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처분된 돼지들의 유해가 등장하는 ‘죽은 산의 냉철한 새’ 트릴로지와 학살지 유해발굴 현장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휘앙 새〉(2020) 그리고 최근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작업까지. 그의 작업은 마치 특정한 사건과 현장을 명확히 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작업은 그 무엇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미지의 표면은 어딘가 단단한 땅을 비추었다가도, 이내 출렁이는 물결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어딘가로 흘러가버린다. 때로는 “대각선으로.” 컬러 필터로 색을 바꾼 이미지는 부지불식 간에 서서히 색을 바꾸며 눈을 간지럽히고, 그 위에 무언가 둥둥 떠오르기도 한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부유하는 먼지와 날갯짓하는 동물이, 산 채로 죽은 채로, 이따금씩 이상하게 똑같은 스케일로.
그런 이미지들의 연쇄 속에서 뼛조각이나 박제된 동물들이 나올 때면, 이미지의 표면은 굉장히 물질적으로 전환된다. 아주 얕은 심도로 표면을 세세하게 훑으면서 손으로 사물을 잡고 눈에 가까이 가져가 이리저리 살피듯이. 그렇게 뼈만 집중해서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사람의 뼈인지, 동물의 뼈인지, 과학적 표본인지, 학살의 증거인지 알 수가 없다. 나무처럼 오래된 표면과 구멍이 송송 뚫린 단면에서 시간이 읽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숫자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퍽 솟아오른 뼈에서 흙먼지를 털어내는 이미지의 고고학이 신이피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고고학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과거를 다루지만, 역사를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한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들에 맥락을 부여해 이해 가능하고 순차적인 것으로 배열해내는 반면에, 고고학은 과거를 선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고고학은 일단 튀어나온 사물들의 비논리적 관계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서 지금으로 갑자기 솟아오른 물질을 마주하는 작업이 된다. 역사의 재료가 되는 사료와 달리, 고고학이 발굴해내는 것은 말이 없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짚어내듯, 고고학은 침묵하는 기념비, 의미 없는 흔적, 문맥 없는 대상들 그리고 과거가 남긴 사물들에 대한 것. 그렇기에 신이피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의 고고학도 당혹스럽게 솟아오른 사물들을 대하는 문제가 된다.
그의 영상에서 논리적인 연속성과 선형적인 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스멀스멀 움직이는 이미지 위에 텍스트가 떠오르지만 그것은 이미지를 설명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오히려 충돌을 만들어낸다. 도대체 이것들이 왜 함께 놓여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이미지와 말들이 앞뒤로, 위아래로 붙어있다. 그것은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문장이 아니라, 시(詩)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죽은 산의 냉철한 새 #02〉로 돌아와 그 중간에 등장하는 끈적하게 인화된 흑백 사진을 본다. 옅은 눈썹과 깊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의 얼굴, 깨끗하게 화학 처리된 뼈와 미생물이 꿈틀거리는 흙에 묻혀 있는 뼈 그리고 살아있는 새와 죽은 새의 이미지가 교차되는 사이로 그 사진은 정말이지 뜬금없이 끼어든다.
“미온의 미끌하고 불결한 요동은 고요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따뜻하게 적셨다”라는 텍스트와 함께. 사진의 형태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 있지만, 클로즈업한 채로 화면이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는 탓에 그 사진은 시각보다는 촉각을 자극한다. 사진의 표면 곳곳에 붙어있는 먼지가 오래된 젤라틴 인화지의 끈적함을 머금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사진의 이미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뼛조각, 또 살아있는 앵무새의 부리까지. 이미지의 연쇄는 서사가 아니라, 튀어오르는 표면을 만들어낸다. 이미지와 사물의 경계에서. 이것은 신이피가 영상을 전시할 때 화면 속에 등장하는 뼈를 함께 전시하는 맥락을 생각해볼 수 있는 차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