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허앵(b. 1989)은 염세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아포칼립스를 대비하는 미래의 인류에 대해 그린다. 그의 작업은 한국과 일본의 1990년대 게임과 만화의 세계관을 참조하여, 모성과 여성성을 다루는 것에서 출발해 인류세를 지나며 지나치게 비대해진 인간의 자리를 재정립하는 시도들로 주제를 확대하고 있다.


 《BAD ENDING ~어쩐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저녁~》 전시 전경(아카이브 봄, 2015) © 김허앵

김허앵의 작업은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 망상, 그리고 그것을 깨트려주는 현실의 트리거들에서 시작된다. 그는 평소 생활에서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것들-사람 혹은 사건들-을 재료로 이야기를 짓는다.
 
이를테면, 그의 첫 번째 개인전 《BAD ENDING ~어쩐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저녁~》(아카이브 봄, 2015)에서는 근시일에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으로 혼란스러운 시위현장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담았다.


《BAD ENDING ~어쩐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저녁~》 전시 전경(아카이브 봄, 2015) © 김허앵

길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을 소재로 직조된 그의 이야기들은 총 80장의 드로잉으로 구성되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권태로운 일상에 질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생활로 나아가지만 어느덧 원점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상황이나 사건, 상징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한 작가의 물음이면서 스스로가 내린 답이기도 하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결국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야기 속 주인공은 망태를 만들고 칼을 간다. 과연 자신이 상상한 결말이 다가올 것인지 기대하면서. 물론 잘 되든 그렇지 않든, 그 둘 모두가 예측된 미래일 뿐이다.”


《mama do》 전시 전경(킵인터치, 2020) © 김허앵

한편, 2020년 킵인터치에서 열린 개인전 《mama do》에서 김허앵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며 ‘엄마’로서의 실제 생활과 감정 등을 이야기하였다. 전시를 이루고 있었던 작품들은 시종일관 엉뚱한 유머 감각과 해학으로 육아 일상을 그려내고 있지만 동시에 본능적이고 광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mama do》 전시 전경(킵인터치, 2020) © 김허앵

가령 그의 그림 속에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듬성듬성 빠진 머리칼을 한 여성이 자신의 머리통이 날아가는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거나, 게임기 속에 갇혀 아이가 어질러 놓은 장난감을 끝없이 치우는 장면 등이 발랄한 색채와 만화 캐릭터와 같은 유쾌한 그림체로 묘사되어 있다.


《mama do》 전시 전경(킵인터치, 2020) © 김허앵

또 그림 속에서 김허앵은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유모차를 끄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김허앵은 육아를 “액체”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의 변이나 침과 같은 배설물, 엄마의 젖, 감기에 걸려 흐르는 콧물, 땀에 젖은 배냇머리와 축 늘어져 있는 엄마의 티셔츠와 같은 육아의 일상은 언제나 축축하거나 끈적이거나 흘러내린다.  
 
이렇듯 김허앵의 작업에서 ‘엄마하기’는 긍정이나 희망과 같은 낙관주의로 이상화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질척하고 혼란스러운 일상 그 자체를 유머와 해학으로서 농담처럼 증언한다.


김허앵, 〈산부인과에서〉, 2021, 캔버스에 유채, 97x162cm © 김허앵

김허앵은 매일 반복되는 가사와 돌봄 노동으로 인해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과 거기서 발생하는 지침과 피로를 블랙 코미디처럼 자조 섞인 웃음으로 드러내는 반면에, 그의 그림 속 아이들은 모두 당당하게 그려진다.
 
늘 지치고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은 오직 어른의 몫이며, 아이는 항상 흐트러짐 없는 눈빛으로, 마치 자신의 목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플레이어처럼 당당하게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Furry Ways》 전시 전경(미학관, 2022) © 김허앵

한편, 2022년 미학관에서 열린 개인전 《Furry Ways》는 작가의 오랜 친구였던 반려견의 죽음을 겪으면서 시작되었다.
 
전시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간 반려견이 당도했을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세계는 실존하지 않는 장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던 한 오래된 게임에 대한 작가의 기억을 통해 구축된다.


《Furry Ways》 전시 전경(미학관, 2022) © 김허앵

김허앵은 3등신의 플레이어를 그림 속에 내려놓았다. 아이의 모습을 한 플레이어들은 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들은 관찰하고 연구하되 괴물을 물리치지 않고 약탈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들은 그저 그곳을 산책하고 탐험하며 지나간 감각을 통해 성장해 나간다.  


《나의 지구를 지켜줘》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3) © 김허앵

나아가 2023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개인전 《나의 지구를 지켜줘》에서 김허앵은 더욱 상상력에 기반하여 어른인 자신이 보는 세상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관점과 자신의 딸의 또래들인 다음 세대로 설정된 소녀들이 보는 미래에 대한 세상의 이미지를 은유적이고 신화적 이미지로 제시하였다.
 
전시 제목에는 유아기를 거친 딸이 소녀로서 성장하기 시작한 지금, 지구라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그들의 세대가 제대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화면에 묘사된 인물들은 작가 자신이 함께 투영되었지만 동시에 씩씩하게 서 있을 다음 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의 지구를 지켜줘》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3) © 김허앵

전시작을 살펴보자면, 김허앵은 작품 〈꽃들〉(2023)에서 날개를 단 생물들이 추락하는 이미지를 통해 어두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소개된 다른 작품들을 통해 희망적인 요소를 남겨 놓는다.
 
바라보는 것과 나아갈 곳이 다른 이 두 세대가 마주할 세상은 어스름한 해질녘이나 동틀 무렵의 장면으로 표현한 〈사랑하는 저녁〉(2023)과 〈산 꼭대기〉(2023) 등에서 상징적인 도상으로서 표현된다. 또한 어른은 바닷속 문어의 모습으로(〈문어 아가씨〉(2023)), 소녀들의 모습은 날개를 달고 있거나(‘거인’ 시리즈), 산 위에 자리한 모습으로 보여진다(〈우리가 나눈 짙은 꿈〉(2023)).


《나의 지구를 지켜줘》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3) © 김허앵

더불어, 이 작업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풍선껌 불기, 모래집 놀이 등은 무용하면서도 무한히 가능한 행위를 상징한다. 그의 그림 속에서 소녀들은 여전히 배드 엔딩을 믿고 있는 작가, 즉 어른들과는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간다.


《Dear morning》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5) © 김허앵

《나의 지구를 지켜줘》에서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며, 자신과는 다른 시각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딸의 모습을 투영했던 작업에 이어, 김허앵은 2025년 개인전 《Dear morning》을 통해 또 다른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을 선보였다.
 
전시 제목은 어두운 밤을 지나 맞이한 아침에 건네는 인사로, 작가가 기대하는 새로운 희망의 서사를 담고 있다.


《Dear morning》 전시 전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5) © 김허앵

산으로 둘러 쌓인 거주 공간은 갑작스럽게 마주하는 벌레들이 일상 다반사다. 이들이 익충임을 알게 된 작가는 이들과의 공생을 결심한 후 자신의 그림 속 주인공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혐오스러웠던 벌레들은 동화 속 의인화된 귀여운 캐릭터로 변모했고, 막연하게 지속되고 있었던 불안한 미래에 대한 감정의 게임의 레벨을 하나씩 정복하며 성취를 쌓아가는 우직한 ‘바위’ 캐릭터들로 구현되었다. 즉, 이들의 여정은 위기와 불안을 도전의 무대로 전환하는 상상력으로서 제시되었다.
 
따라서 《Dear morning》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위기를 긍정과 희망의 회로로 변환하려는 작가의 시선을 담았다. 작품은 크고 경쾌한 붓질로 물감의 질감을 담대하게 표현하며, 김허앵 특유의 유머와 동화적 상상력이 화면 위에 펼쳐진다. 전시 공간은 마치 동화 속 무대처럼 화사하고 발랄한 색채로 가득 채워졌다.


김허앵, 〈The Explorer〉, 2025, 캔버스에 아크릴, 100x30cm © 김허앵

이렇듯 김허앵은 딸을 둔 엄마로서, 인간적 감성과 윤리적 정서가 황폐해져 가는 사회, 그리고 문명의 편리함이 초래한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 속에서 다음 세대의 에너지와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로써 그의 화면 속에는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난 다원적이고 경계 없는 신인류가 자리해 있다.
 
이러한 김허앵의 작업은 미래에 대한 비관과 불안, 현실의 혼란 등을 담아내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반복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만들어내는 리듬에서 나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느낀다. 인간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것이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를 나는 기대한다." (김허앵, 작가 노트)


김허앵 작가 © 김허앵. 사진: 양이언.

김허앵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회화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Dear morning》(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25), 《나의 지구를 지켜줘》(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23), 《Furry Ways》(미학관, 서울, 2022), 《먹고 마시고: 사랑하지만 역겨운 나에게》(인스턴트 루프, 서울, 2021)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마더링 플루이드》(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26), 《미지의 운동장》(팩토리2, 서울, 2025), 《Milky Way》(눈 컨템포러리, 서울, 2024), 《점점 다가서는 우리들》(자하미술관, 서울, 2024), 《New life》(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22), 《하-하-하 하우스》(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21)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김허앵의 작품은 경기도어린이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