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민선, 〈직립식물〉, 2010, 종이에 수채, 37 × 51 cm © 이해민선

이해민선의 그림은 기묘하다. 잘 그린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읽을거리가 많아 보이는 그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림에는 눈길을 붙잡는 묘한 구석이 있다. 강렬한 표현도 없고, 세련되게 마름질 되지도 않은 그 그림이 기묘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적어도 내 생각엔) 우리가 지나친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지금 여기로 불러내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에는 유독 죽은 화분이 많았다. 물을 너무 많이 줘 쓰러져버린 선인장, 말라비틀어진 꽃나무 둥치, 혹은 그 흔적조차 사라져버리고 덩그러니 담겨있는 흙더미. 하지만 그것들은 소꿉놀이의 유용한 재료로 사용되었는데, 흙은 쌀이 되고 화분은 밥그릇으로 변모하였으며, 말라버린 가지와 이파리는 각각 젓가락과 반찬이 되었다.

버려진 화분들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이른바 체험 삶의 현장이었다. 나무 작대기로 흙을 쑤셔대던 기억, 물기에 젖어 눅눅한 흙으로 동그란 주먹밥을 만들던 베란다라는 공간. 가느다란 호스, 물줄기. 이해민선은 그런 것을 그린다. 흔히 볼 수 있지만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작은 사물들. 그녀가 그려내는 시선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앞이 아닌 뒤를 바라본다.

그녀의 작품 〈직립식물〉에 등장하는 화분, 비닐, 각목과 같은 모티브들은 배경의 강렬한 색감 탓에 곧바로 각인되지는 않는다. 텅 빈 듯 단조로운 색으로 채워진 배경은 익숙한 사물들을 더욱 생경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배경과 주제의 이러한 대비는 직립식물을 일종의 객관적 존재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그 묘한 대비가 아련한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그려내는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방식, 색감, 물성에 이르기까지 아이러니를 내포한 다양한 형태로 시공간을 되돌리는 기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직립식물〉에서 각목은 작품을 이루는 중심이다. 각목은 쓰러져가는 나무를 지탱해주기 위해 기꺼이 지지대가 되며, 버려진 것들이 모여 직립식물이 되기 위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한때는 각목 자신도 나무의 일부로서 살아있는 생명이었으나, 잘려지고 가공되어 생명이 사라진 이제는 하나의 도구로서 한때 자신의 모습이었을 다른 나무를 지탱한다.

작가는 물성은 같으나 각자 다른 역할을 하는 그들-죽어있는 각목과,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나무-을 ‘끈’이라는 매개체로 엮음으로써 잊혀 지거나 버려질 운명에 처한 이들을 자신의 세계로 불러들여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럼으로써 둘 중 어느 것도 쓸모없지 않다는 것, 그리고 새롭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과거의 모습으로 상정되는 살아있는 나무, 현재의 모습을 상징하는 각목이 끈이라는 매개로 접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죽어있는 현재가 살아있는 과거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민선, 〈멸치 산수〉, 2005, 단채널 비디오, 3분 37초 © 이해민선

작가가 이러한 아이러니에 관심을 보인 것은 〈직립식물〉이 처음이 아니다. 영상작업 〈멸치산수〉(2005)의 경우에 죽어서 가공된 마른 멸치가 물속에서 끓는 모습이 음악과 어우러져 마치 멸치가 살아서 왈츠를 추는 것처럼 연출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미 죽은 멸치의 모습이 타자의 살아있음, 혹은 과거에 살아있었던 모습을 지탱하는 지지대가 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면서도,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직립식물〉에서도 〈멸치산수〉와는 표현 양태만 바뀌었을 뿐 작가의 일관된 의식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멸치산수〉의 죽은 멸치가 왈츠를 추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블랙코미디적인 접근이었다면, 〈직립식물〉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해민선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문제의식은 죽어있는 현재가 살아있는 과거를 지탱한다는(혹은 죽어있는 ‘나’가 살아있는 ‘나’를 가능하게 한다는) 아이러니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이해민선의 작업을 기묘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직립식물〉에서는 그 다음단계가 보인다. 단지 과거와 현재를, 죽음과 삶을 병치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이들을 ‘끈’으로 묶어 새로운 존재의의를 모색한다.

즉 죽음과 삶의 허무한 흔적에 그치지 않고, 둘의 결합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발견 혹은 ‘직립’이라는 말처럼 홀로 섬에 대한 작가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죽어있는 현재도, 살아있는 과거도, 그리고 버려지고 부서진 모든 것들도 이제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