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Kawah Ojol ©Hyun Nahm

이미지와 조각: 사회적 풍경의 조각

현남 작가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의 첫 개인전, 〈카와 오졸 Kawah Ojol〉의 전시 비평을 위해 지난여름, 그가 초대한 작업실을 방문한 날 목격했던 풍경은 아직도 뚜렷하다. 악몽을 꾸는 듯한 황폐한 폐허,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무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싸구려 SF영화의 세트장 같은 모습을 한 이어지는 풍경. 그 풍경 속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류센터나 배송기지, 폐기물 처리장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가 왜 자신의 조각 작업을 풍경이라고 고집스럽게 명명하는지 어쩌면 짐작할 수 있겠다는 짐작이 들었다. <카와 오졸> 역시 풍경을 향해 나아간다. <카와 오졸>은 현남의 인도네시아의 여러 곳을 방문하며 리서치를 통해 획득한 여러 정보와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찾은 사회의 삶의 구조를 매핑(mapping)하려는 인류학자처럼, 자신이 연루된 사회의 모습을 풍경으로 매핑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각적이면서도 물질적인 풍경이다.

현남은 자신의 작업 공정을 ‘채굴’이란 낱말로 묘사한다. 그것은 다양한 재료들을 캐스팅하거나 몰딩할 때 나타나는 우발적인 형상을 자신의 시각적 언어로 택하는 과정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채굴은 작가에겐 작업실에서 산업 소재를 녹이고 그것에 다른 재료를 흘려 넣고 굳히고 하는 등의 일련의 조형적 행위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관조적 완상(玩賞)의 경험을 누리며 돌에 자연을 둘러싼 관념적인 이미지를 투영하는 수석에 채굴이란 말을 짓궂게 이어 붙일 때, 현남은 그러한 광물이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것임을 명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산업 생산물의 원료가 된 희귀금속은 지난 수십 년간 열광적인 채굴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희토류, 게르마늄, 안티몬, 갈륨, 코발트, 탄탈 같은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광물들이 미래 세계를 만들어갈 자원이라는 소식을 자주 듣고 있다. 그러한 광물은 채굴되고 정제되며 개발되고 운반, 유통, 판매된다. 어떤 한 톨의 자연에도 사회적인 것이 스며있지 않은 게 없다. 그렇기에 채굴은 단순히 심미적 행위를 우아하게 표현하는 겉치레 같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다루는 조각적 재료와 그것이 갖는 형태적 잠재성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조각의 언어를 향한 비판적 접근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객체?

조각에서 기대하는 미적 경험이 더 이상 ‘이미지로서의 조각’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조각의 언어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전환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이미지일 풍경을 참조하며 풍경으로서의 조각을 제작한다는 주장은,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단(stylobate)이나 좌대 위에 놓인 조각은 상징이거나 도상으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물질적 객체의 모습을 띤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의미를 담고 있고 관객은 이를 감각하며 혹은 이해하며 미적인 경험을 즐긴다. 이것이 적어도 미술사에서 미니멀리즘 이전의 조각에 관한 정형화된 생각이었다. 조각은 물질적 객체이지만(이를테면 그것은 돌덩어리이거나 금속 뭉치일 뿐이다) 그것을 숨기고 세계를 상징화하는 의미를 지닌 미적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접근한다. 그러므로 조각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 즉 물질이 아니라 그것이 짊어지는 형태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조각에 대한 이런 생각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를테면 미니멀리즘 조각을 대표하는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말을 빌자면 ‘특정한 객체(specific objects)’는, 조각에 어떤 상징주의나 형이상학적 관념도 제거하길 요구했다. 그리고 주관적 의미의 흔적을 샅샅이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손수 제작한 조각(저자성의 흔적이 담긴)이 아니라 대량 생산된 산업 생산물을 사용하길 선호하기도 하였다. 저드는 조각은 물론 회화는 모두 3차원적이어야 하며, 이들은 ‘특정한 객체’로서 주변의 다른 3차원적 객체(벽이든 기둥이든 바닥이든)와 동등한 자격으로 관계를 맺으며 이를 통해 그 객체에 관한 현상학적인 경험을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제 조각은 훗날 설치라고 부르게 될 무엇으로 변신하였다. 한편 이러한 의미와 상징으로서의 조각에 대한 강한 반동은 형태가 아닌 물질성을 역설하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아마 이를 요약하는 것이,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의 「반-형태(Anti-Form)」라는 글에서의 주장일 것이다. 그는 객체성을 주장하는 미니멀리즘 미술이 정작 물질적 특정성에 무관심한 것을 지적하며 여전히 형태에 예속된 미술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미니멀리즘은 다시 프로세스 아트로 전환하였다. 그는 저드의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러한 그 객체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말끔히 씻어내길 주문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각과 그 이후의 과정을 요약하는 표준적인 미술사적 서사를 떠올리자면, 다시 조각이 이미지가 되길 주장하는 현남의 접근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승화와 탈승화

현남의 <카와 오졸>은 두 개의 극을 순식간에 연결하는 작업을 제시한다. 두 개의 극이란 동시대 자본주의의 공급 사슬을 형성하는 양극단, 채굴이라는 최초의 과정과 흔히 업계에서 풀필먼트 서비스(fulfillment service)라고 부르는 최후의 소비자 배송, 두 과정을 가리킨다. 물론 그사이에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생산과 유통의 과정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채굴과 배송이라는 두 가지 실천은 어슴푸레 우리 주변을 에워싼 수많은 상품이 생산되는 사회적 과정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물론 우리는 글로벌 가치사슬이라는 관념을 통해 사회적 생산과 유통의 과정이 어떤 돈벌이가 되는지를 알 뿐이다. 말하자면 희귀광물이 집적된 손안의 휴대전화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어느 브랜드에 어떤 사양, 얼마짜리 제품인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를 승화(sublimation)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상품은 특정한 쓸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오직 그것이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주기에, 그것이 흔히 화폐로 표시되는 가치를 늘려주기에 그것은 생산된다. 그렇기에 상품이 오직 가치를 지니기에 생산된다는 것은 그것에 깃든 소재, 즉 물질적 객체성을 외면하고 이를 추상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떤 물질적 객체들이 상품이 된다는 것은 곧 그것을 가치로 추상화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물질을 승화하여 가치라는 추상적 대상으로 변환시킨다.

그런데 이는 또한 조각의 원리에 빗대어 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저드가 조각을 의미의 상징적 구조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객체’로 바라볼 것을 주문했을 때, 그의 몸짓은 ‘탈승화’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의미와 같은 추상적 가치로부터 벗어나 그것이 물질적 객체로서 다른 객체들과 연합하여 형성하는 감각적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조각의 목표라고 주장했으니, 그에 어울리는 말은 ‘탈승화’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객체성이나 물질성으로의 귀환이라는 탈조각적 충동은 얼마간 위선을 포함하고 있다. 피터 R. 칼브는 이렇게 말한다.: “저드는 금속판 가공사(社)인 번스타인 브라더스(Bernstein Brothers)와 철판 모서리를 가공하는 틴스미스(Tinsmiths)를 방문했고, 롬하사(Rohm-Hass)의 플렉시글라스를 얼라이드플라스틱(Allied Plastics)사(社)에서 잘라낸 후, 갈바녹스(Galvanox) 도료의 아연을 연구하고 라박스(Lavax) 페인트로 마감하는 공정을 거쳤다.”

저드는 다양한 ‘상품’을 활용하여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작업의 과정은 그가 공언했듯 탈승화의 과정, 그것에 객체성을 지각하도록 하는 과정이었다기보다는 사회적 생산물로서의 상품을 ‘특정한 객체’로 재승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상품으로서의 산업적 생산물을 조각적 객체로서 재의미화하며 그것의 상품으로서의 물질성을 떼어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심미적 가치를 지닌 객체, 물질이라는 의미를 불어 넣는다. 그는 조각을 어떤 주관성으로부터 분리된 투명한 객체, 물질적 실재로 다루고 있다고 선언하지만 즉 그것을 탈-승화(de-sublimation)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가 행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적인 물질적 객체인 상품을 미적 객체로 재-승화(re-sublimation)하고 있었던 셈이다. 현남은 그러한 승화와 탈승화의 과정, 정치경제학의 용어를 빌자면 소재(내용)와 가치(형태) 사이의 모순적인 운동을 조각의 언어 속으로 도입한다. 조각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작업에 탁월한 작가로 현남의 작업을 호평하는 것은 그의 조각 프로젝트에 대한 오해일 것이다. 그는 물질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분리될 수 없음을 분명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흔히 글로벌 공급 사슬이라 부르는, 전지구적인 생산과 유통의 네트워크 속에서 움직이는 물질로서 언급한다.

그가 <카와 오졸>에서 다시 방문한 기지국 조각 및 사진 설치 작업 연작인 ‘Iram’과 ‘Adhan’은 전시장을 메우고 있는 유황 채굴과 배송 노동의 세계를 연결하는 물질적 장치이자 회로의 알레고리일 것이다. 그것은 글로벌 공급 사슬의 현기증나는 공간적, 시간적 차이를 연결하는 하부구조(infrastructure)이자 도시의 풍경 속에 추가된 새로운 풍경의 단편이다. 근년 그의 관심사가 된 설치 작업의 연장인 ‘Chain Link Strategy’는 전작인 ‘연환계’를 반복하면서 직접적으로 그러한 공급 사슬의 아슬한 사슬을 암시하며, ‘Erupted’은 그 공급 사슬에 얽힌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정치적으로 상징화되는 장면을 지시한다면, ‘The Mine’과 ‘Puppeteer(Archipelago)’는 엄청난 공간적 대위법을 만들어 내면서 채굴의 장소로 조망된 인도네시아 군도의 광막한 풍경과 오젝(ojek)이라는 말단의 플랫폼노동자와 채굴의 미시적 풍경을 대조한다. 그를 통해 그는 조각과 설치가 추방하려 했던 이미지를 다시 도입하고 조각에서 물질과 형태의 변증법을 재조정한다. 그가 동시대 조각 실천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작가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