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규(b. 1986)는 고려불화와 비단 채색 기법을 바탕으로, 인간 사회의 욕망과 모순을 동물의 형상에 투영해 회화적 우화로 구축해 왔다. 또 작가는 ‘시점’을 화두로 삼아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를 한 화면 안에 그려냄으로써, 이야기가 소멸하는 현대사회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변주해 나간다.


김훈규, 〈원형 감옥의 등대지기〉, 2020, 비단에 채색, 102x136cm © 페로탕

김훈규는 어린 시절 본 일본 애니메이션과 같은 이미지를 비단에 채색하여 동서양, 과거와 현재, 현실과 판타지가 한데 뒤섞인 독보적인 화면을 구사해 왔다.
 
작가는 신화나 전설,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의인화된 동물을 귀여운 캐릭터로 표현하여 계층 구조의 심화, 역사와 이데올로기처럼 우리 사회에서 어려워하고 터부시하는 주제를 다뤄 왔다.


김훈규, 〈House for Rent〉, 2023, 비단에 채색, 합성 보석, 45x40cm © 페로탕

이처럼 섬세하면서도 복잡한 화면을 통해 작가는 “결국은 이게 다 우리의 삶이다, 내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다”라는 것을 담고자 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그림은 개인이 서로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운명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혼란과 공포, 에너지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김훈규, 〈Whitenoise Leading the Birds〉, 2023, 비단에 채색, 합성 보석, 115x85cm © 페로탕

한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하며 작가는 여러 ‘관점’ 사이의 차이를 느끼게 된 것을 계기로, 세계 곳곳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러. 분야에 걸쳐 일어나는 ‘갈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국가, 시대,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같은 사건이나 상황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보며, 다양한 관점 및 해석의 동시성을 작품의 중심으로 삼았다.


《Eight Universes and The Machine》 전시 전경(The Approach, 2018) © The Approach

2018년 런던 The Approach에서 열린 개인전 《Eight Universes and The Machine》에서부터 김훈규는 ‘다중우주’ 개념을 통해 계속해서 변화하는 지정학적 문제를 다양한 요소와 입체적인 화면 구성으로 표현해 왔다.
 
전시에서 선보인 ‘The Big Picture’이라는 제목 아래 진행되어온 연작은 한국의 설화와 정치사, 민속을 독창적인 SF 서사와 결합해 하나의 거대한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이 작업에서 김훈규는 집요할 정도로 치밀한 묘사를 통해 방대한 이야기를 한 화면에 펼쳐낸다.
 
파편처럼 흩어진 여러 서사를 서로 엮어 유기적인 하나의 세계로 구축하는 그의 회화 안에서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상상력으로 가득한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공유하고 있다.


《Eight Universes and The Machine》 전시 전경(The Approach, 2018) © The Approach

이러한 그의 회화에는 동시대 사회의 물질적 풍요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과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교묘하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체제의 구성원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방식으로 그 시스템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우화적으로 드러낸다.  


《Eight Universes and The Machine》 전시 전경(The Approach, 2018) © The Approach

캔버스의 물리적 공간을 기준으로 구분된 각각의 세계관은 처음에는 화면 일부에 그려진 유리 패널의 형태로 드문드문 등장하다가, 2021년부터는 다수의 시공간이 한 화면에 중첩된 모습으로 표현되면서 마치 화면 전체가 파편화된 프레임 또는 거울처럼 그려지는 화면 구성으로 변화한다.


김훈규, 〈옥상 위의 점심 식사〉, 2022, 비단에 채색, 175x115cm © 김훈규

예컨대 2023년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 《쉿!》에서 선보인 일련의 회화는 민족 갈등, 세대 갈등, 젠더 이슈 등의 다양한 갈등 상황을 여러 시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원형 감옥의 등대지기〉(2020), 〈습지행 급행열차〉(2022), 〈다소 불안한 요가 동호회〉(2023) 등의 작품은 감옥, 기차역, 자연사박물관 등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한편 인간의 자리에는 인간이 아닌 다양한 모습을 한 동물들이 가득하다.
 
눈동자는 있지만 초점을 잃은 듯한 동물들은 인류사에서 일어났던 정복과 파괴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한다. 한편 이들 사이로 물이 흐르거나 뿜어 나오고, 불은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면서 시간의 흐름과 역사를 떠받치고 있는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김훈규, 〈다소 불안한 요가 동호회〉, 2023, 비단에 채색, 합성 보석, 175x115cm © 페로탕

또한 작품에는 위, 아래, 정면의 다양한 ‘시점’이 중첩되어 있다. 다시점에 의해 전체 화면에서 시작과 끝, 중심과 주변부가 무너진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이러한 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갈등의 상황을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며, 상호 갈등으로 이루어진 총체적 상황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김훈규, 〈Right People Right Place Right Time〉, 2023, 비단에 채색, 합성 보석, 45x40cm © 페로탕

다각적으로 구획돼 있는 유리 패널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화면처럼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유리 패널을 통해 보이는 세계는 다른 세계인데도 같은 공간 안에서 하나의 세계로 이어진다.
 
이러한 구성은 야만성이 내재한 인류의 역사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계속해서 순환하는 과정을 평면의 화면 안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김훈규, 〈Into the Red〉, 2024, 비단에 채색, 165x215cm © 페로탕

그리고 2024년부터 김훈규는 컬러 페인팅 작업을 진행해 나가면서 인간 사회의 갈등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를 더욱 추상적으로 화면에 담아내 왔다. 예를 들어, 컬러 페인팅 연작 중 ‘레드’ 시리즈에 속하는 〈Into the Red〉(2024)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펼쳐지는 삶의 혼란과 그 에너지를 담는다.
 
이러한 작업에서 작가는 색과 색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부딪히고 섞이며, 궁극적으로는 조화를 이루는지 실험함으로써 개인이 겪는 운명적 공포와 충격을 다룬다. 색과 색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움직임과 에너지는 종교와 이념, 계층 간의 갈등과 화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작가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일상적인 공간과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소재를 차용했다. 서울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고, 또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한강공원과 오리배가 작품의 중심적인 모티프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묘사된 상황 속의 내러티브가 아닌, 작품 속 공간과 캐릭터들의 개별적인 의지와 충돌, 그 곳에서 파생되는 혼돈과 불안, 그리고 분출하는 에너지 그 자체이다.


《The Prayers》 전시 전경(페로탕 서울, 2025) © 페로탕

한편, 2025년 페로탕 서울에서 열린 김훈규의 국내 첫 개인전 《The Prayers》는 작가가 오랜 시간 탐구해 온 동물 군상의 세계에서 확장되어, 종교와 신념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조명하였다.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종교는 초인간적인 세계, 불합리성, 인간의 약점까지도 정당화할 수 있는 가공의 힘을 지니며, 고유 체제와 의례, 문화적 측면을 통해 예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김훈규는 종교를 만물통치약처럼 여겨지는, 이성과 논리의 영역 바깥에 자리한 영역으로 보았다.


김훈규, 〈Reddish Green〉, 2024, 비단에 채색, 165x215cm © 페로탕

이 전시에서 작가는 종교적 레퍼런스를 두 가지의 방식으로 다뤘다. 첫 번째로는 종교별로 설정해 둔 지배적인 동물의 현시다. 2023년부터 화면을 종횡하며 등장한 거대한 동물의 형상은, ‘The Prayers’(2025) 연작에서 더욱 노골적인 기세로 등장해 가상 신화 속 의례를 따른다.
 
기독교의 붉은 가재, 불교의 뱀, 천주교의 남방 가재 등 종교적 권위 아래 활보하는 이 동물 무리는 특정 종교를 지시하기보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유구하고 무한한 욕망에 대한 직유로서 등장한다.
 
한편, 〈Reddish Yellow〉(2025)에서는 카나리아 무리가 러버덕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제 및 추종자들과 혈투를 벌이는 기발한 장면이 연출된다. ‘러버덕교’라는 당혹스러운 신념으로 표상된 인간의 삐뚤어진 절박함은 종교의 위치와 가치에 물음을 던진다.


김훈규, 〈Reddish Yellow〉, 2025, 비단에 채색, 170x120cm © 페로탕

또한, 이 작업에서는 색이 종교적 세계를 감지할 수 있는 단서로 제시되었다. 기독교와 천주교는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파란색으로―그리고 서로를 거울처럼 반영하듯〈Bluish Red〉와 〈Reddish Blue〉라는 제목으로―, 이슬람교는 녹색, 러버덕교는 노란색으로 대표되는 식이다.
 
더욱이 작가는 색을 회화 요소로서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기제가 발현되는 실마리로 활용했다. 이로써 색은 인간의 내면과 종교, 사회적 현실을 동시에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관객은 색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감상을 시작하고, 이를 종교적 맥락으로 포섭하여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다툼의 형태와 양상을 파악하게 되는데, 작가에게 이 자체는 하나의 정치적 현상이 된다.


김훈규, 〈Reddish Red〉, 2025, 비단에 채색, 165x215cm © 페로탕

이처럼 혼돈과 질서, 안과 밖, 하나의 신념과 다른 신념이 끊임없이 부딪히는 김훈규의 작품을 감상하며, 관객은 ‘무엇이 옳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정치, 사회, 역사 등 거대한 인간 사회의 구조에서 시작해 인간의 신념과 욕망이라는 내면을 탐구해 온 김훈규의 회화는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 내재한 구조와 모순을 관객 스스로 다층적으로 읽고 성찰하도록 유도한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대항적 정치가 될 수 있다" (김훈규, 작가 노트)


김훈규 작가. 사진: Josh Taylor. © 김훈규

김훈규는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한 후 영국 왕립예술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The Prayers》(페로탕 서울, 서울, 2025), 《Enemy of My Enemy Is My Enemy》(High Art, 파리, 2023), 《Big Picture: Another Universe from the Past》(E-Werk, 프라이베르크, 독일,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쉿!》(북서울미술관, 서울, 2023), 《Egress (with Sharif Farrag)》(High Art, 아를, 프랑스, 2021), 《환상속의 그대》(Various Small Fires, 서울, 2021), 《Korean Eye》(Saatchi Gallery, 런던, 2020), 《Invitation to the Rave》(Nunnery Gallery, 런던, 2018), 《Painting Now》(HIX Art, 런던, 2018)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