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화된
사물과 기계화된 신체의 분해, 해체, 그리고 이것들의 낯선
병치로 초현실적 풍경을 펼쳐왔던 이재석의 회화는 최근 들어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최근작〈Linkage(○―○―●―○―○)〉(2024)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겹겹의 산을 화면 전체에 올오버로 그린 회화 〈Linkage(○―○―●―○―○)〉는
작가가 고수하던 고정된 단일시점에서 벗어나 복수의 위치, 복수의 시점이 동시에 공존하는 화면 (mapping)으로 전면화되었다. 모든 위치가 동시에 존재하는 지도형식의
화면이다. 그래서 화면은 납작하게 패턴화, 단순화된 산과
골짜기, 하천 등의 지형으로 위계 없이 이루어져 추상적 회화처럼 보인다. 한편, 화면 아래 근경은, 마른
흙바닥과 여름풀 꽃 한 송이를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어떤 생명도 자랄 수 없는
척박하고 마른 흙, 수분 없는 땅에서 힘겹게 홀로 핀 개망초는 멀리 보이는 산골짜기 하천 등의 집단적
짙은 푸르름 사이로 강조되고 있다. 이재석 특유의 장기인 트롱프뢰유 기법의 활용 역시 여름풀 꽃의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배가시켜 화면은 더욱 신비롭고 초현실적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 비행기에 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종류의 그림이었다. 기구를 타고 구름 높이 위로 올라갈 때 … 고요한 파란 하늘이 얼핏
스치는 안개 사이로 보이는 … 높이까지.”
무한히
단조로운 평면과 비장한 여름풀 꽃의 정교한 묘사가 대비되는 화면 속 공간은 작가에 의해 고안되고 구성된 대안적 현실이자 장소이며 우리가 고투(struggle)하며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은유다. 그러고 보면 컴퓨터
게임기를 켜면 언제고 마주할 수 있는 또 다른 현실, 가상의 공간, 장소와
같다. 비행기 탄 사람만이 볼 수 있고 그릴 수 있는 이재석의 산, 골짜기, 하천 등의 지형으로 납작하게 맥락화된 공간은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
(linkage)된 기호 (○)와 기호(○)로
인해 무한히 펼쳐질 월드 와이드 웹(www, 이른바 web)이라는
또 다른 현실과 장소를 가시화한다.
잘
알다시피 1989년 이래 열린 웹에 의한 가상공간은 스위치를 켜고 버튼 혹은 엔터 키를 누르면 여지없이
열리는 또 다른 현실이자 장소이다. 초현실주의 미학을 활용해 과장된 성적 이미지와 공상과학적 형상, 컴퓨터 게임 이미지는 가장 손쉽게 마주할 수 있다.
이재석은
자신이 중학생 시절 게임을 만드는 프로그램에 오랜 시간 몰두했던 경험이 있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 우연한
기회에 인디-게임 회사로부터 제안을 받은 이재석은, 게임
속의 배경, 맵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도트를
찍어 만든 텍스처 타일을 가상의 그리드 위에 배치하고 그 위에 레이어를 만든 후 나무나 풀, 바위 등과
같은 오브젝트를 배치하는 매핑 제작 방식은 항공사진 등으로 만드는 지도제작 방식과 유사하다. 당시의
이 경험은 물리적 공간을 묘사하는 미술가들의 원근법적 관습을 활용하되, 웹/게임에서만 열리는 완벽한 3차원적 환영과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모티프의
결합을 뚜렷하게 대조시켜 화면의 미학적 충격 효과를 증폭시키는 자신의 화면 구성 방식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캔버스라는 화면 안에서 나의 시각으로 바라본 가상의 공간과 그 속에서 상호작용하는(작동하는 듯이 보이는) 이미지들을 보여줌으로써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2 이재석의
전략적 의도의 바탕이 되었다.
여기서
이재석은 화면 속 상징적 모티프로서의 복수 혹은 단수의 자연 혹은 사물 등을 기호로서 좌표화한다. 이들
기호는 작가에 의해 의미 혹은(점)선으로 연결되고, 작가는 현실과 가상, 세계와 세계를 구성하는 링커(linker, linkage editor)가 된다. 구심으로서의 기호(●)가 끌어들이는 중력은 화면 속 지형을 전방위로 연결(―)하는 기호(○) 의 반복적 등장으로 가시화 된다. 마치 거미의 거미줄처럼, 별과 별자리처럼 세계는 그렇게 끝없이 열리고 있다. 전지적 링커
시점으로 맵핑되어 구성되는 게임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현실 세계와 동질적이기도 하지만 이질적이기도
하다.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 시각 반경은 게임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게임 속 화면 이미지의 특성은 이재석 회화 화면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재석의
회화 대부분은 세계의 골격 혹은 모티프의 배치를 결정짓는 ‘규제적 선’들, 즉 그리드 (Grid)가 엄격하다.
초기작인 〈fragment〉(2016), 〈나열된
부품들〉(2018), 〈신체 덩어리들〉(2018)은 물론이고, 링키지 기호가 등장하는 최근 작업〈Linkage(○―○―●―○―○)〉을
포함하여 〈사정거리_3〉(2021), 〈이어진 섬〉(2022), 〈소나무〉(2022), 〈연결과 동시에 분리된 경계〉(2022), 〈별자리_2〉(2023)
등도 예외는 아니다.
〈fragment〉, 〈나열된 부품들〉,
〈신체 덩어리들〉은 마치 프라모델의 낱낱의 부품과도 같은 조각, 분해된 인간 신체와 기계/도형들로 화면을 채우는가 하면, 신체는 기계/도형으로, 기계/도형은
신체로 변환되었다. 이와는 달리 〈사정거리_3〉을 비롯한 〈이어진 섬〉, 〈소나무〉, 〈연결과 동시에 분리된 경계〉, 〈별자리_2〉등은 분해, 해체, 배열되던
여러 모듈 대신에 서로 관계짓고 연결되는 숫자, 문자, 별, 동그라미 등의 기호가 등장한다.
전자의
경우, 사각 프레임 화면 안의 신체와 기계/도형의 수평적
배열에서 보이는 모듈적 규칙성은 두 가지를 함의한다. 첫째는 인간 신체와 사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며, 둘째는 산업화, 국민국가화, 정보화
등 근대적 시스템의 매혹적인 질서가 지닌 모순의 인식이다.
이재석은, 작은 부품들의 구조적 완결이 총의 기능을 강화하듯이 신체 내부 여러 장기의 정상적인 작동만이 건강한 신체를
강화함을 주목하고 있다. 근원적으로 전혀 다른 총과 인간 신체는 작가에 의해 구조적 동일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세계로 유비 (analogy)된다. 그래서 ‘나열된 부품들’과 ‘신체
덩어리들’은 같은 위계에서 분해되고 잘린 채 배열되고 있으며, ‘작업실
풍경’ 속 ‘자화상’은
붉은색 도형/도구의 집적물로 대체되고 있다. 이렇듯 이재석의
일군의 회화는 총과 도형/도구/기계 등으로 대변되는 ‘사물’들을 의인화 내지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로 전면화하면서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시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재석의 회화가 지닌 초현실적 뉘앙스의 환영적인
면모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이미지, 즉 현실의 병치, 그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