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삶
살면서 인간은 얼마나 많은 연극을 해야 하는가. 이 말은 특정 장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무수한 연극을 하게 된다. 연극은 삶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또 다른 얼굴일 것이다. 장성은의 이번 개인전은 ‘연극’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영문으로는 ‘Writing Play’라 부르고 있어 쓰여 나가는 희곡의 뉘앙스가 짙다. 연극의 희곡처럼, 개개인은 삶 속에서 자신들의 연극을 써 나간다.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연극은 그간의 작업을 뒤돌아보면서, 장르에 우선하는 삶의 국면을 성찰한 것이다.
“연극은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다. 연극은 현실도 이상적인 것도 아니지만, 전달이 되지 않는 것을 아름답게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연극이 생활 속에서 이렇게 많이 이뤄지고 있는데, 왜 우리는 부정적으로 느껴야 하는 것일까. 정말 정직하고 오롯한 연극이 필요하다.”
연극은 그녀의 사진에서 계속되어 왔다. 사진은 삶이라는 하나의 물리적 장소를 배경으로 두고, 신체를 등장인물로 하여 보이지 장력을 구축해 왔다. 여기서 장소는 삶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신체와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신체와 신체, 신체와 장소, 신체와 사물이 만나고 맞물리는 상황으로부터 연극적 순간이 발견된다. 신체와 장소 사이를 맴도는 힘들은 최근의 작업에서 가늠할 수 없었던 내면의 상태와 맞닿는다. 이번 전시 《연극》에서는 기존 작업에서 장소와 신체 사이에서 탐구되던 관계, 그 간극에서 팽배하게 존재하던 긴장감과 힘이 사라진다. 공간 속 신체를 통해 ‘목숨의 높이’마저도 가늠해보려던 작가의 연극은 이번 전시에서 신체 그 자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 안을 파고들어간다.
장소와 연극
《연극》에서 드러난 사진 작업에서 신체는 홀로 덩그러니 빈 화면에 놓인다. 쓰여 지고 있는 희곡을 들여다보듯, 사진의 프레임 속 허공에 놓인 신체들을 마주해본다. 아직 장소에 놓이지 않은 허나 공간을 머금은 신체들이다. 기존에는 사진의 화면 안에 배경이자 등장인물과 긴밀히 관계하던 구체적 장소가 있어 왔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신체가 거주할 거소가 사진의 화면에서 공백으로 남겨진다. 사진이라는 프레임 속 신체는 자신들이 놓일 장소, 바로 ‘아마도 예술공간’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분절된 방, 낮은 벽, 닫힌 창, 후미진 모서리 등 전시 공간의 물리적이고 심적인 장소이다. 이 장소는 ‘연극’이 올라가는 무대이며, 이와 관계 맺는 등장인물은 열 여점의 사진이다.
기존의 작업에서 사진의 프레임 안에 존재하던 장소는 프레임 밖, 바로 현실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신체 주변으로 남겨진 공백, 사진의 프레임을 경계로 하여 구체적 장소(아마도 예술공간)-추상적 장소(사진의 배경)-신체(사진의 주인공) 사이의 관계가 설정된다. 장소와 신체 사이에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힘의 관계는 주인공을 둘러싼 여백을 통해 완충된다. 이 여백은 사진이 그 장소에 존재할 시 생겨날 상상의 무게를 가늠한 공간이다. 또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사이에서 낯섦, 긴장감, 균열, 간극이 완충될 중간지대이다.
신체와 가장
사진의 신체들을 들여다보면, 몸의 실체는 다른 가면 뒤로 감추어지고 겹겹이 가려진 상황이다. 몸은 사진에서 과장된 미장센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사물인 양 대체되기도 한다. 〈Bubble〉, 〈Pompom〉 두 사진을 보면, 몸은 겹겹이 얇은 막으로 감기거나 수북이 가려진다. 감추어진 몸으로부터, 몸을 다른 것으로 가장한 이 존재는 무엇을 드러내는가? 몸은 과도한 물질로 드러나나, 보이지 않는 신체는 여기서 몸의 실체를 호소한다. 이는 몸을 작동시키는 내적 세계이자,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의 상태이다. 비록 겉으로는 과장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는 속에서의 감정이 감출 수 없이 드러난 것만 같다. 작가는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인간의 감정, 즉 내면의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신체를 가장해 보인다. 사진의 신체들은 피에로와 같이 우스꽝스럽고 다소 기이한 모습이다.
두 작업을 보면서 떠오른 이미지가 있다. 낭만주의 화가 와토(Jean-Antoine Watteau)의 작업 〈어릿광대의 초상〉이다. 흰색의 부풀어진 광대복을 입은 피에로에게서는 과장된 웃음에서도 깊숙한 슬픔이 전해진다. 프랑스 영화 〈천국의 아이들(Children of Paradise)〉에서도 피에로는 현실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영혼의 상태를 희극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의 사진에서 가장된 몸은 마치 피에로마냥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내면을 연극으로 펼쳐 보인다. 가벼운 물성과 우스꽝스런 외양이 머금은 것은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 상태이다.
한 남성 모델이 포즈를 취한 〈Disposition〉에서, 홍조의 얼굴은 부끄러운 것인지 술에 취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얼굴을 붉게 가장한 상태로부터 시선은 신체의 무게를 가로지른다. 오히려 시선은 몸의 물성을 꿰뚫고 홍조를 지시하는 내면의 감정 상태에 가 닿는다. 사진에서 신체들이 가장된 방식은 몸을 겹겹이 둘러싼 물성으로 지나치게 과장되거나(〈Bubble〉, 〈Pompom〉), 내적 감정 상태나 욕망, 이상에 의해 부분적으로 변형되거나(〈Disposition〉, 〈Replacement〉), 식물, 사물, 그리고 죽음의 상태로 몸의 부재를 가장해 보인다(〈Flowerpot3〉, 〈Witching hour〉, 〈Empty Room〉). 이 모든 눈속임은 존재를 성찰한 시적인 사진이 되기도 하고, 연극적 조각이기도 하며, 숨 쉬는 존재들의 연극이기도 하다. 부동의 자세로 겹겹이 가장된 신체의 상태는 연약하고 공허한 사물을 자처하는 듯하다. 이를 향하는 시선은 삶의 유한함으로부터 공허 너머에 존재하는 죽음의 상태를 응시한다.
기존의 작업에서 장소와 신체 사이에서 가시화된 삶의 무게와 긴장감은 이번의 연극에서 신체 안으로 녹아들어간다. 그렇게 드러난 몸은 얇은 장막 속으로 실체를 감춤으로써, 감정을 담아낼 다른 형태의 신체적 공간을 구축한다. 장성은의 연극은 행하는 것(play)에서 나아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exist) 것들을 성찰해 보인다. 이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표면에서 쌓아가듯 상상의 강도를 더해가는 여정이다. 이를 응시하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가. 잊고 있었던 감정이 한 꺼풀 벗겨져 드러나지 않은가.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된 몸에서 목도된다. 그녀가 가장하는 것은 우리의 신체조차도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의 아름다움이다. 이는 우리 삶 속에서 망각된 소소한 존재들과 무수한 순간들을 상기시킨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정말 정직하고 오롯한 연극’은 절망과 허무의 시대를 지탱해 나가는 사람들의 내면에 담긴 힘이자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진리이며,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이는 그대가 지상에서 아는 모든 것이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존 키츠 John Keats,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가」) 낭만주의 시인의 한 문구가 떠오른 데에는 이유를 댈 수가 없다. 그녀의 사진들이 삶의 오롯한 감정,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