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영은 조각을 전공했지만, 작품에 글자, 숫자, 돈, 지문, 이파리 같은 가볍디 가벼운 소재를 담는다. 캔버스 천이나 트레이싱 페이퍼 같은 곳에 수놓아지고 새겨진 기호들은 지상 위에 우뚝 선 기념비를 지향하는 전통적인 조각의 파토스를 벗어나 있다. 가령 2008년에 발표한 한 작품을 보면, 한웅큼도 안 되는 실 뭉치로 산의 이미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돌과 나무를 쪼고 금속을 용접하는 스케일이 크고 거친 이전의 작업에 비해 재료들은 작고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현재의 작품에도 여느 조각 작업 못지않은 노동 강도가 새겨져 있다. 이전의 물질적 장황함에서 벗어나 내부로 파고들어가는 스타일로 변모했을 뿐이다. 많은 작품에서 보이는 까칠한 표면들은 조각적 노동이 집적된 것으로, 촉각성을 중시하던 이전 작업과 연속적이다.
이 전시에서도 3차원적인 입체 작품이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2차원적인 것이 집적된 것으로, 기본적으로 평면으로부터 출발한 것들이다. 조재영의 많은 작품이 점과 선으로부터 출발하여 평면이나 부피가 창조된다. 평면은 작업 내부로 보다 용이하게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으로부터 긴장감과 예민함이 발생한다.
‘Empty Material’라는 전시 부제는 비워낸 물질과 차원의 감축, 그리고 이에 비해 강화되는 내밀성을 예시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밀성이란 반복적 수행성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며, 작가의 내면 표현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다. 객관성의 상징일 수 있는 물질을 비워내기에 몰두한다는 것은, 객체의 짝패라고 할 수 있는 주체도 비워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가령 무미건조한 숫자의 나열을 보여주는 한 작품은 시작은 있지만 조직하고 끝맺으려는 의지가 없다.
숫자의 순서는 있지만 단순히 나열된 상태로, 무덤덤하게 지나가버리는 일상의 나날들을 일기 같은 느낌으로 새겨 넣었으며 배열했다. 몇 십일이 지나도 비슷한 패턴이다. 다만 그것을 새기기 위한 가혹한 노동과정 만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일상의 모든 순간을 작업으로만 가득 채우고자 하는 의지까지 감추어지지는 않는다. 작가는 같은 방식으로 깃털을 새긴 적도 있다. 숫자나 깃털 같은 대상이 가지는 무미건조함, 가벼움 같은 가치는 종이가 뚫리기 직전의 긴장감과 병치된다.
그것은 공허함과 가혹함이 교차하는 삶의 질서에 상응한다. 삶과 달리, 예술은 공허함 대신에 충만함이 가능할 수 있지만, 가혹함까지 면제되지는 않는다. 이전에 발표된 작품 중, 니들을 이용하여 캔버스에 도포된 아크릴 물감을 긁어내어 만든 장미꽃 이미지는 아름다움의 이면이 무엇인지 폭로하는 듯하다. 수평적, 그리고 수직적인 차원에서 순서는 있지만 순서의 의미를 탈각시키는 종이 입체 작업은 아래의 좌대와 연결되어 시간이 공간으로 집적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컴퓨터로 워드를 쳐서 자간과 부호를 다 없애고 글자만 남겨두고 종이에 복사해서, 글자 간격만큼 한 칸씩 줄여나가 마지막에 한 글자가 남을 때까지 쌓아올린 것이다. 한글자만 보이는 면이 맨 바닥 면이 되어 작품 전체적으로는 중심 같은 역할을 하는데, 중심에 오는 단어는 핵심적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 프로세스에 의해 임의적으로 결정된 것일 뿐이다.
텍스트는 소설책이나 미술사 등에서 발췌한 글자들로, 읽을 의지만 있으면 읽을 수는 있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자의 역할이 아니라, 임의적인 기표로 보여 진다. 규모와 차원만 변형되었을 뿐, 거의 피라미드를 쌓는 정도의 공력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