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미술에서 조각은 회화에 뒤이어 활발하게 되돌아오고 있다. 조각가를 자처하며 새로운 조각의 방법을 연구하고 힘있는 조각 작품을 만들어 보이려고 애쓰는 작가들이 늘어났고, 이들의 활동을 개별적 또는 집합적으로 조명하려는 기획 전시들도 여럿 만들어졌다. 하지만 ‘되돌아온다’라는 것은 조각이 사라졌던 적이 있다는 말인데, 이런 주장은 반박당하기 너무 쉽다. 1995 년 건축물 미술작품 설치 제도가 시행된 이래 얼마나 많은 조각 작품들이 도시 경관에 들어왔는가? 조각적 생산이 양적으로 위축되었던 적은 없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조각이 법적으로 건축물에 부속하여 도시 환경에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이 되면서, 그것은 역전된 레디메이드 같은 운명에 처했다. 원래는 미술 작품이어야 할 것들이 사실은 아무도 미술 작품을 기대하지 않는 비미술적 맥락에서 무관심하게 양산되고 방치되면서, 드물게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이들에게 미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회화나 조각처럼 전통적인 미적 매체를 바탕으로 미술 작품이라는 특별한 대상을 창조한다는 관념 자체가,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해도, 다소 구태의연하게 여겨지기 시작한지는 꽤 오래 되었다. 한국의 경우 늦어도 1990 년대부터 영상과 디지털 미디어가 매체 탐구의 새로운 관심사로 부상했고, 매체 중심적 사고를 넘어 미술 자체의 구획을 재고찰하는 다양한 방법의 개념적 작업들이 활성화되었다. 이와 함께 전시장은 일상 사물과 구별되는 미술 작품만의 특별한 거처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질적인 것들의 기호적, 건축적, 수행적 배치를 구성할 수 있는 열린 무대로 변모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상대적으로 잘 거론되지 않는 것은, 이렇게 달라진 미술 환경에서 조각을 한다는 것이 불현듯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소를 전공한 많은 작가들은 입체 작업을 하더라도 굳이 ‘조각’이라는 말로 작업을 설명하지 않으려 했고, 더 많은 경우에 미디어 설치로 작업을 확장하거나 아예 영상 작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김민애는 2000 년대 중반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소를 전공했고, 미술의 의제로서 조각이 수면 아래로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온 지난 십여 년 동안 꾸준히 조각적인 것의 문제를 탐구해 왔다. 하지만 그의 접근은 조각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기념비적인 덩어리로 공간을 장악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그는 조각이 놓이는 공간을 조각의 거푸집이자 좌대로 발견하는 독특한 관점에서 이상한 사물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 사물을 건축 자재이자 미디어 삼아 이상한 공간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움직임을 이어 나갔다. 이때 조각적인 것은 사물의 배타적 속성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의 연합적 관계 속에서 출현한다. 김민애가 만드는 것들은 공간 속에 놓이는 여러 대상들 중 하나로서 일반적인 사물의 질서에 귀속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공간 속으로 스며들어 건축적 질서로 통합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작업에서 조각적인 것은 사물과 공간 사이의 틈새를 열어 보이는 역량을 가진 것으로서, 전통적인 조각의 매체—덩어리를 만드는 각종 재료와 그에 기반한 관습들의 총체—에 한정되지 않는 새로운 문제로 재정의된다.

김민애는 물리적 공간의 구조와 형태, 그 속에서 허용되는 이벤트의 유형과 범위를 구획하는 건축적 질서에 교묘하게 기생하여 그것을 교란시키며 공간 지각을 의외의 방식으로 변형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형적인 예로, 《젊은 모색 2013》에서 전시 장소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난간 형태를 차용하여 전시장 여기저기에 정체 불명의 난간 모양 구조물을 설치한 ‘상대적상관관계’ 연작(2013)이 있다. 원래 난간은 계단처럼 단차가 있는 곳에서 관객이 다치지 않도록 움직임을 제한하는 장치지만, 작가가 만든 난간 모양 구조물들은 작품이 관객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접근을 금하는 안전선의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동선을 애매하게 가로막거나, 또는 계단이 없는 곳에서 마치 천장 너머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것처럼 가상의 동선을 안내하기도 한다. 이런 작업은 전시장을 폐쇄하거나 전시장 바닥을 부수거나 하는 공격적인 제도 비판적 접근이나 또는 전시장을 순수하게 물리적 공간으로 새롭게 지각하도록 유도하는 현상학적 접근을 상기시키지만, 순순히 그런 부류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김민애의 사물이 특정 범주에 귀속되지 않고 자꾸만 미끄러지듯이 그의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 작가는 공간이라는 문제를 물리적이고 제도적인 제한 조건, 외부적 환경인 동시에 작가에게 이미 내재화된 하나의 틀로서 발견하고, 이 구속적 공간에 대한 탐구를 조각적으로 풀어 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대학원 재학 시절 입체 조형물을 보관하기 위해 그 형태에 꼭 맞게 홈을 판 상자를 재료 삼아 여러 가지 작업을 시도했는데, 상자의 내용물은 상자 안에 끼어 있기도 하고 (<030516>, 2005) 상자를 빠져 나와서 자기가 빠져나온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다가 (<040111>, 2004-7), 마지막에는 작별 또는 만남의 인사를 하는 듯한 포즈가 각인된 수백 개의 상자들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 2006-7). 사물과 공간의 연쇄는 같은 자리에서 핑퐁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나아가고 다른 것으로 변모한다.

여기서 움직일 수 있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어쩌면 그는 조각을 넘어, 심지어 미술 바깥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민애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작가가 결국 제도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공간과 사물이라는, 한쪽에는 바퀴가 달리고 다른 한쪽에는 버팀쇠가 붙은 것 같은 이상한 이동 장치를 운전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뒤뚱뒤뚱 움직여 다녔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간의 행적을 딱히 조각에 대한 탐구라고 주장하지 않지만, 계속해서 조각적인 것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의식하면서 그것을 반영하는 동시에 비스듬히 벗어나는 동선을 찾으려고 애썼다. 각각의 작업들이 그때그때 외부적으로 주어진 조건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전체적 궤적을 하나의 연대기나 체계로 말끔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업이 위치하는 맥락에 따라 작가가 그에 대응하는 방법의 유형이 생겨나고, 이 유형들이 반복되면서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하거나 돌발적으로 변모를 이루는 여정을 더듬어 볼 수는 있다.

먼저 운동과 정지 사이에서 모순적인 신호를 보내는, 간단히 말해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를 상연하는 작업들이 있다. 작가는 기존 공간에 주변의 건축적 요소를 흉내낸 최소한의 사물들을 덧붙여서, 사방이 트였지만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거나 (<막다른 골목>, 2010) 또는 방향이 선명하게 주어져 있지만 그쪽으로 움직일 방도가 없는 (, 2011) 상황을 조성한다. 그래서 작가가 도입한 사물들은 외관상 기능적 사물과 유사하지만 쓸모가 없는데, 이는 기둥이 불필요한 트러스 구조에 그 외형을 흉내내어 바퀴 달린 기둥을 덧붙인 <지붕발끝>(2011)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기둥 같아서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거기 있을 필요도 없다. 제대로 된 사물도 아니고 의미 있는 건축적 요소도 아닌 채로, 빨간색 바퀴는 이중의 불필요성을 담담히 짊어지고 서 있다.

영국 유학 시절 주로 학교를 기반으로 형성된 이러한 접근은, 작업을 생산하고 작가를 양성한다는 공간의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고, 일상용품도 아니고 건축도 아닌 조각의 불가능한 위치 짓기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다. 여기서 좀 더 전시장용 조각 작품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사물의 자기부정성이 강화된다. 그것은 전시 공간의 직각 모서리에 꼭 들어맞게 세울 수 있지만 다리가 하나뿐이고 바퀴가 달려서 혼자서는 설 수 없거나 (<화이트큐브를 위한 구조물>, 2012), 목발 세 개를 연결하여 혼자 설 수 있지만 본래의 운동적 기능은 상실하거나 (<자립조각>, 2012), 또는 전시장 내에 합법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물들의 기능과 의미를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특정성을 스스로 무효화한다 (<황금 기둥들 – 테이블, 좌대, 오브제>, 2012)

작가는 사물 스스로 자기를 주장하고 입증해야 하는 이 ‘막다른 골목’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미 고전적인 화이트큐브처럼 오로지 미술 작품만을 위한 순수 공간을 표방하지 않고 장소의 역사성과 건물의 건축적 특성을 살려 미술 외적 맥락에 개방된 전시장이 많이 있어서 작가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사물들은 일어서서 움직이고 싶다는 의지나 그 반대급부의 무기력을 버리고, 자기가 놓인 공간을 물리적 또는 가상적으로 반영하고 증식시키는 데 집중되었다. 이를 위해 벽체와 커튼, 창문과 거울과 액자, 또는 그저 여러 가지 크기와 투명도와 반사도를 가지는 평평한 사물들이 도입되었다. 특히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가짜 창문의 형상이다. 전시장의 내외부를 나누는 벽체 앞뒤에 창문 모양으로 틀을 짠 캔버스와 조명을 설치하거나 (, 2012), 모든 칸이 똑같이 생긴 경찰서 유치장의 칸막이 벽 앞뒤에 거울을 달아서 (, 2012), 거기 창문이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장치들은 작가의 뜻대로 관객의 눈을 속이는 일루전에 그치지 않고, 관객 스스로 그 창문 너머에 대해—실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확인할 수 없는 공간을—상상하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공용 스크린으로 기능한다.

엄밀히 말해서,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도라기보다 2008 년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 <익명풍경>의 접근을 재차 시도한 결과였다. 다만 당시에는 작가가 자기 주변에서 직접 경험한 공간적 착각과 그로부터 촉발된 몽상을 전시장 내에 물질적으로 재상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때의 작업들은 작가 자신을 포함해서 현재 그 공간을 오가는 사람들이나 과거에 그곳을 점유했던 사람들의 알 수 없는 기억과 상상에 좀 더 개방적인 구조를 취했다. 이러한 접근은 큐레이터 권혁규와 함께 진행한 일일 프로젝트 <리차드 스미스>(2013)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작가는 재개발을 앞둔 주택단지의 상점 건물을 활용한 프로젝트 스페이스를 무대로 그 지역에 살았던 가상의 인물을 상정하고, 그와의 만남을 상상해볼 수 있는 모호한 상황을 조성했다. 이곳에서 작가와 관객은 미미한 물질적 잔해만으로 잘 모르는 존재를 떠올려야 한다는 동일한 곤경에 처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셔터가 반쯤 내려간 이 공간의 입구는 첫 개인전 당시 작가가 요철 무늬 벽을 셔터 달린 문으로 착각했던 경험을 반추하여 전시장 벽면에 거울을 붙이고 셔터를 달았던 <지속된 반사>(2008)를 아주 닮아서,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그 거울 너머의 공간이 시공간을 가로질러 런던에서 개방된 것 같은 허황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가상적 도약 또는 비약의 움직임을 창출하는 것은 이후 김민애의 작업을 견인하는 주된 관심사다. 2013 년 두번째 개인전 《습관에 관한 소고》에서 처음 등장한 커다란 분홍색과 검정색 고무공은 구르거나 통통 튀어서 어디론가 떠나버릴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운동성을 함축한다. 이 요소들은 이후의 작업에서 비물질적인 조명 (〈검은, 분홍 공〉, 2014), 전시장 벽면에 밀착된 그래픽적 평면 (〈조건부 드로잉〉, 2015), 또는 작고 단단한 포켓볼 공 (〈검은, 분홍 공〉, 2018) 등으로 모습을 바꾸어 가며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쌀알을 흩뿌려 점을 치는 일이 정말로 미래를 읽어낸다기보다 특정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강박적 불안을 해소하는 행위에 가까운 것처럼, 이 공들은 작가의 작업이 주어진 조건과 그에 대응하는 루틴에 기계적으로 종속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무작위성을 도입한다.

최근 김민애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기보다 최대한 비우면서 그 속에 일렁이는 무언가 이상한 상념, 인상, 또는 명령을 유령처럼 불러내는 데 집중한다. 2018 년 개인전 《기러기》에서 작가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전시장을 일종의 무빙 이미지 장치처럼 변화시켰다. 대체로 날개 크기에 비해 뚱뚱해 보이는 새들의 하얀 윤곽선이 원래 크기와 무관하게 하얀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우는 크기로 돋을새김 되어, 빛과 소리의 움직임에 따라 얼핏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당연히 움직이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조각적인 것이 어떻게 움직여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작가의 전작을 꿰뚫는 하나의 문제 의식이었다면, 《기러기》는 그에 대한 가장 최근의 답변이다. 조각적인 것은 여전히 광장공포와 폐소공포 사이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갈팡질팡한 곳에 있지만, 그 속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그 움직임의 귀결을 조각이라고 불러야 할지, 또는 다른 어떤 매체의 발명이라고 평가해야 할지는,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작가는 그것을 가능한 오랫동안 미정으로 남겨 놓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