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chronic Cinema’라는 제목은 물론 불가능하며, 동시에 하나의 도발이다. 보다 설명적인 제목을 붙인다면 ‘Synchronism vs Cinema’가 될 것이다. 지도는 공시적이다. 공간을 경계와 안정된 정체성으로 나누는, 고정된 상태의 세계다. 여기에 시간을 더하면 경계와 정체성은 이동한다. 역사의 크로노스적 시간 안에서도 지도의 경계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경험되고 매개되는 영화적 지속시간, 혹은 사건의 카이로스적 시간을 더하면 사물과 사람,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정된 경계는 시간의 어느 한 순간에 구성된 하나의 허구일 뿐이며, 그것은 토착주의가 만들어낸 매우 위험한 허구다. 경계 = 살인. 이것이 지도의 단단함에 도전하기 위해 지속시간을 지닌 영화가 필요한 이유이며, Google Maps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 영화 스튜디오를 설치하는 이유다.
다양한 형태의 생동성을 가로질러 보이스오버와 풍경을 결합하는 이 서사 방식은 풍경론(Fukeiron)의 영향을 받았다. 풍경론은 196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용어로, 주체가 살아온 풍경의 영상만을 통해 그 주체를 묘사하며, 그 풍경 안의 잠재된 시스템이 어떻게 정체성을 형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 제작 방식을 뜻한다. 아다치 마사오의 〈Serial Killer〉는 일본의 젊고 주변화된 토착 남성이 경찰 살해자가 되어가는 경로를, 그가 자라난 가난한 현재의 풍경 속에 작동하는 연성 권력과 연결해 바라보았다. 서사는 결국 필연성만을 증언할 수 있다.
Synchronic Cinema는 다른 종류의 소외를 다룬다.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소외다. 주인공은 알아볼 수 없는, 장소 없는 듯한 시간과 시간성이 사라진 장소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마이클 조던이 유명한 에어 조던 덩크를 하는 순간, 카메라가 정지된 세계를 가로질러 이동하는 Nike 광고처럼 말이다. 마이클 조던만이 역사에 고정된 한 순간 속에서 움직이며, 즉 지속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그것은 결정적 순간이 아니다.
거리의 몸들은 정지된 일상의 자세들 사이를 움직이고, 장소와 장소 사이를 컷으로 이동할 때 지도의 시간은 간헐적으로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Google 차량이 문자 그대로 모든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무작위의 한 사람이 〈La Jetée〉의 폐쇄되고 순환하는 순간들처럼 프리즈 프레임 속에서 우리를 따라 거리를 내려온다. 하지만 지속시간의 시간은 보이스오버와 편집을 통해 경험되는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며, 이 서로 다른 속도들이 서로를 마찰한다. Synchronic Cinema의 몽타주는 여러 속도를 변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Google Maps 역시 풍경과 맺는 우리의 관계를 매개하고 추적하는 통제 수단이다. 모든 사람의 시간을 포획한 뒤 그것을 다시 그들에게 판매하기 위해서다. Google 차량의 이동 경로는 지도가 경계를 만들어내는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Synchronic Cinema는 Google의 기술적 약속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장소를 포착하고 다른 시간성에 접근할 수 있는 상호작용의 약속 말이다. 죽은 현재 속에서 동시대성을 되찾아오기 위해서라면 Google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위협으로서의 이러한 ‘alien-nation’ 안에서 그것을 해방의 가능성으로 찾고자 한다. 나르바의 회색 여권 소지자들이 지닌 ‘grey alien’ 정체성을,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소외 효과라고 불렀던 것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즉 서사 안에서 정체성과 현실을 바라보고 개입하되, 그것들을 시간적으로 만들어진 허구로 취급함으로써 변화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전지구적 네트워크가 점점 더 강하게 작동할수록 ‘지역성’이라는 허구에 대한 요구 역시 커진다.
사람들은 그 틈 사이로 떨어져나가고, 특권적인 쪽에서는 Airbnb, EasyJet, 체험 중심의 비엔날레 문화가 이를 완화하는 데 사용된다. 장소특정적 미술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하며, 이는 우리 협업의 이름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비판이기도 하다. Danièle Huillet가 타키투스의 『Histories』를 영화로 다시 만들었을 때, 그는 이야기를 원래의 장소인 로마에서 촬영했고, 배경에는 장소특정성을 갈망하며 경험을 수집하는 관광객들이 등장했다. 이 1970년 영화 〈Othon〉은 지도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 규모를 충돌시키며 원형적인 Synchronic Cinema를 만들어낸다.
Google의 전지구적 네트워크 시간 속에서는 고대의 사원과 타코가 동일한 지도 위의 핀일 뿐이며, 각기 다른 장소에서 독립적으로 경험되던 시간의 양식들은 서로 붕괴하고 흐려지기 시작한다. 장뤼크 고다르는 한 영화에서 “그들이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살인이 되었다”고 쓰고, 그보다 앞선 작품에서는 “지속시간을 되돌려라”라고 말한다. Synchronic Cinema는 디아스포라가 경험하는 시간을 이러한 동시대적 ‘지도’의 시간, 혹은 ‘살해된’ 시간과 몽타주한다. 과거를 구하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과거를 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속도를 변조하고, 죽은 세계를 체감된 지속시간으로 움직이게 하는 방식일 뿐이다.
Google의 야망 가운데 하나는 분류에 대한 고려 없이 모든 것을 하나의 장소에 담는 완전한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지상 위의 지옥처럼 들린다. 장소가 아니며, 시간도 없고, 몸도 없으며, 무엇보다 정의조차 없는 장소. 이러한 전체 프로젝트는 서구 사상뿐 아니라 이슬람과 동양 사상에도 대립한다.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이 모든 전통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 신과 서로, 심지어 무생물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정의함으로써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Google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다루는 이야기들은 기술에 의해 초월된 지역주의라는 허구가 가진 기묘함을 전달한다. 디지털이 젠더에 미칠 수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영화의 시공간에도 열어두고자 한다. 이것들은 스크린의 유령 같은 이동 속에 숨어 있는 유령들이자 새로운 가능성과 정체성이다. 그러나 공시성에 갇힌 이 유령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영화적 시간뿐이다. 그들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들을 탄생시킨 경계의 정지 상태를 긁어내고 침식하기 시작한다.
시간을 저장하고, 디아스포라를 저장하려는 시도 속에서 공간과 시간의 관계, 특히 그것들이 지닌 부유하고 참여적이며 우발적인 성질에 관심을 둔다. 생동성과 현실성을 만들어낸다. 오늘을 붙잡는 것이다! 어쩌면 아이러니한 일일 수도 있다. 시간의 아카이브 가능성은 ‘Synchronic Cinema’라는 제목과 마찬가지로, 앞서 말했듯 하나의 논쟁적 선언에 가깝다. Synchronic Cinema의 영화는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영화다. 누군가 사이트를 방문하기 전까지 그것은 서버 위 코드로만 존재하며 실체가 없다.
지도가 업데이트되면 영화도 함께 업데이트된다. 공간의 현재는 실시간으로 존재한다. 적어도 Google 차량이 마지막으로 그 장소를 지나간 시점만큼은 그렇다. 동일한 카메라의 안무가 현재 속에서 이루어지고, 보이스오버인 원래의 이야기는 화자의 목소리 안에 부유하는 주관적인 이야기의 시간을 저장한다. 역사적 속도들과 지속하는 현재들이 몽타주되고, 각각의 개별 속도를 더한 것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하나의 새롭게 출현하는 실시간 영화가 생성된다. Google Maps 차량이 시계탑을 지나갈 때, 원형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금은 몇 시인가? 지도에 의해 포획된 것, 즉 카이로스의 시간은 다시 순환될 수 있다. 금고 안에 보관된 것, Google의 시간 은행 속에 저장된 것은 깨뜨려 열고, 다른 곳으로 옮기고, 다시 유통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