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An Ordinary Failure》 (Gallery Chosun, 2018) © Gallery Chosun

나는 2017년 박지혜 작가를 처음 만났다. 

‘평범한 실패’라는 소설(전시 작품 중 하나였다.)을 쓰는 데에 도움을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를 수락하면서였다. 이듬해 박지혜 작가의 개인전이 열렸고,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레지던시 세미나를 함께 준비하면서 작가와 몇 차례 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박지혜 작가가 언어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작가는 장황하고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말들에는 관심이 없다. 언제나 정확하게 효율적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데에 집중하며, 보다 쉽고 단순하게 언어를 운용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 아마도 단어나 문장이 지닌 단일한 의미를 넘어서 그 말들에 달라붙은 아주 작은 의미들과 그 말들이 가닿을 수 있는 의미의 영역까지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박지혜 작가의 이런 언어적 민감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박지혜 작가 개인의 성향과 취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작가의 설치 작품들에는 단어나 문장이 직접 제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잘못 보셨습니다〉, 〈useless〉,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some-thing〉, 〈그 어느 날〉, 〈아무 일도 없었다〉 같은 작품들 속에 포함된 단어나 문장은 결코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는다. 작품 안에서 그 말들은 사회적 맥락이나 함의와 중첩되면서 전혀 다른 의미와 효과를 불러온다. 그리고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우리가 보편이라고 말하는 제도나 규칙, 표준에 대한 의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나면 작가가 지닌 언어적 민감도를 단순히 개인적인 성향이나 취향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진다. 

언젠가 박지혜 작가는 미술계 안에서 통용되는 언어의 불편함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전시 서문이나 비평, 평론이나 작가 노트, 기획서나 작품 소개글을 말하는데, 작가는 이런 글들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추상성이나 모호함, 불친절함에 어떤 한계를 느끼는 듯 보였다. 

어떤 예술 작품이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감상하고 해석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언어가 동원될 수밖에 없다. 물론 언어가 어떤 작품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결코 작품과 1:1로 대응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작품으로부터 너무 멀거나 가까이 있는 탓에 어떤 오해와 몰이해, 역전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불필요하고 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말해야 하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해. 작가와 작품 사이에 혹은 작품과 관객(독자) 사이에 어쩌면 최초로 놓이게 될 그 가느다란 다리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해. 그건 창작자에게 늘 어렵고 조심스러운 문제다. 어쨌거나 박지혜 작가가 기존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찾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의 작품 세계가 던지는 질문과 밀접하게 이어진다. 그러니까 제도와 규칙, 보편과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을, 기존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에 작가는 아마도 어떤 답답함과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박지혜 작가의 작품이 기존 시스템에 반기를 들거나 전복을 시도한다고 보긴 어렵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 또한 결국 시스템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작가의 작업은 질문이나 제시 같은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작가 개인의 입장이나 의견을 최소화하는 대신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늘 관객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박지혜 작가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표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이고, 그것들을 이루고 지속하는 요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제시하는 사람이며, 그것들을 표현하기 위한 자신만의 언어를 찾는 사람이다.  

이렇게 적고보니 박지혜 작가의 작업을 너무나 명료하고 단순하게 말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남는다. 특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표현할 만한 언어를 찾는 것은 당연해보이고 어려울 게 없는 일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례나 관행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긴 시간을 담보하기 마련이고 그 나름대로의 권력을 지니며, 그래서 그 질서를 따르지 않는 데엔 큰 용기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작품이 기존 시스템 안에서 풍부하게 해석되지 않거나 혹은 언급되지 않으며 그래서 충분히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각오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 

박지혜 작가는 예술가의 존재 이유가 어떤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는 데 있다고 여러차례 말한 바 있다. 나는 그 말이 박지혜 작가가 완성해가는 작품세계의 핵심이고, 본질이며, 힘이라고 생각한다. 박지혜 작가의 작품이 지금보다 더 풍부하고 이야기되고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References