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을 녹인 공기》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 2020) © 박석민

움직이는 회화 전시는 가능한가?

꽉 차있고도 비어있는 공간을 추상할 수 있는가?

공백은 관념적 위치인가 아니면 물리적 상태인가?

회화를 공간 위에 놓인 생경한 빛으로 정의했을 때의 오류들.

시선의 이동을 대상의 움직임으로 전환 시켜 바라볼 수 있는가?   

물질/조형을 무드나 공백으로 이행하기 위한 단초로 활용 가능한가?

그림이 휘어진/왜곡된 곡면을 따라서 이질감 없이 진행해 나아가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가? 

많은 그림들 중 일부가 누군가에게 특별히 사로잡히지 않도록 감상을 제어할 수 있는가?

감상자가 여러 층위의 선형적 동선들을 총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을까?    


공백이 필요했다. 이것은 무의미 혹은 텅 빈 상태를 의미하진 않는다. 이것은 삶에서 가장 치열한 순간이나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찰나에 도착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은 집중과 멈춤 이후에 찾아오는 내게 가장 현재적인 감각의 지향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물리적으로 아주 먼 곳에 있는 천체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는 동질감을, 반대로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알 수 없는 이물감의 ‘있음’을 느껴왔다.

시공간의 영속 속에서 현재를 구분 지어 끊어내지 못하고 있을 때면, 머나먼 목적지를 향해서 유유히 떠가는 이름 모를 비행체의 깜빡거림을 상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감각하려는 시도는 중간중간 매듭을 짓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무언가를 관찰하거나 떠올릴 때면, 대상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의 것을 본질 물성 언어 감각 사이에서 겉돌고 있는 잔상처럼 느낀다. 최초의 계획은 두 이야기를 시간적인 층위의 병렬구조로 단순 나열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감정/감각에서 연결된 것들을 동일한 선상에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다. 많은 것들을 버리기에 적당한 조건들이 만들어졌다고도 판단했다.

계획은 곧 무위에 그쳤다. 회화 그리고 화면에 관한 스스로의 오랜 욕망을 간과했다는 사실을 이내 인지 할 수 있었다. 나의 시간이 더해질수록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의 거리는 이미 측정이 불가능한 어떤 것. 적절한 거리를 찾아 시선과 몸 그리고 욕망과 이성까지도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장의 결과물은 회화-이미지의 해상도나 개별 작업의 조형적 완결성보다 세계(universe)와 나 사이에 흐르는 공백의 심도(depth)에 스스로를 동기화하려는 의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것은 화면의 안과 바깥에서 동시에 움직임을 발생시키고자 했던 최초의 목적과 연결된다.

조형성-시각-미각의 형질 변형에서 확장된 사유를 전시공간 자체의 중층 구조에 이식하고자 했다. 각설탕의 이미지는 전시를 준비하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조형적인 형태의 각설탕을 녹이는 간단한 사고실험 속에서 매끈하지 못한 가장자리의 순서 즉, 꼭짓점-모서리-면의 순서로 녹아 뭉뚝해지는 장면까지 연상되었을 때,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가 보는 대상의 본질은 변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이므로 각각의 작업에서 각설탕, 설탕, 달콤함, 가벼움, 가짜에 관한 은유들을 녹였고 조명, 동선, 여백 등 회화 외적인 요소들에 주목했다. 뜨거운 것들을 소거하고 서사를 끊어내는 일에 집중했다. 인접한 그림들이 서로의 잔상 혹은 근거가 되도록, 그림의 흐름이 비어있는 여백과 매개하여 총체적인 경험이 발생하도록, 이로써 모든 것들이 하나의 궤도/체제로 작동하도록 공간을 제어하고 싶었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무거운 회화의 독자성(singularity)으로부터 《설탕을 녹인 공기》 전시를 끊어 내고, 좀 더 가벼운 혹은 비회화적인 지점으로 이행하려는 지극히 회화적인 시도일지 모른다. 끊기면서 이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인과적 서사들은 연쇄적으로 중심에서 벗어난다. 접촉하려 할수록 감각의 언어가 견고한 순서로 줄지어 가라앉아 버린다. 공백은 그 딱딱한 모서리를 녹여내며 확장하는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