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a Yoo, Bare Life, 2021, Short film, HD, color, stereo, 16min 28sec. © Hana Yoo

레비나스는 진리를 찾으려는 행위, 원하는 대로 대상을 바꾸려는 노동행위, 그리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상의 향유에서 ‘내가 아닌 것’을 파악하여 장악하려는 의도 또는 지향성을 읽어낸다. 세상을 뜻대로 하려는 의지가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가 통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자신의 생각만 하면 어느새 멀어져서 갈라서게 되는 연애 상대, 자신의 뜻대로 하면 삐뚤어지며 벗어나는 자식들, 또한 모르는 사이 갑작스럽게 나를 덮쳐오는 것, 죽음.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주목했던 것은 ‘고통받는 얼굴’을 가진 이웃들이었다. 마음을 준 이웃이었기에, 그들의 고통스런 얼굴은 나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다가가서 그들의 고통과 그 원인을 알고자 하지만, 남들의 고통이란 아무리 알아도 충분히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고통받는 얼굴을 ‘타자’라고 한다.

주체를 알 수 없고, 주체의 의지대로 행하지 않는 타자. 하지만 그것을 향해 다가가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발생한다. 이를 레비나스는 ‘초월’이라 부르며 이 초월이야말로 인간 사회에 ‘윤리’라는 것을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자, 철학에서 가장 일차적인 것이라 말한다. 타자라는 개념이 주체의 이성이나 정신, 혹은 인간의 노동을 사유의 축으로 삼았던 서양 철학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음은 분명하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근원적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 때의 타자란 그 얼굴에 드러난 고통을 알아볼 수 있는 존재로 한정되어 왔다. 우리가 고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 그러나 고통이 없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실험실의 쥐들이나 동물원 우리에 갇힌 동물들이 그러하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대중들의 입장료를 받기 위해 동물원을 설립하자 우리에 갇힌 고릴라는 3일만에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계속해서 고릴라가 죽어 나가자, 당시의 동물학자들은 야생의 열린 공간에 살던 고릴라가 우리 속에 갇힌 것이 답답하여 스트레스로 죽은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하여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 마치 개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말을 반박하던 데카르트와 같이 - 인간의 심리를 고릴라에게 투영한 발상이라고, 소박한 ‘의인화’라고 비난했다.

한 마리도 아니고 많은 고릴라가 반복해서 죽었다면, 죽음을 일으킨 조건에서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리라 가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와 다른 것의 고통은 죽을 때도, 부서질 때도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레비나스의 ‘타자’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은 개나 고양이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에 반박하려 들 것이다. 그들에게 개나 고양이는 가까운 ‘이웃’이기에, ‘고통받는 얼굴’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맺기로 인해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동물보호법이 만들어진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야생쥐의 고통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법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까? 또는 바퀴벌레라면 어떠한가?

인간에게 얼마나 유해한 물질인지 연구하기 위해 실험쥐에게 그 물질을 투여하는 과학자들 중 일부는 아마도 쥐들의 고통을 아는 듯하다. 죽은 쥐를 처리해야 하는 행위의 부담 때문이었을까?

덕분에 동물실험에 대한 제약과 규제가 생겨나고 있지만, 실험을 간소화하기 위해 태어날 때부터 암세포를 달고 태어나는 ‘종양생쥐(oncomouse)’를 만들어 특허를 내고, 유전자 조작 모델로 여러가지 질병에 정신병까지 미리 ‘준비된’ 생쥐를 팔아 돈을 버는 회사가 있으며, 과학자들은 이들 없이는 이제 실험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쥐들의 고통에 대하여 고민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실험실에서 죽기 위해 태어나는 이러한 생명체는, 생명을 위한 연구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생명과학분야의 반어 내지 역설이라 할 것이다.

유해물질을 투여하지 않는 실험이라면 어떨까? 어떤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동물들의 행동 실험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행동패턴을 이해하겠다는 행동주의 심리학자의 실험실이라면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스키너 상자’라고 알려진 이 작은 실험실 속 쥐들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고통을 읽어냈던 이들은 많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쥐라는 동물은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일종의 ‘기계’아니었을까?

기계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우스운 것처럼, 기계-동물의 고통을 말하는 것 역시 우스운 일이었을 게다. “아니, 내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단 말이오?”라고 당시의 과학자들은 비웃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하나의 작품 〈벌거벗은 생명〉에 인용되는 인공지능은 그 상자 속의 쥐들에게서, 유해한 물질을 투여받는 것이 아닌, 단지 마취 수술을 받는 쥐들의 얼굴에서 고통을 읽어낸다.

인간이 지각하지 못하는 쥐들의 고통을 기계는 감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과 비교하였을 때 쥐들과 더 가까운 존재인 걸까? 그럼 기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또한 던져져야 하지 않을까? 조금 뒤에 우리는 이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동물권 운동에 기여한 철학자 피터 싱어는 인종차별주의를 확장하여 종차별주의를 비판한다. 인간을 피부색의 차이로 차별해선 안되듯이, 개나 고양이를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실험실의 쥐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 동물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어선 안된다는 것이, 고통의 공리주의가 그의 신념인 듯하다. 하지만 앞서 나온 질문과 유사한 질문을 던져 보자면: 파리나 바퀴벌레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동물보호운동가들이 바퀴벌레의 생명과 고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들은 아직 충분히 ‘동물’이 되지 못한 것일까?

식물의 경우는 어떠한가? 피터 싱어는 식물에게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명시적으로 부정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채식의 윤리학이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식물에게는 감각이 없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인간의 편견임이 실험실에서 증명되었다. 인간의 눈은 빛을 감지하는 5가지 광수용체를 갖지만, ‘간단하기에’ 실험실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풀인 애기장대는 11개의 광수용체를 갖고 있다. 누가 더 예민한 시각을 가지고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토마토 나무에 기생하는 미국 실새삼은 토마토 냄새가 나는 ‘향수’를 정확하게 찾아 덩굴을 뻗는다. 덩굴식물인 남미의 보퀼라는 자신이 감치고 들어간 나뭇잎의 모양을 정확하게 의태하여 자신의 잎을 만든다. 눈 없이 어떻게 의태 할 수 있는 걸까? 2007년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 연구진은 서양갯냉이가 자신과 동일한 모계(같은 개체에서 얻어진 씨앗들)에 속한 것과 다른 모계에 속한 것을 식별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식물도 친족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많은 종류의 식물들은 곤충이 잎을 갉아먹으면 그들이 싫어하는 페놀 성분의 가스를 방출하며, 이를 인근의 잎은 물론 옆에 있는 다른 나무의 잎들도 감지하여 동일한 가스를 방출한다. 그렇다면 식물에게 고통의 감각이 없으리라는 생각이야말로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할 주장 아닐까? 고통이란 원래 생명체가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시킨 감각임을 생각한다면, 정도나 양상의 차이가 있을 뿐, 생명체가 고통의 감각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생명의 본성에 반하는 것은 없다.

고통받는 얼굴, 즉 고통의 표상을 통해 타자를 정의하는 것은 이처럼 겹겹이 쳐져 있는 장막 뒤의 타자들을 보지 못한다. 그저 인간과 가까운 타자들만을 볼 뿐이다. 인간과 멀리 있는 것들은 그 고통이 지각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타자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다. 고통의 표상은 타자마저 타자화한다.

작품 〈벌거벗은 생명〉 속의 탈북여성이 ‘얼굴 없이’ 실험실의 쥐나 총에 겨누어진 쥐와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과 유비되지 않고선 감지되지 않는, 얼굴 없는 동물, 얼굴 없는 존재자의 고통을 가시화하기 위함일 것이다. ‘벌거벗은 생명’, 아감벤의 책 〈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인간’(호모 사케르)의 궁지가 단지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함일 것이다.

아감벤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동물과 같은 처지에 인간을 몰아넣은 처사를 비난하면서도 동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인간의 삶을 뜻하는 비오스(bios)를 동물적 생명/생존을 뜻하는 조에(zoe)로 추락시킨 근대의 생명정치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인간과 동물 생명의 근본적 단절을 전제하면서, 비오스의 천국과 조에의 지옥을 당연한 듯 분할하고 있는 게 아닐까? 유하나의 〈벌거벗은 생명〉이 아감벤의 정치철학의 유비로 간주되어선 안되며, 차라리 그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