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중, ‘선들’ 시리즈, 2024. 《파노라마》 전시 전경(대전시립미술관 열린수장고, 2024) © 허우중

P 씨에게.

우리는 언젠가부터 한 육면체에 갇힌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사각형의 틀에 몰두하여 어떠한 형상을 쫓다 보니 어느새 육면체 내부에 들어와 있었죠. 그렇다고 해서 P 씨와 제가 틀 안의 소실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육면체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우리는 실제로 육면체의 공간 바닥에 발을 딛고 서서 손으로는 벽을 더듬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P 씨와 제가 한 공간에 대한 각자의 감각을 공유한다고 말하고 나니, 앞서 제가 “육면체에 갇힌 신세”라고 한 말의 모양이 조금 모나게 느껴지네요. 우리가 이 육면체의 공간을 함께 맞닥뜨린 이후에도 여전히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형상을 쫓던 저의 습성이 무의식을 거쳐 모난 모양의 말로 나타난 것일까요?

사각형의 틀에 몰두했다고 말했지만, P 씨가 저에게 설명해 준 형상 자체는 사각형이 아니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어떤 형상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다듬어 보기 위하여 가상의 사각형 틀을 사용하는 데 몰두했다고 말해야 옳겠네요. P 씨가 하나의 형상을 직접 그려서 저에게 네모난 종이와 모니터 화면으로 눈앞에 보여주었던 때 이전부터 아마 우리 둘 모두는 머릿속에서 사각형의 틀로써 그 형상을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상상할 때조차 굳이 사각형의 틀을 통해 형상을 떠올리는 걸까요? 화가인 P 씨에게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인가요? 누군가는 사각형이 인간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인류가 고안해낸 특허품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인간이 소유한 도구(물건)들이 점차 늘어나 이를 여러 줄로 정연히 정리하는 과정에서 공간을 인식하여 사각형을 고안해 냈다고 추정합니다.1 그래서 P 씨처럼 화가가 아닌 저 또한 머릿속에 네모난 틀을 하나쯤은 갖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동일한 사각형의 틀로 동일한 형상을 그리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P 씨의 설명에 근거해 머릿속에 그리던 형상과, P 씨가 나중에 직접 그려서 보여준 형상 사이에는 어딘가 미묘한 어긋남이 존재했습니다. 조금 당황했지만 생각해 보니 이 어긋남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죠.

하지만 P 씨가 그다음 한 말이 저를 어지럽혔습니다. 당신이 머릿속의 사각형 틀에 그린 형상과 실제 사각형 틀에 손수 그린 형상이 서로 얼마나 일치하고 어긋나는지 이제는 스스로도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 그 이야기 말입니다. 돌이켜 추측해 보건대 우리는 그 시점에 이미 사각형의 틀 앞에서 이 육면체의 공간으로 서서히 이행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단지 이 공간에 당도하고 나서야 뒤늦게 알아차렸을 뿐이죠.

잠시 다른 시공간을 경유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 크지 않은 육면체의 공간을 마치 거대한 스트라이크 존(strike zone)과 같이 느끼고는 합니다. 어느 평일 저녁 한 야구장 앞 광장에서 경기 관람을 기다리던 저와 다른 곳에 있던 P 씨가 통화한 적이 있었죠. 사각형의 틀과 어떤 형상의 관계에 관해 한참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경기 시작이 임박해 급히 대화를 마무리 짓고 야구장 안으로 들어선 저는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양 팀의 투수와 포수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의 육면체를 사이에 두고 공을 던지고 잡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P 씨와 나눈 대화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때 투수와 포수는 스트라이크 존이라는 기준이 명확하지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육면체를, 피칭(pitching)과 캐칭(catching)이라는 상호 반복과 차이에 기반한 신체 행위로 가늠하여, 그 가상의 공간에 보이지 않는 형상을 그려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2

다시 우리가 밟고 선 육면체의 공간으로 돌아왔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이 공간은 스트라이크 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지 않고, 사람인 우리를 둘러싸고 있군요. 가상의 육면체를 통과해 유유히 빠져나가는 야구공과 달리 우리는 이 실존하는 육면체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얼마간 우리가 투수와 포수처럼 거리를 둔 채 야구공을 매개로 육면체를 가늠하고 형상을 그려내는 사람들이라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P 씨와 제가 야구공 그 자체인 기분이 듭니다. 다행인 점은 여전히 우리가 공처럼 던져지지 않고도 스스로 움직여 육면체의 면면을 몸소 감각하고 형상을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무한히 광활한 평원으로 유명한 어느 지역에서는 무엇을 만지고 느끼는 행위를 가장 무례한 모욕으로 여기거나, 조잡하고 야만적인 접근으로 치부하는 시각이 있다고 합니다.3 우리도 그 지역의 사람들처럼 멀리서 바라보고 추측하는 것만으로 형상을 그려야 할까요? 이 크지 않은 유한한 육면체의 공간에 서있는 우리에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자,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이제 우리는 사각형의 틀이 아니라 이 육면체 공간 안에서 반드시 형상을 그려내야 합니다. 엄밀하게는 우리가 아니라 화가인 P 씨가 그림을 그리고, 저는 이 공간을 P 씨와 함께 살피는 역할을 하겠죠. 당장 형상의 전체를 알 수 없더라도 이곳의 면면을 밟고 더듬어가며 어떤 형상들을 그려 나간다면, 머릿속에서 한 번에 다 그리지 못하던 커다란 전체 형상을 비로소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온전한 사각형의 틀로 만나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P 씨가 이 육면체의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능성의 공간으로 이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가능성은 아마 무한히 광활한 평야보다는 유한한 공간과의 만남으로 발생하겠죠. 육면체를 유유히 빠져나가 야구장 어딘가에 멈춰 선 공만이 오직 다시금 새로운 형상을 그려낼 또 다른 육면체와 만날 수 있으니까요.

C로부터.


1) 아카세가와 겐페이, 『사각형의 역사』, 김난주 옮김, 안그라픽스, 2016, 70~98쪽 참조.
2) 스트라이크 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KBO(한국야구위원회) 홈페이지의 ‘2024 규정∙규칙 변화’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음(2024.5.8.).
https://www.koreabaseball.com/Kbo/League/GameManage2024.aspx
3) 에드윈 A. 애보트, 『플랫랜드』, 윤태일 옮김, 늘봄, 2015(1998), 94, 120쪽 참조.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