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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현, 기억과 역사의 이미지에서 시간의 물질성으로: 199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화와 사진 드로잉의 미학, 그리고 《므네모시네 – 기억의 강》
2026.11.03
A Team
《므네모시네 – 기억의 강》 전시전경 / 사진
: 구하우스미술관
조덕현(Cho Duck Hyun, b. 1957)은 1990년대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 미술계와 본격적으로 교류하던 시기에 주목받은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오래된 흑백사진을 연필과 콘테로 정교하게 재현하는 회화에서 출발해 설치, 발굴
프로젝트, 영상과 서사적 공간 구성으로 작업을 확장해 왔다. 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개인의 기억과 역사, 기록과 허구,
그리고 시간 속에서 사라진 존재들의 흔적이다.
2026년 10월 14일부터 11월 29일까지
경기도 양평 구하우스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므네모시네 – 기억의 강》은 이러한 작업세계를 다시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과거의 사진을 회화로 재구성하는 기존 작업과 기억의 축적과 소멸을
물질적 표면으로 표현한 신작을 함께 선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번 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덕현의 작업이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해 왔는지,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탐구한 기억과 재현의 문제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덕현작가 / 사진 : 조덕현
1990년대 한국 현대미술과 조덕현의 국제적
활동
1990년대는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 비엔날레와 해외 미술기관을 통해
새로운 교류의 경로를 확대하던 시기였다. 단색화와 민중미술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기존의 미술사적 구분을
넘어, 사진과 영상, 설치,
개념적 작업과 복합매체를 활용하는 다양한 예술적 실천이 등장했다.
조덕현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회화의 전통적인 재현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사진과 역사적 기록, 설치와 서사를 결합하는 독자적인 작업을 전개했다.
그는 1994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했고, 1995년 미국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ICA), 2000년 프랑스
파리 주드폼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러한 활동은 한국 작가들이 국제 미술계의 전시와 비평
체계에 진입하던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다.
특히 조덕현의 작업은 당시 국제 미술계에서 논의되던 기억, 정체성, 역사적 서사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이러한 담론을
직접적인 정치적 이미지나 선언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기보다, 오래된 사진에 남겨진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적
경험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20세기의 추억〉,
1993, 캔버스에 연필, 차콜, 인공 꽃, 유리, 60 x 162 cm / 사진: 조덕현
사진의 재현에서 기억의 재구성으로
조덕현의 대표적인 작업 방식은 오래된 흑백사진을 연필과 콘테로 캔버스에 옮기는 것이다. 사진의 인물과 배경, 명암과 질감을 세밀하게 재현하는 화면은 처음에는
사진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실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단순한 극사실주의 회화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사진은 특정한 순간을 기계적으로 기록한 이미지이지만, 그 장면이 형성된
역사적 조건이나 사진 속 인물의 삶 전체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조덕현은 이러한 사진을 다시 그리는 과정을
통해 기록된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전달하지 못하는 시간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1994년 작품 〈20세기의
추억〉과 1999년 작품 〈20세기의 기억〉은 이러한 작업의
중요한 사례다. 작가는 역사적 장면과 인물들을 회화로 재현하면서 캔버스와 오브제, 공간적 장치를 결합했다. 이를 통해 과거의 이미지는 단순히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관람자가 현재의 공간에서 마주하는 역사적 장면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진을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했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사진이 가진 기록의 권위가 작가의 선택과 해석, 재구성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있다.
조덕현의 회화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만드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일민미술관
개인전 《꿈》 전시전경 / 사진: 일민미술관
허구의 역사와 발굴 프로젝트
조덕현의 작업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실제 역사와 가상의 서사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2000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발굴 프로젝트에서는 작가가 제작한
사물이나 조각을 땅에 묻었다가 다시 발굴하는 행위가 작품의 일부로 등장한다. 이러한 과정은 고고학적
발굴과 역사적 발견의 형식을 차용하지만, 발굴되는 대상과 그것에 부여된 이야기는 작가가 구성한 허구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적 사실이 어떠한 증거와 기록, 해석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지 질문한다.
2015년 일민미술관 개인전 《꿈》에서도 작가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그의 삶을 추적하는 형식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장면들을 재구성했다. 사진과 회화, 사물과 영상, 건축적
공간을 결합해 실재하는 기록과 허구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러한 시도는 조덕현의 작업이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나 개인적 기억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역사가 기록되고 전달되는 형식 자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므네모시네 –
기억의 강》, 개인의 사진첩에서 출발한 역사
이번 구하우스미술관 전시는 고미술 수장가 진호섭(1905~1951)이
남긴 가족 사진첩에서 출발한다.
사진첩에는 근현대사의 격변을 겪었던 한 가족의 일상과 주변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다시 회화로 옮기며 개인의 사적인 기억을 관람자가 공유할 수 있는 시각적 경험으로
전환한다.
전시 제목인 '므네모시네(Mnemosyne)'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기억의 여신을 의미한다. 이 제목은 과거의 이미지들을 다시 불러오는 작가의 오랜
작업 방식과 연결된다.
그러나 사진을 통해 과거를 다시 그리는 행위가 반드시 잊힌 역사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첩에 남겨진 이미지 역시 특정한 인물과 순간을 선택해 기록한 결과이며, 그
안에는 기록되지 않은 삶과 사건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사진 속 인물들이 누구였는지를 확인하는 것뿐 아니라, 개인의 기록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역사적 이미지로 전환되는지를 살펴보는 데 있다.
《므네모시네 – 기억의 강》 전시전경 / 사진
: 구하우스미술관
〈덧-Palimpsestus〉, 기억의 이미지에서 물질적 흔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작품은 대형 신작 〈덧-Palimpsestus〉다.
16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가로 약 8m, 세로 약 3.8m 규모로 제작되었다. 작품의 제목인 'Palimpsestus'는 기존의 글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글을 다시 쓴 양피지를 의미한다.
이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록이 이전의 기록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워진 흔적과 새롭게 쓰인 내용은 하나의 표면에 중첩되며,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를 형성한다.
조덕현은 이러한 개념을 회화의 물질적 표면으로 확장한다. 기존의 사진
드로잉이 과거의 특정 장면을 시각적으로 재현했다면, 신작에서는 표면에 축적된 물질과 흔적이 시간의 구조를
드러내는 요소로 등장한다.
이는 기억을 이미지의 내용으로 표현하는 방식에서 기억이 형성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조형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의
확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작가의 작업세계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는지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기억과 시간, 역사적 흔적이라는 문제의식은 초기 작업부터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덧-Palimpsestus〉의 의의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했다는 사실보다는, 오랫동안 탐구해 온 문제를 재현적 이미지가 아닌 물질적 표면의
구성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024년
엄미술관 개인전 전시 전경 / 사진: PKM갤러리
조덕현의 작업을 오늘날 다시 평가해야 하는 이유
조덕현은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적으로 소개되던 초기 단계에서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하고 해외 미술기관에서 활동한
작가다.
그의 작업은 서구 현대미술의 특정한 형식을 단순히 수용하는 대신, 한국
근현대사의 경험과 개인의 기억을 사진과 회화, 설치와 허구적 서사의 구조 속에서 재구성했다.
이러한 접근은 오늘날 아카이브와 기억, 역사적 재현을 다루는 동시대미술의
여러 실천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조덕현의 작업을 평가할 때 과거의 국제적 활동이나 미술사적 위치만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 기억과 아카이브는 동시대미술에서 폭넓게 활용되는 주제가 되었다. 역사적
사진을 다시 사용하거나 개인의 기록을 공적인 서사로 전환하는 작업 역시 더 이상 새로운 형식만은 아니다.
따라서 조덕현의 작업이 현재에도 비평적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기억이라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넘어, 그 기억을 표현하는 조형적 방법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이번 《므네모시네 – 기억의 강》은 그러한 관점에서 의미 있는 전시다. 오래된 사진을 다시 그리는 작업과 새로운 물질적 회화를 함께 제시함으로써, 작가가
수십 년간 탐구해 온 기억과 시간의 문제를 서로 다른 형식 속에서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덕현의 작업에서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보존하는 수단인 동시에,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다시 구성하는 행위다. 이번 전시는 그 오랜 문제의식이 이미지의 재현을 넘어 회화의
물질적 구조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가능성이 앞으로의 작업에서 얼마나 독자적인 조형언어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는 여전히 열려 있는 질문이다.
구하우스 미술관 전경 / 사진: 구하우스 미술관
구하우스미술관
구하우스미술관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위치한 사립미술관으로, 현대미술과
디자인을 함께 소개하는 문화예술 공간이다. 개인 컬렉션을 기반으로 설립되었으며, 회화와 조각, 사진, 디자인
가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주거 공간과 결합한 독특한 전시 환경에서 선보인다.
국내외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전시하는 한편, 기획전과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미술과 일상생활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다.
전시 정보
전시명: 《므네모시네
– 기억의 강》(MNEMOSYNE – A River of
Memory)
작가: 조덕현(Cho Duck Hyun)
전시 기간: 2026년 10월 14일 – 11월 29일
전시 장소: 구하우스미술관(KOO HOUSE Museum)
주소: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무내미길 49-12
홈페이지: https://koohous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