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b. 1989)은 선택의 순간에 생겨나는 미련이나 아쉬움, 지나간 장면의 여운과 감각의 어긋남에 주목해 왔다. 그는 흘러가는 시간과 다시 올 수 없는 공간에서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회화적 구조로 재조합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작업은 회화와 드로잉, 설치를 넘나들며 감각의 밀도와 시간의 리듬을 시각화한다.


김보경, 〈늦은 밤 솟아오른 생각〉, 2024, 캔버스에 아크릴, 53x45cm © 김보경

김보경의 작업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들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그러한 장면들이 오래 남는 이유를 구체적인 형태나 색감이 아닌,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런 감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희미해지고, 다시 떠올렸을 때는 처음과는 다른 결로 다가왔다.


김보경, 〈천사의 야생화〉, 2023, 캔버스에 유채, 162.2x130.3cm © 김보경

김보경은 이처럼 지워졌지만 남아 있는 것들, 말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감각적으로 남는 형상들을 어떻게 다시 그려볼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미지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들, 혹은 원래의 기능을 잃은 사물처럼 지나간 시간과 공간의 파편들을 모으고, 자르고, 변형하며 새로운 회화적 형상으로 전환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면은 하나의 새로운 풍경이자, 작가만의 조형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로 제시된다.


김보경, 〈감각의 속도〉, 2022,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72.7x72.7cm © 김보경

화면의 구성은 이미지들이 지닌 감각적 리듬을 따라 이루어진다. 작가는 감각이 언제나 동일한 속도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보며, 이러한 어긋남의 틈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감각의 속도를 붙잡아 회화적 시간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하나의 장면은 기억 속에서 다른 구조로 변형되고, 그 구조는 다시 화면 안에서 새로운 리듬과 밀도로 재구성된다. 이처럼 지연되고 어긋나는 방식으로 구축된 그의 화면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의 미세한 흔들림과 잔상을 포착한다.


김보경, 〈Layered color 2017-4 (Recombination)〉, 2017, 캔버스에 아크릴, 130x324cm © 김보경

또한 김보경은 오늘날 디지털 환경 속에 편재하는 무수한 시각정보들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수집해 나갔다. 계속해서 이미지가 생산되고 확산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우리는 종종 이성적 판단과 무관하게 대중매체로부터 무의식적인 이미지의 선택을 강요받곤 한다.
 
작가는 이러한 오늘날의 매체가 양산한 수많은 이미지들을 무작위적으로 선택하고, 그로부터 추출한 기호를 회화적 요소로 가져와 새롭게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물은 무의식적으로 이미지를 선택했던 이유에 대한 일종의 ‘메모장’이 된다.


김보경, 〈8-2015〉, 2015, 종이에 콜라주, 17x12cm © 김보경

초기의 작업에서 김보경은 패션잡지와 같은 매체의 인쇄물에서 특정한 이미지의 패턴 및 색상을 선택해 ‘콜라주 드로잉(collage drawing)’이라는 방법으로 화면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대의 미감을 반영하고 있는 패션 혹은 인테리어 잡지 등에 담긴 디자인 제품들의 이미지를 찢어 새롭게 조합했다.
 
작품에서 선택한 부분은 그 자체로서의 기능성보다는 면과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조형적 요소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이미지는 작품으로 옮겨지며 기호화되고, 조형적 요소의 정보들을 추출해낼 만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김보경, 〈Pieces Components〉, 2018, 스티로폼에 스프레이 페인트, 가변설치 © 김보경

이 작업을 기점으로 김보경은 디지털 이미지로 옮긴 이후 다시 캔버스 위에 회화로 그려내어 하나의 이미지 혹은 한 작품이 다른 형식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원본 이미지가 디지털 드로잉, 회화, 판화, 입체 등 다양한 차원을 오가면서 새롭게 생성되거나 소멸, 변환되는 과정을 관찰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어긋남과 균형의 리듬을 화면에 포착하고자 했다. 


김보경, 〈균형을 바라보는 정원의 새벽〉, 2023, 캔버스에 유채, 130.3x162.2cm © 김보경

2023년도 개인전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균형》에서 작가는 무수히 떠다니는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재조합하며, 의식과 무의식에 의한 ‘선택의 집합체’를 화면 안에 구성하였다.
 
그의 화면에는 비정형의 형태들이 서로 얽혀 있고 무작위적으로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그들 나름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경계면을 맞닿으며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모습은, 오늘날 수많은 선택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이루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우연한 질서》 전시 전경(아트플러그 연수, 2024) © 김보경

그리고 2024년에 열린 개인전 《우연한 질서》에서 작가는 이미지가 가진 제 각각의 순간과, 그 순간만이 가진 면모를 한 화면 안에 담는 시도를 보였다. 전시에서 선보인 회화들은 비슷한 구도를 가진 연작과 함께, 단독 장면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작업들 또한 잡지나 SNS 게시물에서 수집한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작가는 여러 매체에서 이미지를 모은 뒤 편집 툴로 가져와 장면을 여러 버전으로 만들었다. 그 중에서 몇 개를 선택하여 회화로 그리는데, 캔버스나 종이에 옮길 때 색감이나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 변화하거나 덧붙여지기도 하였다.


《우연한 질서》 전시 전경(아트플러그 연수, 2024) © 김보경

자세히 들여다보면 김보경의 회화에는 ‘수집’의 두 단계가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회화의 평면에 들어오기 이전의 단계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화면 안으로 편입되는 순간이다. 작가는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듯 이미지를 수집하고, 그렇게 모인 이미지들을 다시 화면 안에 저장하고 축적하는 또 다른 수집의 과정으로 이끈다.
 
나아가 그의 작업에는 ‘편집’의 두 단계 또한 겹쳐진다. 작가는 이미지를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몰입하여 끊임없이 모으는 ‘편집증적(執着的) 수집’의 태도를 보이는 한편, 그렇게 축적된 이미지들을 자신만의 시각과 감각에 따라 선별하고 재구성하는 ‘편집(editing)’의 과정을 수행한다. 김보경의 회화는 이처럼 수집과 편집, 축적과 재구성의 반복 속에서 형성된다.


김보경, 〈우연한 질서-COLD〉, 2024, 종이에 수채과슈, 54x39cm © 김보경

그런 의미에서 김보경의 회화가 보여주는 한 장면은 여러 장면 중의 하나인 동시에 여러 장면을 담는다. 그의 회화 공간에서 사물과 장면의 이미지는 ‘복사’나 ‘오려내기’, ‘붙여넣기’의 단순 반복에서 벗어나 사물과 장면, 기존 이미지와 나의 이미지가 어우러지는 결과를 낳는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단순히 외부에 있는 현실을 그대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시선을 경유하여 공간을 만든 것이다.
 
회화 공간 하나에 여러 공간이 있고, 평면 하나에 여러 면이 보인다. 그것은 이미지들의 나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김보경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공간이다.


《풍경설계》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5) © 김보경

한편 2025년도 개인전 《풍경설계》를 통해 김보경은 작업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시선을 옮겨와 과거의 장소와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 새롭게 연결하기를 시도하였다.


《풍경설계》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5) © 김보경

전시는 인천이라는 장소적 맥락을 기반으로, 도시의 기억과 개인적 감각이 중첩되는 방식을 탐구하였다.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작가는, 인천에서 부산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재조합하며, 익숙함과 낯섦이 교차하는 장면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물인 ‘수미상관’ 연작은 수집한 이미지를 절단하고 변형하여 낯선 대상과 향수의 대상을 회화로 엮어낸다. 과거와 현재를 공간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작가의 내면을 조형적으로 표현한다.


김보경, 〈해무 III〉, 2025, 나무에 목탄, 파스텔, 31.8x31.8cm © 김보경

또 최근의 작업에서 작가는 전작과 달리 색을 최소화하고 흑백의 농도에 집중하여 그림을 그린다. 이러한 흑백 톤의 화면은 균형과 불균형의 경계를 오가는 미완결의 상태 속에서 감정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지나간 장면이 지금 바라보는 풍경과 겹쳐질 때 생기는 선명함과 흐릿함이 뒤섞인 감각을 목탄과 파스텔을 이용해 포착하거나(‘해무’ 연작), 이미지의 흔적을 따라가며 지워지고 덧붙여진 형상의 변화를 탐색한다(‘침식’ 연작).
 
이처럼 색이 제거된 흑백의 화면은 감각의 층위를 더욱 미세하게 드러내고, 무너진 경계와 그 주변의 여백은 또 다른 이야기의 단서가 된다.


김보경, 〈그물에 걸린 윤슬〉, 2025, 캔버스에 목탄, 파스텔, 아크릴, 130.3x162.2cm © 김보경

이렇듯 김보경은 이미 지나간 것들이 남긴 감각의 흔적을 좇으며, 이를 새로운 회화적 풍경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기억 속 장면이 결코 고정된 형태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 또한 끊임없이 흔들리며 변화하듯, 그의 화면 속 이미지들 역시 서로 다른 시점과 구조, 감각의 리듬과 속도를 품은 채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놓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그의 회화는 쓰러질 듯하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감각을 붙들어 놓는다.


김보경, 〈가까스로〉, 2024, 종이에 아크릴, 120x90cm © 김보경

"나에게 회화는 흘러가는 장면, 지나가버린 감정을 다시 느껴보려는 시도이며, 다시 그 장소로 다가가 머무르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잠시 멈춰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호흡이다.
 
삶도 작업도 언제나 유연하게 흔들리지만, 나는 그 흔들림 속에서 보이는 무늬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 무늬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 그것을 계속해서 그려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보경, 작가 노트)


김보경 작가 © 인천아트플랫폼. 사진: 남산제작소.

김보경은 국민대학교 미술학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풍경설계》(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5), 《우연적 질서》(아트플러그 연수, 인천, 2024),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균형》(동작아트갤러리, 서울, 2023)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흐르는 것들에 대하여》(갤러리박영, 파주, 2025), 《레이더: 세상을 감각하는 눈》(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4), 《Youth》(화이트스톤 갤러리, 서울, 2024), 《잔잔하게 휘몰아칠 때,》(갤러리호호, 서울, 2024), 《내부확장》(키미아트, 서울, 2023), 《퍼폼2019: 린킨아웃》(일민미술관, 서울, 2019), 《제3회 뉴드로잉 프로젝트》(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양주, 2018)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김보경은 2024년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화랑미술제 ZOOM-IN Edition 5에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