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Where Light Leans》 © ThisWeekendRoom

기준이란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사회를 논리적으로 직조하는 보통의 토대이자 지표. 정답과 효율을 요구하는 환경에서 다수는 무의식적으로 곧은 무언가를 정상성으로 합의해 왔다. 하지만 과연 모두에게 주어진 조건은 그토록 매끄럽고 공평한가?

전시 《기울어진 증거들》은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각자의 몸과 지각 체계는 저마다의 굴곡을 지닌 채 끊임없이 동요하며, 주변의 존재와 맺는 관계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에 보편의 정의를 교란하고 이분법적 시선에 균열을 낼 때 비로소 새어 나오는 이야기에 주목한다.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리투아니아 작가 비타우타스 쿰자(Vytautas Kumža)는 사진 매체가 지닌 다큐멘터리적 속성을 배반한다. 말하자면 특정 장면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지 않고, 피사체의 쓰임과 비례를 왜곡하여 초현실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식이다. 그에게 사진은 렌즈 너머 대상을 평면에 박제하는 결과물이 아니라 삼차원 공간으로의 개입을 위한 재료다.

이는 현대 사진가들이 잃어버린, 대상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회복하고 사진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결합하고자 함이다. 인화된 이미지와 실재하는 사물은 물리적으로 결합한 아상블라주적 성격을 띠며, 수집된 물건들은 본래의 기능과 달리 재조립됨으로써 전형적인 가치에서 벗어난다. 또한 그 아래 놓인 사진이 일차적으로 만들어내는 착시와 더불어 관객의 시지각과 상호 작용한다.

사방의 위계를 뒤집고 이질적 물성을 충돌시키는 작가의 무대는 의도적으로 조작된 픽션에 다름없다. 개의 얼굴이 그려진 접시에 자전거 체인을 연결하여 얽매임과 도피, 조각난 충성심을 표현하거나(Wasn’t me), 넥타이로 결박한 트로피를 거꾸로 매달아 가치의 전복을 암시하고(Sight beneath the silence), 무너져 내렸으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카드 탑의 형상을 빌려 안전한 실패를 보여주고(Brief escape), 반사되는 풍경에 따라 무늬를 바꾸는 은빛 오리를 내세워 정체성이 주변 환경을 통해 얼마나 쉽게 굴절되는지 묻기도 한다(Quiet persuasion).

그의 다초점 렌즈는 현대인의 통찰이 얼마나 취약하고 가변적인지 폭로하는 장치가 된다. 그럴듯해 보이나 어딘가 어긋난 하이브리드 앞에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며 어떻게 믿고 해석하는지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다.

Installation view of 《Where Light Leans》 © ThisWeekendRoom

구나의 작업에는 곧게 뻗은 직선도, 확실한 곡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로이 증식하는 유동적인 선들은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 그의 불편한 몸과 흔들리는 사고에 기인한다. 다만 그에게 흔들림은 불안이나 결핍이라기보다 세상을 느끼는 고유한 방식에 가깝다. 눈과 얼굴, 뼈 등을 대체하는 형상에는 자신의 마음이 못내 투영되어 있다. 불뚝 튀어나오거나, 모나거나, 분절되어 있거나, 고여 있거나, 부식의 흔적을 지닌 모든 것은 그러한 사유의 단서들이다.

예컨대 작가는 작업장 마당에서 매년 피고 지는 모과나무를 줄곧 지켜보았다. 모과는 여느 과실처럼 진물을 쏟아내며 형체를 잃는 대신 제 안으로 수분을 머금은 채 서서히 건조되었더랬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작아지다 마침내 스러지는 물질의 변이를 층층이 품은 〈상아빛블랙브라운토르소(IvoryBlackBrownTorso)〉는 그가 목격한 유한함 속 끈질긴 생의 기운을 시각화한다.

한편, 조각에 주로 쓰이는 FRP는 본래 공업용 재료로 사용에 알맞은 온도나 배합률이 필요하다. 그에서 벗어날 경우 덩어리의 두께와 색 등에 변수가 일고, 경화되는 순간 예기치 않은 불순물이 섞이기 쉽다. 그러나 작가는 이를 집요하게 다듬기보다 우연이 자아낸 실마리를 긍정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회화에서도 드러난다. 우선 제목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수레’는 사람이나 짐을 싣고 굴러가는 운송 수단이자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내면과 장기의 보호막을 뜻한다.

수레, 즉 나무판의 속을 파내는 순서에서 생겨나는 요철은 종종 그대로 남겨지는데, 이 예측 불가능한 지점들의 수용이 곧 무작위적인 방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란한 궤적 아래엔 이미 단단한 몸체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형조차도 하나의 고유한 원형이기에 구나는 그 안에서 발견되는 제각각의 모양을 용기 있게 엮어 나간다.

일반성을 위시하는 잣대는 어쩌면 누군가의 믿음이나 강요된 환상일지 모른다. 전시장 내의 변칙들은 단순히 시각적 관습을 뒤집거나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조형 실험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를 감지하고 돌파하기 위한 자세와 같다.

진정한 균형은 요동치는 지면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무게중심을 재조정하는 과정일 테다. 맹목적으로 직진하는 대신 기꺼이 궤도를 이탈하여 비스듬히 몸을 기울일 때, 늘어진 그림자 바깥으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구석을 비추어 볼 수 있지 않을까.

글ㅣ이유진 (디스위켄드룸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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