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보안1942의 전시 《사이키델릭 네이처》에서
선보인 〈Infinite Light 2〉(2019)부터 2021년 뮤지엄헤드 개인전, 2022년 P21 개인전과 N/A단체전에 이르기까지, 정희민은 전시장에 한 송이 또는 여러 송이의 꽃을 묘사한 그림을 걸었다. 그가
꽃을 만드는 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평평한 판 위에 겔 미디움을 넓게 부어 건조시킨다. 사각의 액체가 고체처럼 마르면 사방을 손으로 당겨 중심으로 몰아오면서 굴곡진 주름 만들기를 반복하며 꽃잎 모양으로
조형한다. 혹은 아예 겔 미디움을 조금씩 붓고 말려 낱장의 꽃잎을 만들고 하나하나 붙여 꽃을 만든다. 때로는 꽃이 될 겔 미디움에 색을 섞기도 하지만, 대체로 반투명하게
건조된 커다란 겔 미디움 면 혹은 완성한 꽃 형태 위에 색면을 UV 프린트 또는 전사를 하거나 캔버스
표면에 색을 칠한 뒤 입체를 얹어 꽃잎 너머로 바탕색이 살짝 비치게도 한다.
2021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기》에는 겔 미디움이
캔버스의 네 귀퉁이로 튀어나온 작업들이 걸렸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22년 P21의 전시 《How Do We Get Lost in the Forest》에서 겔 미디움은 귀퉁이로 연장됨을 넘어 캔버스 뒷면으로까지
넘어가 붙어있기에 이르렀다. 특히 P21에 걸린 그림들은
얇은 겔 미디움들이 여러 겹을 이루며 점진적인 깊이를 형상화했고, 실크 천이 어딘가에 걸려 내려오며
분위기를 만들듯 캔버스 프레임에 걸쳐지면서 캔버스가 걸린 벽까지 자신의 바탕처럼 활용했다.
이러한 실험들은 언뜻 조소의 기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해 점점
조각을 닮아가는 모습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평면의 탐구를 돌고 도는 모양새에 가깝다. 그리고 그 탐구는 유화를 모방한 아크릴의 일, 아크릴의 효과를 극대화한
겔 미디움의 일을 넘어 어떤 특정한 상태가 ‘되어가는’ 일을
모색하는 과정에 당도했다. 정희민이 유화에서 아크릴, 겔
미디움으로 매체의 변주를 시도한 것에는 아크릴이 가진 모방의 성격을 빌리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무언가에게
모체가 있다는 것, 그 진리를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쥐어졌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것이 놓인 상황을 처연하게
만든다. 유화가 되지도 그렇다고 완연히 조각이 되지도 않을 아크릴의 상황은 정희민의 그림에서 모방의
방법론이라는 구조로 구현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그가 겔 미디움으로 꽃이나 다른 형상을 직조해 캔버스에
얹고, 그 형상 사이에 색이 드러나는 정도를 조절하고, 캔버스
프레임이라는 경계를 오가는 시도는 무언가를 ‘따라 만듦’으로써 평면인 상태가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을 탐색하고, 드러내고, 증명하려 든다.
노랑 이후에 가능한 일
가까운 과거부터 정희민은 라이트박스나 영상 작업을 시도해 오고
있다.7최근에는 탐구의 장을 공간으로 옮겨와 조각난 겔 미디움을 쌓거나 3D프린팅을 해 입체물을 제작하기도 한다. 입체물의 경우 2022년 부산비엔날레 《물결 위 우리》(2022.9.3.―11.6.),
2023년 타데우스 로팍 《지금 우리의 신화》(2023.1.6.―2.25.), 두산아트센터
《수신자들》(2023.9.13.―10.21.)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특히 로팍 전시에 관해 그리스 신화의 에코라는 캐릭터에서 영감받았음을 언급했다. 에코는 말을 옮기는
자신의 습관 때문에 불운한 신탁을 받은 인물이다. 말의 꼬리를 따라 하는 벌로 인해 대화는 이어지지만
오해가 쌓이고, 그 순환이 그의 삶에 반복되고 만다. 정희민은
이 무한한 고리를 가진 이야기에서 우리가 세상에 놓인 방식을 발견한다. 또한 그 방식은 아크릴이 처한
상황과 닮았음을 찾아낸다. 무언가를 모방하고, 닮으려 하고, 따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점들, 그것이 그 상태로 되어가는
상황을 내재한 아크릴이라는 물질 말이다.
유화, 아크릴, 겔 미디움, 그리고 되어가기.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노랑으로 금을 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화가들은 색을 기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노랑은 반드시 금만을 의미할 필요도 없어졌다. 무엇이
무엇을 확장할까. 과거나 현재나 회화 곁에는 화가가 있고 화가는 회화를 만든다. 다만 오늘, 이곳에서 화가가 손을 뻗어 잡은 물질은 이미 존재하던
무언가의 새로운 기표가 될 것이고, 이 사실은 화가들의 실험을 끊임없이 발동시킬 것이다. 그의 눈에 닿은 것이 황금으로 된 사물이건, 디지털 화면 속 이미지이건.
1이 글은 〈퍼블릭아트〉 2023년 3월호에 게재한 본인의 글을 바탕으로 2023년 12월 새롭게 수정한 것이다. 원문의 구성과 유사하지만, 논의 전개 방식이 일부 다름을 함께 밝힌다. 원문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김진주 (2023). 정희민의 그림: 물질을 더듬어 회화를 다듬기. 〈퍼블릭아트〉, 198, pp. 78-83
2 2016년 사루비아 다방에서 개최한 첫 번째 개인전 《어제의 파랑》은 정희민의 그림이 “풍경과 정물 등 회화의 관습적 대상”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변화하는 실존 감각을 비유적으로 탐색하며 이미지와 물질의 의미”를
질문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2022년 P21에서 열린 전시 《How Do We Get Lost in the
Forest》에서는 “이차원의 풍경이미지가 취하는 다양한 전략”이 “만들어 내는 허상의 이면을 캔버스의 표면 위에서” 탐구한다는 주제 의식이 드러났다. 각 인용은 다음 출처를 참고. 《어제의 파랑》(2016.3.2.―3.31., 사루비아 다방)의 전시 소개. URL: http://sarubia.org/73; 《How Do We Get Lost in the Forest》(2022.5.20.―6.18.,
P21)의 전시 서문.
3 《정물화전》(2019.5.15.―6.30., 시청각)의 전시 서문. URL:
http://audiovisualpavilion.org/exhibitions/tarte
4아크릴 물감은 1940년대 후반, 보쿠르 아티스트 컬러스(Bocour Artist Colors)가
아크릴 수지 에멀젼(acrylics resin emulsion)을 개발하면서 최초로 탄생했다. ‘마그나(Magna)’라는 이름으로 판매된 이 물감은 테레핀유를
희석해 유화와 함께 사용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수성
에멀젼(waterborne emulsion)을 섞은 물감인 ‘아쿠아텍(Aquatec)’이 개발되면서 본격적으로 기름이 아닌 물에 섞어 쓰는 아크릴 물감의 시대가 열렸다. 한편, 아크릴의 역사는 천연 재료를 대신해 플라스틱으로 대표되는
합성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한 1930년대 페인트의 역사와 맞물린다. 당시
페인트 업계에서는 전쟁 이후 천연 물자를 얻기 어려웠던 시대적 배경, 야외 벽화에 용이한 재료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Mustalish, R. (2004). Modern Materials: Plastics.
Heilbrunn Timeline of Art History.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URL: http://www.metmuseum.org/toah/hd/mome/hd_mome.htm
5아크릴 물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1950년대 미국에서
바넷 뉴먼(Barnett Newman),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마크 로스코(Mark Rothko),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등이 납작한 표면, 덩어리진 물감을 오간 화면을 선보이며 회화의 혁신을 도모한 것은 물감의
역사와 동반된 일이다. 이들에게 아크릴 물감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부각한 기법이었던 두껍고 거친 마띠에르(matiere)가 돋보이는 ‘임파스토(impasto)’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유지하거나 각 물감의 색을 혼합하지 않고 명확히 분리하는 효과를 주는
데 용이한 재료였다.
6큐레이터 장혜정은 그 덩어리의 역할이 ‘얼룩’에 가까웠다고 말하며, 정희민의 작업에 내재된 감정의 속성을 풀어낸
바 있다. 장혜정은 “매끈하고 납작한 이미지에 올려진 둔탁한
덩어리는 이물질처럼 화면에 잡음을 만들며 깊이를 상실해가는 세계에서 찰나적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각성의 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장혜정
(2019). 껴안을 수 없는 세계. 〈2019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도록〉. 인천: 인천아트플랫폼, p. 209.
7정희민이 제작한 영상 작품은 2019년 《속삭이는 천사들》(P21)에서 선보인 〈아이의 노래〉(2019), 2020년 《프루프록의
평행우주》(레인보우 큐브)에서 이용아, 전승호와 만든 싱글 채널 영상 〈등반가들〉(2020), 2022년
《Seoulites》(뮤지엄헤드)에서 6-8과 만든 VR 영상
〈Meditation101〉(2021) 등이 있다. 한편, 곽영빈은 〈아이의 노래〉에 대해 “실체 또는 부피에 대한 ‘디지털/평면 이미지’의 욕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평했다. 곽영빈 (2020).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모눈종이 사이: 정희민의 형상과 배경. 〈202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p. 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