측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사실 날씨를 예측한다는 것은 인간이 지상의 삶에 적응해 나가면서
발전시킨 가장 위대한 능력에 속한다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쏟아내는
일상적 예측 차원에서 일기예보는 우리에게 일상적 결정을 효율적으로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또
이 세계의 복잡성을 직감적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예컨대 출근길, 등굣길에
우산을 챙기는 것부터 날씨에 적합한 옷을 고르거나 교통 상황을 예상하기까지, 또 한낮의 뙤약볕을 미리
피곤해하기도 한다. 허나 우산은 필요 없고, 예상보다 복장이
거추장스럽거나 가벼웠던 것처럼 그냥 넘길, 빗나간 상황은 즐비하다. 하지만
역대 최장 폭염과 열대야를 기록하고, 아프리카에 눈이 내리며, 저
멀리 어느 도시들에서 최악의 폭설과 한파로 대규모 정전이 발생하는 등의 사태는 모두 예상 밖의 일이다. 전례
없는 기상현상은 예측 오류의 수용범위를 이미 뚫고 나갔다. 여기서 우리의 불안은 불타오른다.

우리는 경험에서 습득한 정보로 세상을 파악하고 인식하기 십상이다. 기후 변화만큼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현실을 이토록 생생하게 가리키는 지표도 없다. 날씨는 더 이상 비 오고, 눈 내리고, 바람 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을 문명으로 뒤덮으며 우리는 유토피아가 실현되리라 믿었다.
이
믿음은 이제 위태로운 세계로 등장한다. 이에 전시는 인간이 만든 변수와 변수 간의 상호작용으로 가득한
삶을 느끼며, 불안한 짐작 위에서 전개된다. 여기 함께하는
작가 9인으로부터 탄생한 시간에서 익숙한 자연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며,
주름지고 뒤엉킨 세계를 직감한다. 그들은 세계를 재현하지 않고 환기하고, 상징하지 않으며 현실을 포착한다.
태양은 어김없이 뜨고, 달도 어김없이 차오른다.
그러나 ‘내일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이 일상적 구절이 갖고 있는, 내일이 존재한다는 당연함은 이제 더 이상 어제와 같은 평온한 내일이 되리라는
기대와 안심이 아니다. 이는 어쩌면 오늘의 시간에서 내일을 살도록 만든, 위기감으로 가득한 현실의 불안과 공포다.
삶을 예측할 수 없는 인간
능력의 한계, 오늘과 내일, 현재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희망과 안도, 긴장과 불안 등으로 우리는 이제 공동의 문제를 상기한다.
완결된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는 피폐한 시선을 거부하며 우리는 미래를 기대하고, 예측한다. 실은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은 인간이었지만 내일은 자연이라는 것을.

#1. 그러한(풍경)
낯설지 않은, 그러한 풍경은 오히려 ‘나’를 향한다. 자연의 밀도, 문명의
향연을 따라 미끄러지는 야릇한 행복감, 그 사이를 비집고 스며드는 불안감은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오늘 생각하는 내일은 어떠한가. 내일의
당연함은 누구의 꿈인가.
#2. 불안한(정황)
삶의 찬란함도 자연의 웅장함도 신음하는 지상에 있다. 여기 불안과 공포를 직감하게
하는 정황이 있다. 우리의 행위로 우리의 삶을 훼손하는 것을 지켜보던 두려움은 분노로 뒤덮인다. 오늘로 내일을 삭제하는 공간에서 우리는 위태로움을 감지한다. 우리는
운명공동체다.
#3. 유사한(자연)
자연과 문명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오늘에 서서 내일을 사는 우리, 예측은 미래를 선사하나 완성되지 않는 세계로 존재한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 모호하고 흐릿한 그 간격, 거기에 유사한 자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