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숨 제작소》 전시 전경(합정지구, 2017) © 합정지구

수진을 처음 만난 게 벌써 육칠 년 전이다. 파주의 한 레지던시에서 비평가 매칭을 이어준 게 인연이 되었다. 나는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는데도 밖을 산책하는 중이라는 담당자의 말을 들었다. 낭만적인 작가인가보다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개의 작가들이 낭만적이니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꽤 흐른 뒤 우산을 든 수진이 나타났다. 모자를 쓰고 있었고 짧은 바지를 입었던 것 같다.

당시는 첫 만남이었기에 그녀의 옷차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후로도 이런저런 곳에서 그녀를 만날 일이 있었다. 알고 지낸 시간에 비하면 만난 횟수가 잦지는 않지만, 그래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바로 그녀의 옷차림. 특별히 눈에 띄는 스타일이라거나 화려해서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진의 그림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유독 그녀와 꼭 닮아가는 걸 알아차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수진이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마도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받으면서부터일 것이다. 당시 작업은 주로 숲과 관련되었는데, 흔히 말하는 풍경의 정서가 지배하는 회화였다. 물론 작가가 풍경화 장르를 더 선호하거나 의도한 것은 아니란 건 작품을 본다면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풍경이 된 사람 또는 공기에 희석되는 인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수진은 자연의 자연에 큰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의 그림에 담긴 자연은 대부분 놀라울 정도로 싱그럽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숲을 배경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는 어떤 놀이의 흔적이 암호처럼 흩뿌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얼룩이라 불러도 될 이 흔적들은 대기 중에 떠도는 입김, 잔상, 몽상의 잔여물이기도 하다. 꽤 많은 비평가들이 수진의 그림에 잠복하는 ‘숨’과 ‘숨쉬기’의 존재론적 흔적에 관심을 가졌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첫 만남에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설립된 창작 스튜디오 특유의 열정도 한몫을 했다.

시작부터 이야기가 술술 풀어진 건 아니었다. 뭔가를 분석하려는 비평가는 쓸데없이 진취적이었고, 경험이 부족한 젊은 작가는 상황에 맞는 낱말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그러다가 마침 수진이 자신의 고향 근처에 숲이 많아서 그곳에서 언니와 자주 놀았다는 기억을 들춰냈다. 그 이야기가 나오기 직전, 나는 그림에서 유독 습한 기운과 대기나 숨과 같은 열쇳말이 떠올랐다고 질문했다. 그렇게 방향을 찾지 못하던 실이 바늘귀에 꿰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천식과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기를 하면서 느낀 어떤 마취된 상태까지 거침없는 술회가 이어졌다. 수진에게 숨은 필요에 의한 회화적 비유가 아니라 생존에 관한 것이었다. 숲속을 달리면서 느꼈던 바람, 그 비릿한 냄새와 헐떡거림은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를 몸으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수진은 그리기를 통하여 어릴 적 비릿한 기억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렇다고 수진이 회화를 하는 이유가 과거의 기억을 작업의 재료로 각색하지는 않는다.

그리기는 추상적인 느낌으로 남아있던 기억을 바깥으로 꺼내어 그것을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회화적 시공간이 세워지는 시간’을 허락한다. 그래서일까? 수진의 초기 회화 속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불분명한 상태에 머물렀다. 소년과 청년 사이. 그들은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는 재현 배우같은 느낌을 준다. 어색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연출자의 요구를 잘 수행하는 느낌에 더 가깝다.

2014년도 작업 〈만취풍덩〉과 〈공기텐트〉의 인물들은 존재의 가벼움을 견디지 못한 청춘의 불안과 모순에 휩싸여있다. 당시 등장인물은 정확한 캐릭터나 설정이 없이 수진이 만든 아름다운 덫 혹은 배경 속에서 작가의 현재 감정을 대신한다.

한편 2015년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제 제법 윤곽을 갖춘 존재로 성장한다. 비록 어른이라기엔 조금 모자라지만 소년 소녀로 부르기엔 훨씬 단단해 보이는 모습이 되어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드디어 초반에 언급한 작가를 닮은 등장인물은 이제 독립된 주체가 된다. 초기작들은 불완전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 일기처럼 생략과 비유의 과장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러한 비약들은 특유의 색채와 물기를 머금은 질감 덕분에 현실 너머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숨이 초기작을 지배하는 성질이라면, 합정지구에서의 전시 《무지개 숨 제작소》(2017)는 숨의 형상화에서 벗어나 오롯이 숨을 제작하는 상상의 허구세계로 진입한다. 이때부터 수진은 어릴 적 기억에서 빠져나와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들, 색, 형태, 질감 등. 그리고 그간 불분명한 채로 남겨졌던 인물은 더 또렷해지고 정면을 응시하고 회화의 요소들을 다루는 능숙한 그림 제작자로 등장한다. 수진을 꼭 닮은 제작자는 외모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엔딩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람이 있다면, 수진을 닮은 제작자를 앞으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저 성장이라는 무조건적인 긍정의 서사에 그치지 않고 예술 자체가 위태로운 시대에 어떻게 회화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그곳이 설사 허구라 하여도. 허구가 가짜는 아니기에.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