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희는 CGI 영상, 게임 엔진, 웹
기반 인터랙티브 구조, 온라인 전시, 구글 스트리트 뷰, AI와 AR의 감각을 활용해 작업한다. 그의 작업에서 디지털 기술은 단순한 제작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경험하고 판단하는 방식 자체를 구성하는 조건이다. 화면은 종종 게임,
다큐멘터리, 시뮬레이션, SF 내러티브 사이를
오가며, 관객은 완성된 이야기를 관람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가상의 세계 안에서 이동하고 선택하며 의미를
구성하는 참여자가 된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은 영상이면서 동시에 플레이 가능한 세계이고, 다큐멘터리이면서도 사변적 픽션에 가깝다.
‘Hyperobjects’
연작은 정서희의 형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Hyperobjects: Episode I – The Forgotten Town〉은 실제 재난 지역을 구글 스트리트
뷰로 탐색하는 방식에서 출발하지만, 이를 단순한 기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작가는 접근 불가능한 장소를 가상의 게임 캐릭터가 이동하는 공간으로 바꾸고,
현실의 폐허를 게임적 리얼리즘의 장면으로 재구성한다. 〈Hyperobjects:
Episode II – Year 0〉에서는 사람이 사라진 미래 풍경과 하이브리드 존재의 이동이 결합되며, 환경 재난 이후의 세계가 게임화된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펼쳐진다. 〈Hyperobjects: Episode III – Ground 0〉는 지하 벙커와 비밀 도시라는 가상의 설정을
통해 현실의 불안과 계급, 생존의 문제를 디지털 내러티브로 재배치한다.
〈LUCA〉와 〈Cradle of Love〉에서는 작가의 관심이 생태적
위기에서 생명, 기술, 선택의 문제로 더욱 구체화된다. 〈LUCA〉는 모든 생명의 공통 조상이라는 과학적 개념을 가상의
캐릭터로 전환하고, 이를 통해 생명체의 기원과 미래의 공존 가능성을 게임 형식의 다큐멘터리로 풀어낸다. 〈사랑의 요람〉은 웹 CGI 기반 인터랙티브 영상으로 제작되어, 관객이 태블릿 컨트롤러를 통해 작품의 방향에 개입하게 만든다. 네
차례의 선택 구조는 관객을 서사의 외부에 두지 않고, 기술적 판단과 인간적 판단 사이에서 직접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놓는다. 이때 관객의 선택은 단순한 분기점이 아니라, 인간 연결과 기술 윤리의 문제를 체험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2025년
이후의 신작들은 기존 세계관을 다시 호출하면서, 이미지가 소비되는 방식과 기술적 자유의 조건을 더 날카롭게
다룬다. 단체전 《포인트 니모》(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25)에서 선보인 〈미래 게이트〉(2025)는 〈Hyperobjects: Episode I – The
Forgotten Town〉의 후속 작업으로, 다시 잊힌 마을을 향하지만 이번에는 빠르게
교체되는 분절된 화면을 통해 폐허가 단발적 스펙터클로 소비되는 방식을 드러낸다. 단체전 《나는 정복당했다》(아트스페이스 보안2, 서울,
2025)에서 선보인 〈그라운드 0: 리로디드〉(2025)는
선택과 자율성이 실제로는 규율화된 수행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다시 질문한다. 이 작업들은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리는 방식, 그리고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는 구조가 어떻게 행동을 설계하는지를
탐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