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규, 〈Dummy No.71, Dummy No.65, Dummy No.77〉, 2021 ©박웅규

총 9점으로 구성된 〈Dummy〉, 이 작품은 불교 회화 〈구상도〉에서 시발됐다. 사람이 죽어서 먼지가 되는 과정을 9가지의 단계로 재현한 〈구상도〉는 ‘욕망의 덧없음’이란 불교 철학의 정수를 다룬다. 그러나 박웅규가 〈구상도〉에서 집중한 것은 그 철학적 내용이 아니다. 그는 육체의 변이 과정을 자신들의 종교적 수에 빗대어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성 그 자체에 의미를 둔 채 작업을 들이팠다. 불교에서 숫자 9의 의미는 지대하여 그 영향은 말 할 수 없이 크며 설령 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그 숫자가 지닌 상징의 힘은 인지하고 있다. 왜 사람이 소멸하는 과정을 9개의 단계로 나눴는지, 박웅규는 불교의 저의에 혼을 담그고 그 담금질을 통해서 작품으로 가는 길항을 더듬어 간다.

제목 ‘Dummy’ 즉 ‘껍데기’란 뜻처럼, 작가는 주로 종교에서 구축해온 다양한 형식(껍데기)들을 빌려와 전혀 다른 것으로 제시하는데 이번 연작은 작가 본인이 주로 다루는 형식・형태・구조 등이 어떻게 그리기의 방식과 연결될 수 있는지 고민했다는 점에서 의미 깊다. 〈구상도〉에서 육체 변이 과정은 크게 형태와 질감의 변화로 구분되는데 작가는 이것이 마치 회화적 표현의 가능성과 같다고 여겼다. 〈구상도〉에서 제시되는, 점차 바스러지고 말라가는 육체가 종이와 먹 그리고 물을 다루는 자신의 작업 특질과 유사하다고 헤아린 것이다.

 사실 사람은 알 수 없는 생명체다.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할 수도 있는 존재이자, 제 어미의 죽음에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 카뮈는 「이방인」의 뫼르소를 통해,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가치를 매기는 것만큼 거창하게 인간적이지 않다고 진즉 지적했었다. 박웅규가 〈구상도〉에서 캐치한 사람(한때 사람이었던 대상)은 바로 뫼르소의 그것과 닮았다. 그의 작품에서 사람은 무조건 존중받아야할 대상이라기보다 그저 담담히 한 객체로 존재할 뿐이니 말이다. 한편 박웅규의 작품에는 대상, 이미지, 공백이 제각각 ‘있다’고 어떤 해석도 원치 않는다는 듯이 바리게이트를 제 몸에 두른 채, 미술은 특히나 자신의 작품은, 사람이 매기는 것만큼 크게 의미심장할 까닭이 없다는 듯 말이다.

2015년 시작된 연작 〈Dummy〉, 벌레나 식물의 기이한 형태, 또 피부 염증 같은 혐오스러운 대상들을 성화의 방식으로 그려내는 그림은 공교롭게 시작됐다. 어린 시절, 집에 가득 찬 가톨릭 소품들은 작가에게 호감이기보다 반복적이고, 강박적인 일종의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벌레 시체를 발견한 그는 엄청 징그러우면서도 양쪽이 대칭으로 자잘하게 나누어져 있는 몸의 구조와 형태에서 성화를 떠올렸다. 이후 벌레에서 발견한 특이한 구조나 형태를 신화 혹은 종교적 방식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혐오, 더러움, 부정함을 주제로 다양한 작업을 해왔으나, 이 시리즈에 이르러 작가는 비로소 ‘지속적으로 연작을 이어가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그간 〈Dummy〉 작업을 통해 표현의 틀이 어느 정도 양식화됐음을 깨달은 작가는 신작을 통해 그리기의 방법론도 구체화한다. 그것은 단순히 기계적 그리기 방법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화풍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 작가는 그려지는 질감의 양태가 형태의 성격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형식을 만든다는 기존의 회화적 개념을 기본으로 깔아 농익혀 놓았다.

박웅규의 작업은 종교와 긴밀하게 맞닿아있다. 실제 어떤 특정한 종교의 교리와 연관되는게 아니고 추항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지만 일정 부분 종교의 언어로, 형식으로 작업을 풀어내는데다 각색된 내용으로 그는 종교를 힐난하기도 하니 결코 무관하지 못하다. ‘부정한 것’을 뼈대 삼아 ‘신성한 것’의 형상을 덧씌우기도 하고, 그 반대로 ‘신성한 것’ 위에 ‘부정한 것’의 피부를 뒤덮기도 하며 작업 안에서 이 두 가지를 저울질하는 작가는 세밀하고 강박적인 묘사로 수행하듯 그림을 완성한다. 이런 작가의 태도는 ‘부정한 것’을 그리면서 즐거워하는 찝찝한 마음을 상쇄시키는 일종의 장치이자, 그 자체로 부정한 태도로써의 양식이기도 하다. 실제로 종교에서는 고통이나 고난을 반복적으로, 게다가 스스로 자처해서 수행하고 그 끝에서 마침내 종교적 구원(카타르시스)에 이르게 되는데, 그는 이러한 종교적 수행의 방식이 매우 불건전하고, 변태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작가의 태도는 작품의 형상뿐만이 아니고 질감으로도 이어진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 장지와 먹은 반복성에 따라 전혀 다른 물성으로 완성된다. 그리는 만큼 표면에 흔적이 남는 것이다. 캔버스와는 달리 붓이 지나갈수록 종이가 상하고, 상한 종이와 스며든 먹물은 그 어떤 바탕재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질감으로 남는데, 종이가 상할수록 먹의 발색이 더 깊고 풍부해지는 모순을 작가는 의도한다.

더럽고 야한 원초적 본능을 고스란히 응축해 2016년 영상작업 〈객마신경〉을 만들었듯, 박웅규는 이야기를 극단으로 치밀기도 하고 어렴풋하게 감추기도 하며 일관된 이야기를 푼다. 신작으로 이어진 〈Dummy〉 외에도 〈가래〉 시리즈나 전혀 공개되지 않은 다른 작업들 모두 하나의 맥락으로, 각각 소재도 매체도 다르지만 언제나 같은 것들에서 발원하고 얽매인 사투로, 어릴 때부터 작가가 기민하게 반응했던 알레고리를 재현하는 것이다. 도처에 널린 대중문화의 이미지 또한 자신이 꾸준히 제기하는 ‘부정성’의 양가적 태도로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낸 〈객마신경〉은 작가의 일관된 태도와 관념의 활화임을 증명한다.

개인적인 성향 몰아의 경지에서 출발한 작업들을 통해 피상적 거대 담론을 다루거나 사회적 발언을 한다기보다, 개인의 밑바닥에 위치한 과녁 같은 감정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박웅규의 작업은 화살촉을 가는 전사처럼 비장하다. 허나 그는 작업의 주제의식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고 발화하고 있는지는 끊임없이 뒤엎고 자문하며, 자신의 작업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껍질에 불과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껍질의 환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파헤쳐 말하려 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 감정이 말라버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마음속에 감추어둔 유토피아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예술은 그 유토피아를 현실에 내뱉고 이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이어주는 중계자 역할을 한다. 관람객들은 작가가 재구성한 상상의 산물 사이를 거닐며 인간 내면의 세계에서 주물 된 빛나는 사고들을 경험한다. 무미건조하고 찍어낸 듯한 일상을 지내는 이들에게, 그러니 예술은 오아시스인 거다. 박웅규의 작품도 그렇다. 차마 불순해 드러내지 못했던 것들을 처연하고 숭고하게 재현한 그의 작품들은 감췄던 사고를 우아하게 대변한다. 그가 완성한 이상야릇한 하모니를 즐기면서, 복잡한 의도 파헤치기의 답은 나중으로 돌려버리는 건 어떨까.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