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연의 작품은 풍부한 상상력과 다층적인 세계로 가득 차 있다. 그녀의 작업 속에는 서로 다른 여러 세계가 공존하며, 비범한 것과 현실적인 것, 충만함과 결핍, 미시와 거시의 개념,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변주가 함께 나타난다. 특히 그녀의 작업은 서로 동등한 중요성을 지니면서도 다른 방향을 향하는 두 가지 탐구를 제시한다.
한편으로 그녀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를 상상하고 탐색한다. 동시에 또 다른 차원에서는 회화적 영역 안에서 시간이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때로는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 이 두 가지 탐구는 민정연의 작품을 더욱 깊이 읽어낼 수 있는 흥미로운 토대를 형성하며, 가능성과 잠재성이 열리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민정연의 작업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이론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왔다. 그녀의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작품 감상 경험을 더욱 복합적이고 풍부하게 만들며, 단순한 미적 경험을 넘어 지적 사유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들뢰즈의 몇 가지 핵심 개념을 살펴보는 것은 민정연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들뢰즈는 차이(difference)의 힘, 즉 사물들을 서로 독특하게 만들고 구별 짓는 요소에 대해 논의하면서 ‘생성(becoming)’의 담론을 전개한다.
생성이란 우리가 사고의 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비평가 클레어 콜브룩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던진 핵심 질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가치, 새로운 욕망, 새로운 존재 방식과 사유의 이미지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가?” 이 질문은 민정연의 예술 실천에도 매우 중요한 문제로 작용한다.
들뢰즈는 예술가에게 가능성의 관점에서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즉, 상상력이 극한까지 확장될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도록 자극한다. 민정연에게 이러한 극한의 지점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 사이에 존재한다. 그녀가 구축하는 상상의 세계들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한 고유한 힘, 삶을 단절시키고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요구한다.
이러한 힘의 흐름을 작품 속에서 추적하는 것은 민정연의 작업이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그녀가 어떠한 비전을 제시하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이 된다.
민정연의 작품 〈무제〉는 붉은 점들의 막 너머로 산악 풍경이 펼쳐지고, 강과 풀밭 위로 뿌리 구조가 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회화 속에 환상적 세계, 혹은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상적(virtual) 세계’를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전 작업과 구별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녀의 가상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경험과 관찰을 넘어 존재하는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제〉는 일종의 준비 작업이자 출발점으로 기능하며, 민정연이 새롭게 탐구하기 시작한 공간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 작품에서 풍경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화면에는 르네상스 이래 현실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사용되어 온 원근법의 흔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르네상스 화가들과 달리 민정연의 원근법은 은밀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화면 전면에 놓인 붉은 점들의 막은 시선을 전경과 배경 사이에 머물게 하면서, 정작 관람자의 주의를 전경에 떠 있는 기이한 뿌리 구조물로 집중시킨다. 이 붉은 막은 관람자가 자연주의적으로 묘사된 배경의 산맥 속으로 시선을 흘려보내는 것을 차단하고, 낯설고 설명하기 어려운 대상인 뿌리 형상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민정연은 우리가 자신의 세계를 단순히 익숙한 경험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원근법을 통해 친숙함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 안에 낯선 요소를 삽입함으로써 관람자의 인식을 흔들어 놓는다.
작품 중앙에 자리한 이 기이한 뿌리 구조는 들뢰즈적 관점에서 ‘리좀(rhizome)’ 개념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식물학적으로 리좀은 감자, 생강, 풀과 같이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뿌리 구조를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생물학적 개념을 철학적 은유로 확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리좀은 모든 방향으로 분기하며 표면을 따라 확장되기도 하고, 구근이나 덩이줄기로 응결되기도 하는 등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리좀의 어떤 지점도 다른 어떤 지점과 연결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
이 작품에서 뿌리는 붉은 점들의 막과 연결되고, 아래의 물과도 연결된다. 또한 뿌리 구조 안에는 두 개의 틈 혹은 균열이 존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기거나 파괴될 수 있지만, 이전의 선을 따라 혹은 새로운 선을 따라 다시 자라난다”고 말한다. 이러한 균열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리좀이 살아 움직이며 호흡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리좀은 끊임없이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며 성장하고 발전한다.
단절은 삶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진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며, 균열은 새로운 시작과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러한 뿌리 구조는 민정연의 작업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무제〉는 익숙한 세계와 낯선 세계를 결합하려는 작가의 시도를 보여준다.
원근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 가상적 세계를 구분하는 장치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작가는 안전하고 익숙한 환경 속에서도 낯섦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민정연의 회화는 현실과 상상, 안정과 불안, 친숙함과 이질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무제〉가 낯익은 세계 속에 기이한 뿌리 형상이 출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면, 〈변신–그 순간이 도래하다(Métamorphose – le Moment est Arrivé)〉에서는 관람자가 처음부터 낯선 환경 속으로 던져진다. 이 작품에서는 익숙한 존재가 초자연적인 변형을 겪는다.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식별 가능한 존재인 북극곰은 우리의 눈앞에서 서서히 해체되며, 이제 이 기묘한 세계의 일부로 자리 잡은 뿌리 같은 리좀 구조로 변모해 간다.
익숙한 붉은 점들은 시선을 소실점으로 이끄는데, 그 끝에는 붉은 사각형의 문이 놓여 있다. 그러나 화면 전경에 떠 있는 뿌리 형상들과 변신 과정은 배경의 문으로 향하는 붉은 경로를 따르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오히려 그것들은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데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며, 관습이나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을 암시한다.
이 북극곰은 자아가 사물들의 흐름 속으로 해체되고 스며드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신들에 의해 인간이 동물이나 자연물로 끊임없이 변형되는 세계를 다룬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를 연상시키지만, 민정연은 보다 구체적으로 질 들뢰즈의 ‘동물-되기(becoming-animal)’ 개념을 참조한다. 다만 그녀는 변형의 출발점을 인간이 아닌 동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동물-되기’란 자신을 동물의 관점에서 상상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늑대는 인간의 어떤 성질이나 상징을 의미하는 기호가 아니라, 또 다른 지각의 방식이자 생성의 방식이다. 늑대를 지각할 때 우리는 세계를 다르게 지각하며, 더 이상 인간 중심의 시각 속에서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 남지 않는다.” 민정연의 작업에서 ‘동물-되기’는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기 위한 대안적 과정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다른 관점을 경험하게 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 내부에 또 다른 환상적 세계, 혹은 ‘타자의 세계’를 열어 놓는 방법이다. 이러한 생성의 과정은 현실과 상상이 맞닿는 경계에서 이루어지며, 관람자가 기존의 인식 체계를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Passages #3〉는 민정연이 구축한 ‘또 다른 세계(Other world)’ 가운데 가장 실험적인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미로처럼 얽힌 통로들과 비밀스러운 공간들로 이루어진 촉각적 환경을 완결된 하나의 세계로 구축해낸다. 이러한 시각화 방식은 관람자로 하여금 설득력 있는 서사를 상상하게 만든다. 비평가 알래스터 파울러가 말했듯이, “좋은 이야기는 아무리 비현실적이라 하더라도 C. S. 루이스가 말한 ‘재현적 리얼리즘(presentational realism)’의 요소를 지닌다.
이는 내용의 사실성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재현적 리얼리즘이란 “무언가를 우리 가까이로 끌어와 촉각적으로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만드는 예술, 즉 예리한 관찰이나 예리하게 상상된 세부 묘사를 통해 대상을 현실감 있게 제시하는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민정연이 창조한 세계는 낯설고 흥미롭지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상들과 발전된 조형 언어는 관람자에게 일종의 시각적 안전망을 제공한다. 이러한 장치는 실험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지각 방식과 새로운 시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북극곰은 새로운 세계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북극곰은 화면 속 스케일의 기준점이 되어 주며, 작가가 정교하게 묘사한 수많은 대상들은 세계의 깊이와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환상적인 장면 속에서도 일종의 현실성을 확보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북극곰은 이 세계의 ‘재현적 리얼리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작품 왼편에는 거대한 빈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화면의 일부, 혹은 세계의 일부가 지워져 버린 듯한 이 공간은 서로 다른 공간이 교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텅 빈 면의 강렬한 평면성은 환상적 세계가 지닌 깊이감, 그리고 둥글고 유기적인 형상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화면 속 두 마리의 북극곰은 어딘가를 돌아보며 향수 어린 시선을 보내는 듯하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점차 접근할 수 없게 되어가는 비밀스러운 세계, 동시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계이다. 빈 공간 상단과 화면 중앙 부근에는 갈색의 구멍들이 보인다.
이 구멍들은 어떤 표면 아래로 파고들거나 관통하는 통로처럼 보이며, 어쩌면 내부에서 바라본 리좀의 단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구멍들은 세계 안팎을 오갈 수 있는 진입구와 출구를 암시한다. 따라서 환상적 세계는 완전히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다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무한한 잠재성과 함께 계속해서 이어진다.
〈숨바꼭질(Cache-Cache)〉에서는 인간 형상이 작가 자신의 자화상 형태로 이 세계 안에 등장한다. 두 명의 여성 인물 중 한 명은 민정연 자신이며, 두 인물은 마치 피신하듯 어떤 공간에 머문다. 한 여성은 외부에 노출되어 있고 다른 여성은 보호받고 있다. 거대한 꽃과 같은 식물들이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인물들은 그 식물들의 꼭대기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나타나는 스케일의 차이는 이전 작품들과 비교해 더욱 극단적이다.
인물들은 압도적이고 때로는 폐쇄공포증을 유발할 정도로 거대한 환경 속에서 매우 작게 묘사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왜소한 존재로 표현된 인물들이 전혀 불안하거나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인물 모두 이 낯선 환경 속에서 놀라울 만큼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거대함과 왜소함의 대비는 자연스럽게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민정연의 작업과 이러한 환상 서사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등장인물들이 낯선 세계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이다. 작품 속 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세계를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도 드러내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같은 이야기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은 결국 원래의 세계로 귀환하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된다.
그러나 민정연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귀환 욕망이 부재한다. 오히려 〈Passages #3〉에서 보았듯이 북극곰들은 마법 같은 세계를 그리워하며 뒤돌아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 세계를 두려워하지도, 떠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환상 세계는 처음에는 매혹적이고 흥미롭게 보일지라도 결국 불안하거나 위험한 장소로 드러난다. 하지만 민정연의 세계에서는 익숙한 현실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방식 자체를 영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 혹은 삶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민정연의 세계가 지닌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조차도 그 안에서 계속 살아갈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녀의 세계는 하나의 특정한 세계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진입할 수 있는 무수한 가능한 세계들을 상징한다.
한편 〈변신–기다림(Métamorphose-Attendre)〉은 앞선 작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제시한다. 여기서 핵심은 반복적 요소들을 통해 시간을 해체하는 데 있다. 이 작품은 극적인 중심 사건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형태와 인물의 반복을 통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대한 고정된 의미를 흐트러뜨린다.
제목은 화면 속 인물들이 어떤 변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며, 작품의 중심을 시간성에 두고 있다. 이를 〈변신–그 순간이 도래하다(Métamorphose – le Moment est Arrivé)〉와 비교해 보면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 후자의 제목이 변신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면, 〈변신–기다림〉은 그 반대편에 위치한다. 즉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이 아니라, 사건을 기다리는 상태를 다룬다.
이처럼 민정연은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와 시간성을 제시함으로써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와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질문한다. 더 나아가 관람자는 작품 속에서 과연 무엇이 변화를 기다리고 있는지 묻게 된다. 변신을 기다리는 것은 인물인가, 공간인가, 혹은 세계 자체인가. 그러나 작가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그 결과 민정연은 시간을 하나의 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연속체로 이해하는 통념을 흔들어 놓고, 보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시간 개념을 제안한다.
달걀 혹은 조약돌 같은 형태의 물체들은 특히 흥미롭다. 화면 속에서 이 물체들은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땅 위에서는 인물의 작은 크기와 대비되며 거대한 자갈이나 씨앗, 혹은 알처럼 보인다. 반면 공중에서는 나뭇잎이나 눈 덮인 나무, 혹은 구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처음 작품을 마주했을 때 이러한 요소들은 즉각적으로 낯설거나 기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묘한 위화감이 발생한다.
이 물체들은 정확히 무엇인가? 왜 나무에 알이 달려 있는가? 왜 동일한 형태가 땅 위에서도 반복되는가? 그리고 왜 인물 역시 반복되는가? 클레어 콜브룩에 따르면, 질 들뢰즈에게 “반복이란 동일한 것이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다. 반복한다는 것은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갱신하며, 질문을 던지고, 동일한 상태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흰색의 씨앗 같은 형상과 반복되는 인물들은 단순한 재현 대상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담아내는 자리표시자(placeholder)로 기능한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각 정보를 제공하는 듯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사실 오인(misrecognition)에 가깝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낯설고 기묘한 감각이 발생한다. 결국 남는 것은 반복되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민정연의 인물들은 ‘기다림’의 다양한 자세를 기록한다. 짧은 낮잠을 자거나, 무료함 속에서 먼 곳을 응시하거나, 벽이나 나무에 기대어 있는 모습들이다. 이러한 일련의 자세들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단순한 연대기적 측정에서 벗어나 보다 확장된 개념으로 이끌어 간다.
〈식사(Le Repas)〉에서는 시간에 대한 탐구와 또 다른 세계의 구축이 결합된다. 앞서 살펴본 〈변신–기다림(Métamorphose-Attendre)〉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도 여러 명의 민정연이 등장한다. 이러한 반복은 시간적 차원에 대한 실험을 암시한다. 동시에 화면에는 뿌리 혹은 리좀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것은 오직 한 번만 발생할 수 있는 단일한 순간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한 번의 사건과 여러 개의 시간이 동시에 공존하는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민정연과 그녀의 분신들은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 공간 안에서 작은 개입들을 수행한다. 각각의 몸짓은 서로 다른 시간의 순간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테이블 왼편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인물은 식사를 시작하기 전일 수도 있고, 이미 모든 과정을 마친 뒤일 수도 있다. 반대편에서는 손에 식기를 들고 실제로 식사를 하고 있다. 테이블 주변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여러 단계로 펼쳐진다. 한편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민정연은 거의 거울상처럼 보인다.
이는 동일한 순간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것은 같은 인물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유의 순간들을 담고 있는 두 개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작품 속에서 시간은 교란된다. 시간은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되돌아가며, 또 한편으로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정연은 이를 통해 시간을 직선적이고 단일한 흐름으로 이해하는 관습적 사고를 해체하고, 여러 시간들이 공존하는 복합적 구조로 재구성한다.
이처럼 여러 시간의 순간들이 공존하는 장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화면 아래 왼편에는 뿌리 구조가 파열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폭발은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진행 중인 사건이다. 마치 텔레비전 화면이 한 장면에서 정지된 것처럼, 그 순간은 중단된 채 보존되어 있다. 우리는 자동차 사고나 돌발적인 사건처럼, 보통은 지나간 뒤에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민정연은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 찰나를 응시할 수 있도록 화면 위에 붙들어 놓는다.
작가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과 폭발하는 뿌리라는 극적인 사건을 동시에 배치함으로써 이 새로운 공간 안에 서로 다른 강도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순간들이 동일한 공간 안에 공존하면서,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이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를 다시 한 번 흔들어 놓는다. 환경과 시간이 서로 뒤섞이고 중첩되면서, 가능한 것의 깊이와 잠재성은 끝없이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민정연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인 들뢰즈적 리좀의 은유를 떠올려 보면, 현실과 가능성 사이의 연결 관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정연은 익숙함과 낯섦이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뒤섞고 전복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고정된 인식을 흔든다. 그녀의 작업 속에 존재하는 현실성은 환상적인 세계가 설득력을 갖도록 만들며, 그 결과 본래는 기이하고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이 오히려 친숙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변화와 차이, 그리고 타자성에 대한 우리의 저항을 무장해제시킨다. 민정연이 창조한 세계들은 지리적 경계와 시간적 경계를 모두 넘어서는 존재 방식을 제안한다. 그리고 관람자에게 관습과 규범을 넘어선 삶,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