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비평워크숍 모음집』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2025), pp. 229~251.
G: 누가 텍스트를 통과시키고, 또 누가 텍스트를 옮기나요? 화물선이 짐을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인가요?
D: 그렇다네, 트럭이 화물을 옮기듯. 하지만 내게 영화는 간신히 존재하네. 난 자주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_ 마르그리트 뒤라스, 장-뤽 고다르 『뒤라스X고다르 대화』
이 글은 비평문이 아니다. 이런저런 기회로 종종 비평을 쓰곤 했지만 늘 그것은 나 역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나 비디오 작업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내가 비평에 대한 비평을 쓰는 것은 불가하다고, 조심스럽게 안소연 평론가에게 말했다. 동시에 가능하리라 상상했던 것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글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비평이 여전히 그 형태를 유지한 채 어떻게 변모할 수 있을지, 비평문 이전 혹은 이후에 그 글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변형되는 양상에 대한 추적의 기록과 그에 따른 사유를 글로 옮기는 것은 시도해 볼 만한 것으로 여겼다.
결과적으로 내가 의뢰받은 것은 ‘창작으로서의 비평’에 관심을 두고 있는 안소연 평론가의 글쓰기 혹은 비평의 실천, 비평의 매체에 대해 다루는 글이 되었다. “정해진 범위나 형식은 없습니다”라는 제안. 그래서 이 글에는 보통 내가 평문에서 잘 쓰지 않는 ‘나’라는 주어가 자주 등장한다(사실 이것은 안소연 평론가의 몇몇 비평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역시도 필요에 따라 필자의 정체성을 굳이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이 글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차라리 글이 아니라 영상 작업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 영상 작업을 위한 트리트먼트를 작성해 보자. 그렇다면 비평문은 아니다. ‘비평의 글쓰기’라는 행위 앞에서 오히려 더 비평적인 수단으로 글이 아닌 다른 매체를 돌아보는 한 평론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이 다큐멘터리의 여러 장면들을 설명하는 트리트먼트 혹은 촬영을 계획하는 이의 작업 노트.
안소연 평론가는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종이 위에 인쇄되는 글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이 한계를 “초월할/외면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그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 비평적인 것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가 현재 취하고 있는 ‘방법’은 글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실천의 첫 번째 방법은 앞서 “창작으로서의 비평”이라고 표현했듯 비평의 글쓰기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여전히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글쓰기, 다른 구조의 비평을 시도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그렇게 글의 형태만을 취했던 비평을 다른 매체를 통해 수행해 보는 시도다. 본래 조소를 전공했던 평론가는 비평의 행위로 조각을 만들기도 하고 비평을 예비하며 일어났던 사건들을 소재로 비디오 작업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글을 여전히 글의 형태로 보존하되 전시 혹은 출판의 과정을 거치며 글의 외형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비평의 내외부를 다시 구성해보고자 한다.
나는 우선 안소연 평론가의 글 안에서의 실험들이 궁금했다. 그는 비평문을 쓰며 “언어에 대한 절망감을, 비평적 글이 갖는 폐쇄성”을 느꼈고 이를 초월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과연 비평적 글은 폐쇄적인가라는 반문이 생겨났다. 폐쇄성을 초월한 비평이 가능하다면,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비평이므로 결국 다시 폐쇄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의 말대로 비평적 글이 폐쇄적이라면, 폐쇄적이지 않으려면 결국 비평이 아니어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평이 아닌 ‘비평적인 무엇’을 생산함으로서 비평의 폐쇄성을 초월할 수 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가 내게 보내준 그의 비평문을 여럿 읽어보았다. 나의 감상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비평문은 폐쇄적이다. 다만 여기서 폐쇄적이라는 판단은, 안소연 평론가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그의 비평은 모든 글이 가질 수밖에 없는 폐쇄성의 운명에 얽혀 있으나 부단히 그 운명을 거부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매우 풍부하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나는 그가 비평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작품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희소하게 내가 직접 본 작품에 대한 언급도 있고, 어느 정도 작품 세계를 알고 있는 작가의 경우 평론가의 설명을 토대로 꽤나 충실히 특정 작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 상을 그려볼 수 있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 기억과 상상의 노력을 나는 모두 배제했다. 비평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전제하지만 나는 안소연 평론가의 비평문에서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들을 완전히 커튼으로 가리고 오직 그의 글 자체만을 오래 곱씹어 읽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비평의 무대는 비평적 몸짓과 목소리들만으로 풍부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몇 번이나 사진에 관해 물었다”. 〈만 년 전에 타서 없어진 별〉이라는 제목의 비평문에 있는 한 문장이다. 나는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은 모르지만, 작품에 대해 작가에게 몇 번이고 질문을 던지는 평론가의 모습을 상상한다. “내가 그와 마주한 이 두 개의 그림 앞에서 떠올렸던 헤라클레스와 게리온의 수수께끼 같은 대화는, 그가 인용한 엘리엇의 시와 내가 인용한 소설 속의 대화 사이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수수께끼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려, 나는 조심스럽게 전시장을 거닌다. 안소연 평론가가 이 비평에서 인용한 소설은 앤 카슨(Anne Carson)의 『빨강의 자서전(Autobiography of Red)』이다. 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인 스테시코로스(Stesichorus: Στησίχορος)가 쓴 단편을 원전으로 삼고 있는 이 소설은 앤 카슨이 그 원전에 대해 설명하듯 “긴 이야기를 쓴 후 갈기갈기 찢어서 그 쪼가리들을 노래가사, 강의 노트, 고기 부스러기들과 함께 상자 속에 묻어둔 것처럼” 읽힌다.
안소연 평론가의 비평도 그러한 면이 있다. 글에는 그가 비평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간신히 나아가며 경험했던 사건들의 쪼가리들이 넉넉하게 펼쳐진다. 쪼가리들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고 번호는 그것이 상자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글을 읽는 이는 계속해서 상자를 흔들 수 있다.
안소연 평론가의 ‘내가 네게서 묵은 적은 얼마나 적은가’라는 비평문에는 여기저기 볼드체의 활자들이 뿌려져 있다. 그는 이 단어들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글을 읽고 기억에 남겨진 파편적인 것들이며 자신의 문장 속에서 작가의 말을 구분해 낼 수 있는 표식이라 설명한다. 나는 이 표식들을 살핀다. 그리고 “머리 상자”라는 한 표식에 눈길을 멈춘다. “방, 그는 그곳을 사물과 이미지와 글로 느슨하게 채워 놓고 집중해서 무언가를 보(이)려/들으려/말하려 했으나, 자기 자신의 머리 상자라도 됐는지, 계속해서 방-벽, 천장, 바닥, 모서리, 창, 계단, 문-으로 되돌아왔다”.
자기 자신의, 머리 상자라도 됐는지… 나는 불현듯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그 이름은 두 개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하나는 제임스 로드(James Lord)가 회상한 자코메티와의 대화. 추상적인 조각을 해본 적 없냐는 로드의 질문에 자코메티는 단 한 번, 1934년에 커다란 〈입방체(Cube)〉를 만들었고 그것을 일종의 머리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 대형 〈입방체〉는 1933년6월에 죽은, 자코메티 아버지의 머리로 알려져 있다.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도 1933년 6월에 아버지를 잃었다. 나탈리 레제(Nathalie Léger)는 자코메티가 ‘상실’의 형태를 석고 덩어리 속에서 찾고 있을 때 베케트는 같은 것을 말 속에서 찾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빈 것의 형태. 또는 사라진 사물들을 위한 묘비. “따라서 두개골 어둠 속에서 홀로 끝나기 위해 목도 윤곽도 없는 텅 빈 구멍 그냥 상자 어둠 속 마지막 장소 텅 빈 구멍”(사뮈엘 베케트). 안소연 평론가도 내게 자코메티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자코메티가 그런 말도 했어요. 조각이 작업실 바깥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는 게 좋냐라고 물어봤을 때 무덤, 땅 속에 묻혀야 된다고요”.
그런데 평론가의 설명에 따르면 조각은 완전히 묻히는 것이 아니라 표지석, 묘비와 같이 일부는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고 그것이 단서가 되어 우리가 무언가를 지각하고 기억할 수 있게,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정확히 그와 같은 기획을 구현하기 위해 안소연 평론가 역시 조각을 빚고 글을 빚어 왔다고, 나는 메모한다.
내게 글을 의뢰하는 메일에서 안소연 평론가는 뒤라스(Marguerite Duras)를 언급했다. 뒤라스의 소설 『여름비(La Pluie d’été)』에 등장하는 “불탄 책”에 대해서도 그렇고, 뒤라스가 글과 이미지 사이에서 독특한 접점 혹은 전환을 인식하면서 매체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글과 영화를 각별하게 느끼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불탄 책”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여름비』를 찾아 읽었다. 여기저기 불타 있는, 가죽 표지로 장정된 아주 두꺼운 책.
불에 타 잔혹하게 훼손되었지만 불탄 부분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 글의 형태가 온전해 보이는 책. 글을 읽지 못하는 주인공 에르네스토는 불탄 책을 발견하고 그가 이전에 본 적이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문득 떠올린다. 책이 지닌 고독과 나무가 지닌 고독의 사이에서, 에르네스토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기적적으로 책의 내용을 읽어낸다. 뒤라스는 에르네스토의 입을 빌어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가 자신의 고유한 육체 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이라고 전한다.
텍스트는 “본질적으로 텅 비어 있는 자리”를 전제한 후, 단어들이 (형태가 아니라) 전하는 의미와 기능이 달라짐을 통해 “고유한 육체”를 구성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안소연 평론가의 비평문을 읽고, 또 비평의 한 실천으로 만들어진 작업들을 접하며 느꼈던 것도 빈번히 그가 고정된 관계들을 교란하고 그 관계에 대한 망각을 유도하고 그것을 통해 작가와 작업, 가상의 관객이 이루는 우주를 다른 형태로 제시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그가 최근에 만든 조각 작품을 살펴보자. 조각은 그 제작 과정을 따져 보았을 때 태생적으로 원형으로부터 늘 분리된 존재이다. 결핍, 상실, 망각 그 자체로서의 형상은 무언가를 향하고 있는 손과 누군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굳어졌다.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쓴다. “원형으로부터 멀어진, 하지만 결핍과 상실의 기억을 떠안은, 마땅히 적합한 장소가 있다면 광장과 묘지일 것이라 생각하는, 그게 나한테는 조각이다”.
적합한 장소와 형태를 모색하는 시도로서의 비평은, 뒤라스가 고다르(Jean-Luc Godard)와의 대화에서 표현한 것처럼 “간신히” 존재한다. 뒤라스는 스크린 위에서 텍스트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자 했다. 이것은 글도 아니고 영화도 아닌 다른 고유한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영화가 간신히 존재한다(le cinéma existe à peine)”. 고다르는 뒤라스에게 “힘들게(avec peine)라고 하셨나요, 간신히(à peine)라는 말씀인가요”라고 되묻는다. “간신히 말일세. 힘들지는 않아. 난 그렇게 보지는 않네(À peine. Pas avec peine, non, je ne trouve pas)”.
뒤라스에게 영화는 간신히, 겨우, 가까스로 존재한다. 안소연 평론가가 가정하는 “창작으로서의 비평”이 가능하다면 그 비평은 간신히, 겨우, 가까스로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평론가의 말들은 글의 표면에 단순히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지속해서 가로지른다. 스크린에서의 텍스트 읽기를 조직하기 위해 텍스트를 영화에서 “접히도록” 한다는 뒤라스처럼(“Je les fais se plier au cinéma, mes textes”), 안소연 평론가는 계속해서 비평의 (비)언어들을 접고 또 접는다.
그 행위는 내게 다시 『빨강의 자서전』의 게리온을 연상시킨다. 지역 도서관에서 정부 서류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 게리온은 형광등 스위치 밑에 ‘사용하지 않을 시 소등’이라고 쓰인 누렇게 변해가는 색인카드를 노려본다. 이제 그는 스위치들을 마구 켰다 껐다 하며 “작은 수은 덩어리처럼 대열 사이를 지나”다닐 참이다. 이 점멸의 격렬함을 무상하게 반복하는 일. 익숙했던 시공간에 대한 감각의 유예. 그러한 ‘지연’을 수행하는 작품/사건/상황을 비평하기 위해 제 스스로를 유예하는 비평은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그 수고로운 질문을 마주하는 것을, 평론가는 주저하지 않는다.
* 글의 제목은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에 있는 한 문장을 가져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