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 〈“노란 비명” 그리기〉, 201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1분 6초 © 김범

이미지 없는 초상부터 포식자를 뒤쫓는 먹잇감까지, 한국 작가 김범의 독특한 작업은 기존의 질서와 권력 관계를 뒤집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 너무나 강력하고, 너무나 매혹적이며—어쩌면 지나치게 매혹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효과적이어서 스스로 생명을 얻은 듯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경우다. 이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가 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작품은 창작자에게 새로운 팬들을 데려다줄 수 있지만, 널리 퍼져 나가면서 기묘하거나 때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해석들이 덧붙기도 한다.

올해 쉰아홉 살인 한국 작가 김범 역시 그러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바로 2012년에 제작된 매혹적인 영상 〈“노란 비명” 그리기〉이다. 이 작품에서 배우 최경호는 30분 안에 추상화를 그리는 방법을 시연한다. 그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림을 그릴 때는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결정을 내리는 일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생각하지 말고, 그저 색을 고르고 느끼는 대로 붓을 움직이세요.”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한다.

노란색의 여러 색조로 조심스럽게 수평의 붓질을 하면서 캔버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비명을 지른다. 이 예술가는 다양한 표현 범위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견딜 수 없는 혼란의 비명들”과 “번쩍이는 고통을 표현하는 짧은 비명”을 그려낸다. 각각의 붓질과 각각의 비명은 조금씩 다르다.

인터넷에서 간단히 검색해 보면 ‘이 남자가 침착하게 노란 선을 그리면서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고 웃지 않기’ 같은 클릭을 유도하는 기사나 ‘한국의 안티 밥 로스를 만나보라’ 같은 제목의 글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평가는 특히 부정확해 보인다. 영상 속 배우는 오히려 밥 로스에 상당히 호의적인 인상에 가깝다. 그는 사랑받는 TV 그림 강사와 마찬가지로 성실하고 차분한 태도를 풍기며, 진지하고 인내심 있게 관객이 무언가를 배우기를 바란다. 다만 이 화가의 예술적 목표(그리고 김범의 목표)가 로스보다 조금 더 장난스럽고 기묘할 뿐이다.

김범이 로스를 풍자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다른 겨냥점이 있다. 〈노란 비명〉은 특정한 유형의 고급스럽고 난해한 추상미술, 그리고 그것이 감정이나 서사, 아이디어를 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장된 담론을 동시에 풍자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이는 톰 울프가 1975년 저서 『현대미술의 상실』에서 제기한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그 책에서 미술이 더 이상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 아니라, “믿는 것이 보는 것(believing is seeing)”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대미술은 완전히 문학적인 것이 되었으며, 회화와 다른 작품들은 오직 텍스트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조는 울프의 것이다.)


김범,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 2010, 혼합 매체, 가변크기 © 김범

그렇다고 해서 김범이 이론 없는 시각적 쾌락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보수적인 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반지성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예리한 회의적 태도와 발명적 상상력(종종 무심한 태도로 위장된)이 그의 독특한 작업 세계를 특징짓는다. 다양한 매체와 서로 다른 톤을 넘나들며, 그의 작품들은 관람자가 무엇을 믿으려 하는지, 또 미학적·정치적 차원에서 무엇을 받아들이려 하는지 질문하도록 유도한다.

2010년에 제작된 설치작품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은 일종의 세뇌 장면을 연출한다. 값싼 생활용품들—탁상용 선풍기, 주전자, 야간등—이 작은 의자에 앉아 칠판과 텔레비전 앞에 놓여 있고, 화면 속 한 남자는 지루한 강의를 이어간다. 그는 “여러분 중 일부는 전기를 사용하고, 또 다른 일부는 배터리를 사용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문득 그 사물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것들이 단지 물건일 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하면서도, 결국에는 우리가 만들어내고 또한 견뎌야 하는 여러 통제의 체계들을 떠올리며 막연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김범, 〈볼거리〉,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1분 7초 © 김범

김범은 담담한 유머와 절제된 방식으로 권력 관계를 드러내고 뒤집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다. 2010년 영상 작품 〈볼거리〉에서는 자연 다큐멘터리의 전형적인 서사를 뒤집어 초고속 영양에게 쫓겨 달아나는 치타의 모습을 보여준다. 같은 해 제작된 다른 영상 설치 작업들에서는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와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를 만나게 된다. 2008년에 제작된 회화 〈Denial〉은 관람자에게 일종의 도전을 제시한다. 화면에는 검은 글씨로 “THIS IS NEITHER A CANVAS NOR A PAINTING(이것은 캔버스도 회화도 아니다)” 그리고 “THERE IS NO SUCH THING HERE(여기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오래된 격언을 떠올려 보자. “나를 믿겠는가, 아니면 당신의 거짓말 같은 눈을 믿겠는가?”

모든 예술 작품은 우리에게 일종의 ‘불신의 유보’를 요구한다—적어도 그것을 믿어 보라고 요청한다. (또 다른 장난꾸러기 작가 르네 마그리트 역시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관람자에게 이를 일깨운 바 있다.) 김범은 바로 이러한 결단의 순간, 즉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의 선택을 자신의 작업의 중심축으로 삼는다. 큐레이터 파올라 모르시아니(Paola Morsiani)가 김범의 (때로는 음산하기까지 한) 교육적 설치 작업에 대해 말했듯, 그는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관람자의 내면화된 행위”를 강조한다. 1994년 김범은 종이 위에 연필로 작은 원 하나를 그리고, 그 옆에 “이 원이 살아 있다고 믿어라”, “이 원이 생각할 수 있다고 믿어라”와 같은 몇 가지 단호한 명령문을 적어 놓았다. 당신은 그것을 믿겠는가?


김범, 〈파란 그림〉, 1995, 캔버스에 잉크, 57 x 77 cm © 김범

김범은 회화로 작업을 시작했으며, 1990년대의 초기 작업들에서는 미술의 관습 자체를 질문하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회화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보이고 관람자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를 실험적으로 탐구했다. 〈자화상〉(1994)에서는 캔버스를 잘라 그 조각을 접어 올린 뒤 단추를 달아 셔츠 주머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벽돌 벽l #1〉(1994)은 직사각형으로 잘라낸 캔버스 조각들을 서로 이어 붙여 만든 작업이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캔버스 위에 면 조각들을 붙이고 검은 마커로 화살표를 그린 뒤 몇 가지 규칙을 적어 놓았다.

예컨대 “DON’T LOOK AT THIS PART(이 부분을 보지 마시오)”(이미 늦었지만) 혹은 “TOUCH THIS PART(이 부분을 만지시오)” 같은 지시문이다. 1995년에 제작된 한 무제 작품에는 말려 있는 종이와 함께 “TAKE THIS POEM WITH YOU(이 시를 가져가시오)”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그러나 현재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회고전에서는 입구의 안내 직원이 관람객에게 작품을 만지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고 알린다. 그 사실은 그의 작품들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쓸쓸하게 만든다. 작품들은 관람자와의 접촉이 차단된 채, 일종의 소외된 상태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김범, 〈무제〉, 1994, 캔버스에 마커, 천, 61 x 87 cm © 김범

그 전시의 제목은 《바위가 되는 법》이다. 이 제목은 김범이 쓴 글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내재해 온 갈등,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생산적인 긴장을 암시한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1997년에 출간된 그의 책 『변신술』에 수록된 것으로, 그는 그 안에서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계절의 변화와 날씨를 무시하고, 전혀 생각하지 마라.” 또한 그는 “폭우와 같은 물리적 힘이 당신을 흔들어 굴러 떨어뜨리는 일이 있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그저 당신의 원래 자세를 유지하라”고 말한다. 바위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일종의 완고함, 혹은 의도적인 폐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김범은 바위와 같은 존재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는 특정한 고유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궤적을 구축해 왔다. 로버트 배리와 요코 오노의 텍스트 기반 개념미술, 수많은 비엔날레에서 등장해 온 리서치 기반 설치미술 등 다양한 미술 운동의 언어를 자신만의 날카로운 방식으로 활용해 왔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는 동시대 미술의 궁정 광대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미술의 허세를 건드리고 그것을 기본 요소로 환원한 뒤 다시 전혀 다른 것으로 전환시킨다(예컨대 셔츠가 된 회화, 코미디처럼 보이는 교육용 영상 등).

초기의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에서는 닭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11.95달러에 판매했는데, 이는 그가 먹고 싶었던 닭 요리의 가격과 동일했다. 회화가 실제 화폐처럼 사용된 셈이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서는 닭 모양의 종이 점토 조각을 판매하고 그 수익으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닭을 사 먹을 수 있도록 2,840장의 쿠폰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여러 ‘닭’ 관련 작업 중 일부에 불과하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작업들을 종합해 보면, 그는 예술의 효용을 끝없이 탐구하는 작가로 보인다. 김범은 예술이라는 제도에 대해 분명한 의문을 품고 있지만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오늘날의 세계가 제공하는 것보다 예술이 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동시에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새로운 연작을 시작할 때마다 그의 작업은 미학적 지형을 가로질러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도약한다. 그의 작업을 글로 설명할 때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너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하나의 요약으로 정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매우 유머러스하다는 점인데, 농담을 설명하는 일만큼 곤혹스러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김범, 〈첩보선 (조감도)〉, 2004, 종이에 색연필, 40 x 53 cm © 김범

이는 직설적인 예술이자, 동시에 세계의 잔혹함을 자각하고 있는 예술이다. 거짓말이 횡행하고 사람들이 억압당하며, 심지어 어떤 배가 바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배우게’ 되는 세계 말이다. 김범은 2002년 이후 때로는 위협적이기까지 한 상상적 건축물의 설계도를 제작해 왔다. 예를 들어 〈폭군을 위한 안전가옥 설계안 (조감도)〉(2009)와 같은 작업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2008년부터 ‘Intimate Suffering’ 연작을 시작했는데, 이 작업들은 캔버스 위에 촘촘한 미로를 구성한 회화로, 단단한 경계선으로 이루어진 옵아트적 추상 화면이 하나의 고된 게임처럼 펼쳐진다. 2014년에 제작된 작품 가운데 하나는 높이가 거의 5미터에 달한다.

나는 눈으로 그 길을 따라가며 미로를 끝까지 풀어 보려 했지만, 언제나 끝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포기하고 만다. 김범은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퍼즐 같은 작업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삶에는 여러 문제들이 따르며, 그것을 해결하고 올바른 길을 찾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본성인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시대 속에서 바위처럼 ‘원래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물론 그것은 순응을 요구하는 세계 속에서 분명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긴 통로와 막다른 길로 가득한 김범의 미로처럼, 그의 작업 전체가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계속 시도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