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철의
사진은 무척 쎄다. 이미지가 강렬하다. 사진의 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그런 사진이다. 사진의 힘이라? 그것은 우선
사진 속 이미지가 그만큼 눈을 떼기 어렵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는 뜻이다. 대상 자체가 힘이 있다. 둘째는 사진 자체가 보여주는 것 이외에 보여주지 않는 것이 자꾸 섬뜩하게 잡아당기는 느낌을 준다. 이것을 정확히 무엇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신기랄까, 아니면 묘한 기운이 발산된다.
그것이 대상이 뿜어내는 기운인지 아니면
사진의 가파른 구도와 흑백의 색채와 톤 등으로 인해 번지는 힘이 그런 것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의 사진이 이상한 기운과 전율을 안긴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래도 한국인의 기층문화에
자리한 신기와 삶의 정서로 인해 증폭되는 영적인 분위기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은 한국인의
문화적 전통과 삶의 습속 아래서 빛을 발하는 에너지와 정신을 감득할 수 있는 나름의 문화적 혹은 영적인 기저를 요구한다.
그런 발판이 없다면 그의 사진의 힘들이 발산되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만만치 않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이 설령 없다 하더라도 그의 사진을 대면하고 감상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보편적인 시각이미지로서의 매력도 충분한 편이다. 그렇지만 한국 기층문화의
속살과 정서, 그 문화적 이력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이라면 그 감동은 배가 될 것이다.
굿판에서
무당이 요령이나 신목을 들고 한풀이하듯 이갑철은 손에 사진기를 들고 태초의 신, 원한의 신, 한 맺힌 장군신 등 이 땅의 천지신명에게 다가간다. 순간순간마다
정말 신들린 무당같이 자기도 모르는 새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무당 이갑철의 한풀이 한마당, 그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한바탕 사진풀이가 바로 이갑철의 사진인 것이다. 사진기를 매개체로 조상 전래의 삶과 그 속에
밴 한을 내 고통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소머리를 머리에 인 무당이 칼춤 추며 이 세상의 응어리를 도려내듯이
이갑철은 사진기를 들고 세상을 자르며 춤춘다. 그가 자연스럽게 사선으로 잘라낸 수평선과 지평선은 희열과
다이내믹한 충동을 느끼게 만든다. 또 광각렌즈를 사용하여 클로즈업한 사진들에서 앵글은 자유분방하기 그지없다. 그 앵글의 자유로움 대문에 사진 속 인물과 풍경은 완전히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다. 정신적인 깊이를 가진 사진. 이 사진들이 나의 무의식 깊은 곳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 정신을 이루고 있는 삼겹살, 근대적
이성의 얇은 꺼풀을 벗겨내면 금세 맨살을 드러내고 마는 유교적, 불교적, 도교적 사고의 겹과 그 아래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샤머니즘의 겹을, 나를
움직이는 무의식의 에너지 덩어리를, 이 사진들은 끄집어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사진들은 내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기억의 덩어리이며 그 기억들의 파편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만화경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 사진들은 나에게 단순한 미적 공간이 아니라 내 정신의 원형질에 도달하게 하는 주술행위가 아닐 수 없다.
풍경
속에 담겨진 사람이나 사물들이 사진을 보는 관자들을 갑자기 기이하게 긴장시키는 것이다. 사진을 보는
사람을 사진 속으로 주술처럼 불러들이고, 사진 속으로 불려 들어간 사람들은 그 사진 속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 사진 속 사물들과 대면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갑철의
사진은 주술에 가깝다. 따라서 이 사진은 '단순한 미적 공간이
아니라 내 정신의 원형질에 도달하게 하는 주술행위'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갑철의
사진은 보는 순간 그대로 다가와 육박하는 어떤 힘을 간직하고 있다. 우선 정신적인 깊이를 가진 이 사진들은
한국인인 나의 무의식 깊은 곳을 건드리고 있다. 한국 문화를 지탱하는 여러 겹들, 근대화나 세계화로도 도저히 지워지거나 망각되지 못하고 강시처럼 살아나는 유교적, 불교적, 도교적 사고와 역시 동일하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샤머니즘, 삶을 지탱시켜온 모든 것의 에너지가 자욱하다. 그러니까 이 사진들은
내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기억의 덩어리이며 그 '기억들의 파편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만화경'이다.
작가는 이 땅의 사람과 풍경,
삶과 정신, 문화와 혼, 슬픔과 넋 같은 것을
찍기 위해 스스로 사진의 어법과 기법을 창안해나간다. 우리 것을 찍기 위한 사진적 어법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의 사진에서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다소 과격한 프레밍이다. 그것은 안정적인 사진 구도가 아니다. 불안하고 느닷없고 어지럽다. 온전하게 자리한 인물은 없고 느닷없이 잘린 체로, 머리만 불쑥 치고
올라오거나 하는 식이다. 불안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보고자
하는 대상과 세계를 파편적으로, 분산적으로 안긴다.
안정적인
시선으로 응시하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주어진 대상을 관조하기 보다는 그것과 느닷없이 조우하고 있다는
벼락같은 시간성을 안긴다. 순간, 생각지도 않고 마음이 대비나
준비 없이 그냥 만나고 만 것이다. 그것은 모종의 긴장감과 힘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진 속 풍경, 대상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냥 느낌으로 파고든다. 그것이 그의 사진의 매력이다.
그
사진은 설명적이거나 한 장면의 재현이거나 의도된 서술을 넘어선 자리에 조금은 폭력적으로 보는 시선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성의 힘에 의해 조율된 것이 아니라 본능이나 무의식이 낚아챈 순간이다. 그로
인해 사진을 대하는 이들 역시 순간적으로 자신의 아득하고 깊은 내부로 떨어진다. 불에 데인 것처럼 그
장면들을 만나고 기억하고 끄집어 올린다. 곧 바로 반응한다는 얘기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시커먼’ 흑백사진 대부분은 정확한 형태나 사진 구도의 디테일, 균형적
구도 같은 것들, 그러니까 전형적인 사진에서 요구되는 상식들을 모두 파괴되고 거친 입자만을 보여준다. 아울러 노출, 구도, 포커스를
제대로 맞춘 것도 아니다. 모든 사진들은 떨렸거나 대상이 프레임 가장자리로 밀려난 것들이며 앵글 또한
원근감이 왜곡되거나 기형적인 모습의 이미지들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대상에 의존하기보다는 찰나적인 동세, 빛과 어둠 등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분위기를 전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사진 속에는 없다는 기이한 역설이 존재한다. 구체적인 대상의 정확한 재현이나
기록에서 빠져나와 그냥 한 순간의 총체적인 느낌, 분위기를 던져준다.
그것을 통해 눈이 아닌 마음과 기억과 무의식으로 독해하게 만들고 문자없이, 설명없이 그대로
감응하게 한다. ‘탁' 하고 던져지는 일갈, 일종의 선문답 같은 것이 그의 사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조금은
음산하고 지나치게 어둡고 대상은 마구 흔들리거나 잘려져 있다. 거친 그의 사진은 일반적인 사진들이 지닌
밝은 빛과 또렷한 형상, 낭만적이며 아름답고 화려하거나 섬세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전통적이고 정형화된 사진의 언어와 기법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그의
눈은 인간의 눈이라기보다는 카메라 렌즈 화 된 눈, 카메라 화 된 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카메라와 눈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의 사진은 결정적인 순간을 ‘확’ 나꿔챈다. 그것은
삶의 한 순간을 예리하게 관통하는 의식과 인식의 교호작용, 사진가와 대상간의 찰나를 소중히 하며, 그때 카메라는 영감과 인식의 결정체인 정신에 따른 눈의 연장이다. 그에게
순간이란 삼라만상의 찰나에 따른 눈과 마음의 인식작용이고 이때 카메라는 자연스레 스며든다. 이갑철은
카메라로 선문답을 한다고 한다. 그런 의지로 카메라를 다루는 것이다.
현상 너머에 자리한 정신, 보이지 않지만 분명 느낌으로 존재하는 것, 바로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사진으로 촬영할 수 있을까가 그의 화두인 셈이다.
28밀리
광각렌즈의 왜곡된 화각, 고감광도의 Tri-X 필름의 거친
입자로 이루어진 그이 사진은 과감한 프레임의 절단과 생략을 통해, 폭력적인 방법에 의해 심한 심리적
불안을 야기한다. 불안과 공포는 대상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성이 통제하는 심리적 질서가 파괴되면서 굳게 닫혀 있던 무의식의 뚜껑이 벗겨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원초적 본능의 뜨거운 에너지의 분출을 경험하게 된다. 잊고
있었던 그러나 무의식 저간에 깔려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흔히 마음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기억 이미지라고 한마디로 정의한다. 심하게 말하자면 기억이 곧 그 사람의 전생애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갑철이 사진은 바로 그 부분을 환생시킨다. 호명한다.
이갑철의
사진 속에는 고행하듯 찾아다녀서 만난 무수한 대상들에서 번져 나오는 내음과 전율들로 흥건하다. 계절, 기후, 시간, 장소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는 매우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찍는다. 더듬이와 후각을 지니고 장소를 찾아 나선다. 그러니까 이런 기후와 날씨, 분위기에는 그 장소에 가면 분명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나고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 아래 무작정 길을 나서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비가
오면 섬진강에 가고 싶고, 지리산 자락의 신비한 안개가 자신을 부르고,
바닷가에는 어떤 제 의식이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는 직감 아래 길을 나서고자 한다. 그는
도시에서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그 내음이 번지면 부리나케 내딛는다고 한다. ‘92년부터 한 3년간을 사회학자, 시인, 소리꾼, 그림쟁이 등 문화패거리 들과 함께 전국 각지를 몰려다니며
갖가지 우리문화 풍속들을 찾아 헤맨 덕분이란다. 그래서인지 그는 카메라와 함께 수행한 흔적 같은 것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는 카메라, 사진을 통해 깨달음을 찾고자
한다.
그것은 일종의 도를 닦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지나가는
말로 그는 원래 스님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불교를 특정한 종교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삶과 더욱 밀착되어 있다. 진정한 자기를 알아 가는
일이자 수행의 방법이고 삶 자체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선시가 좋고, 사찰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며 그윽한 독경소리에 황홀하다고 한다. 거기에서
수 천년이란 시간의 그늘 아래 자리한 한국인들의 혼과 마음, 정신의 한 자락을 얼핏 접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사진이란 주어진 대상을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해 내는 도구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눈이 보는 의식세계를 촬영해 내는 것이다. 반면
이갑철은 그 같은 사진의 속성을 통해 이른바 무의식적인 세계까지도 포착하고자 한다. 서구적 시선의 기계적
실현이 사진이라면 그는 그 같은 시선과 인식의 도구를 통해 다분히 동양적인 어법, 감성과 느낌, 정신을 잡아내는 도구로 번안해내고 있다. 아마도 이런 지점이 한국
사진의 진정한 근대성일 것이다.
이갑철 사진의 의미가 그 지점에 맺혀있다는 생각이다. 그 주옥같은 사진들은 그의 사진집 ‘충돌과 반동’에 담겨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의 사진 앞에서 이 땅에서 살았던
모든 이의 삶과 문화와 한과 정서 같은 것들이 형언하기 어렵게 녹아 흐물거리고 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나는
그의 재 같고 먹 같고 그늘 같고 밤 같은 짙고 깊은 어둠이, 시커먼 사진이 좋다. 그 안에 녹아 있는 한국인의 얼굴과 풍경과 오랜 세월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의식과 문화를 규정지었던 기운과
영들이 듬뿍 묻어 있는 사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